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19
319화
* * *
“잘 생각했어.”
첫 번째 감람이 생긋 웃고 한 손을 몸 앞으로 들었다. 그의 기결에서 번쩍 빛이 솟는 것이 의복 아래로 비쳐 보였다. 상체와 팔을 타고 뻗은 빛이 그의 손바닥 위에 은은하게 빛나는 나선무늬를 새겼다.
호란이 한발 늦게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시, 시문 님. 지금….”
하지만 시현은 손을 저어 보이고 감람 쪽으로 몇 발짝 다가갔다.
“잠시 물러서 있거라. 지금은 결론이 난 일부터 하나씩 해나갈 수밖에 없다.”
호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단을 끌어 시현과 감람에게서 떨어졌다. 세 번째 감람도 준비가 된 듯 첫 번째와 시현 가까이에 섰다.
하지만 정작 시현은 거기서 더 움직이지 못했다. 망설이는 기색을 눈치챈 감람이 시현의 눈을 빤하게 보았다.
“주문에 집중해야 해.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보여줘.”
“…물론이다.”
“나한테 마음 쓸 필요 없는 거 알지?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넌 실리카나 운모에게 길을 만들어준 사람이잖아. 우리에게서 자아가 차지하는 부분이 티끌이나 마찬가지란 걸 알잖아.”
시현이 그를 마주 보았다. 그가 감람에게만 겨우 들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에겐… 아니, 내게는 너희들의 그 작디작은 부분이 중요했다. 내가 미워할 수 있는 것도 고마워할 수 있는 것도 그 부분뿐이니.”
감람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크게 했지만 더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다.
시현이 제 두 손을 감람의 손과 조금 떨어진 곳까지 뻗었다. 손바닥 위 나선무늬를 채웠던 은은한 주홍빛이 점점 희게 변하며 밝기를 더했다.
빛이 확 커지면서 감람의 몸 전체를 희고 푸른 불길이 둘러쌌을 때, 녹회색 눈동자엔 이미 아무 잡념이 없었다.
광채가 공동을 가득 채웠다. 회오리 같은 바람이 시현과 감람의 옷자락을 휘날렸다. 빛이나 풍압이 아니라 막대한 기운에 눌려 호란은 눈을 감고 더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하지만 발산의 순간은 짧았다. 호란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감람에게서 터져 나온 흰 불길은 커다란 빛의 소용돌이 형태로 허공에 모여 있었다. 감람의 손에서 계속 빛나는 불길이 솟아 회전하는 나선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시현은 휘도는 빛을 향해 두 손을 들었다.
“끝도 가도 모르는 것, 본령 안의 본령, 원초 안의 원초여.”
감람이 뿜어내는 기운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막대해졌다. 하지만 소용돌이는 아무리 힘을 빨아들여도 커지지 않았다.
회오리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사방으로 빛을 뿌리던 나선의 꼬리들이 갈무리되었다. 세차던 회전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변하고 빛덩이가 구체에 가까워졌다.
그래도 감람은 만족하는 것 같지 않았다. 첫 번째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부족해. 많이 부족해.”
시현이 눈을 감았다. 그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명하노니 되찾으라. 너는 흐르는 것이며 고이는 것. 순리도 역리도 있기 전의 것.”
“아직 더. 한참 더.”
말하던 도중에 감람의 형체가 무너져내렸다. 다른 돌 인간들처럼 자갈돌이 되지는 않았다. 몸체는 물론이고 의복도, 몸에 지녔던 패나 다른 물건까지 한순간에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마치 형체를 구성할 힘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빛의 구체로 모여드는 힘은 여전히 끊기지 않았다. 돌로 된 신체를 훨씬 넘어서는 무언가가 그 자리에 남아 끝없이 기운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에 응하듯이 구체가 기운을 빨아들이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스러진 첫 번째 대신 세 번째가 말을 받아 이었다.
“한참 더. 조금 더. 이것보다 더.”
“…그릇 이전의 그릇으로, 기억 이전의 시작으로, 인지 이전의 실재로.”
“그래. 그거야. 네가 갈 곳은 감각과 인식이 생겨나기 전의 영역이야. 아까보다 가까워졌어….”
세 번째가 구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목소리는 건조했고 눈은 빛을 반사하는 풍안경 아래 감춰져 있었으나 우뚝 서 긴장한 몸은 분명한 희열을 드러내고 있었다.
천정에 닿을 만큼 크던 구체가 드디어 크기를 줄이기 시작했다. 한번 작아지기 시작하자 구체는 순식간에 주먹보다 더 작은 크기까지 축소되었다.
“원래로, 더 원래로….”
하지만 거기서 시현의 음성이 살짝 떨렸다. 빛덩이도 손가락 두세 마디 크기에서 수축을 멈췄다.
시현은 꽉 감았던 눈을 떠서 세 번째에게 짧게 눈길을 보냈다.
세 번째가, 정확히는 더 이상 순서를 붙여 구분할 필요가 없게 된 감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한계인가. 좋아. 기대한 것보다는 약간 부족하지만 그렇게 나쁘지도 않네.”
감람이 허공의 작은 빛덩이에 손을 가져갔다. 손과 빛이 닿기 직전, 공동의 바닥이 깨어지며 흙이 밀고 올라와 감람의 몸을 두껍게 감쌌다. 얼굴이 흙에 덮이기 전에 그가 말했다.
“조금 기다려. 이 기운을 별에 돌려보내고 돌아올게.”
감람과 압축된 기운을 함께 덮어싸며 커다란 흙기둥이 섰다. 내부로부터 번쩍 빛이 솟는가 싶더니 기둥은 단단하고 치밀한 돌덩이로 화했다.
겉보기는 원래부터 거기 서 있던 것 같았지만 표면에서 빛나는 작은 기결은 그것이 평범한 기둥이 아니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말없이 기둥을 바라보고 선 시현에게 호란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일단… 끝난 거죠? 시문 님, 괜찮으세요?”
“괜찮다.”
“무리하신 건 아니에요?”
“아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무리가 되는 건 복잡한 주문을 연발할 때다. 다루는 힘이 얼마나 큰지는 상관없다.”
시현은 설명을 덧붙였지만 그건 습관적으로 입을 움직인 것뿐이었다. 기운의 제어를 놓은 순간부터 그의 생각은 한 곳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아마 호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아무도 선뜻 말이 안 나오는지 공동은 잠시 조용했다. 결국 호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단, 시문 님, 방금 들은 얘기요. 그, 감람 둘이 말한 거요….”
시현은 그제야 뒤로 돌아섰다. 호란의 얼굴은 온통 혼란에 빠져 있었다.
“너무 이상한 이야긴 건 아는데…. 근데 그게… 걔들이 잘못 알아서 한 말 같지가 않고….”
“그래. 잘못 알고 한 말이 아닐 것이다. 저들은 최초의 법술사가 태어나기 전부터 인간을 지켜보아 온 이들이다. 말이 이치에 맞고, 저들에게 중요치 않은 일로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시현의 말은 느리고 설득 조를 띠고 있었다. 호란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저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오히려 호란이 시현보다 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그치만 땅님은… 땅님은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땅님이잖아요? 마법이 생기기 전에는 땅님하고 반민이 구분이 안 갔어도, 그다음에는 마법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로 나눠진 게 아니에요?”
“하지만 법술은 타고나는 능력이 아니다. 배우는 것이다.”
시현이 말했다.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 납득이 끝났는지 말이 다시 빨라져 있었다.
“역대 문 중에 두엇, 날 때부터 기운을 읽었고 배우지 않아도 주문을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는 한다. 하지만 그 말은 교육 없이 기운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전설이 될 만큼 드물다는 뜻이다. 기감을 트는 데도, 기운을 움직이는 데도 인도와 훈련이 필요하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기운을 의미 있는 물리 작용으로 바꾸려면 각 과목에 대한 깊은 공부가 더해져야 한다. 배우지 않고 다다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그걸 배울 수 있는 자질이 땅님한테만 있는 걸 수도 있잖아요.”
“나도 그렇게 배웠고, 그런 줄 알았지.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란 증거가 바로 호란 네가 아니냐.”
호란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당황스럽고 납득이 안 가도 그것만은 자신이 반박할 수 없었다.
시현이 말했다.
“호란 너는 거석의 기운 읽기를 배웠고, 다른 하늘인들도 적대하는 상대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이들이 숱하지. 이제까지 땅인들은 그것을 땅인이 기운 읽는 능력과 다르다고 구분 지었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이 같은 능력이란 것을 안다. 불필요한 구분을 머리에서 지우고 체계적으로 연마한다면, 아마 누구나….”
시현은 거기서 말을 멈췄다. 하지만 호란은 그 뒤에 따라올 말이 어떤 내용인지 짐작했다.
호란은 뒤를 돌아 단을 바라보았다.
단은 감람이 사라진 이후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호란이 더듬거렸다.
“그럼, 진짜로…. 반민한테도, 재능 같은 게….”
“죽었을 거야.”
단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메마른 목소리였다.
“반민 중에 마법에 재능 있는 애가 있었어도, 죽었을 거야. 자기가 앓는 게 신이명인지도 모르고 처치를 못 받아서 죽거나. 열날 때마다 줄창 호달자나 달여 먹어서 있던 기감도 없어지거나.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그 확률을 뚫은 애가 있었더라도, 뭔가 의미 있는 능력을 보였다면 주위에서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
“그랬을 것이다.”
시현이 말했다.
호란은 눈 둘 곳이 없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실감이 찾아왔다.
누구였더라? 호란이 처음 남운관에 갔을 때, 땅님이라고 날 때부터 마법 쓰는 게 아니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세상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거기서 한 걸음 더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 똑똑한 단이나 시문 님조차도.
호란이 확인하는 것처럼 한 번 더 물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단도 땅님이란 얘기지?”
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호란이 다시 물었다.
“단만이 아니라, 이 세상 반민이 전부 땅님이었단 거지?”
“그렇다. 그런 이야기구나.”
대신 대답한 것은 시현이었다. 완전히 결론이 나자 오히려 침착을 잃은 듯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가 호란과 똑같이 자기 손을 내려다 보았다.
“위로 났으니 위로 정해진 줄 알았고 힘을 지녔으니 위가 마땅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사실이 아니었구나.”
조금만 머릿속에 자리가 났어도 단은 시현한테 닥치고 있으라고 말했을 것이다. 저거는 틈만 나면 말을 하는 게 아주 병이었다. 지금 내가 위로 산 놈이 알고 보니 위가 아니라서 허무한 얘기를 듣고 있어야 돼?
생각을 해야 하는데 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마 저가 욕이 느는 것은 세상에 생각해도 답이 없는 일이 너무 많아서일 것이다.
맨 처음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누구였을까? 단 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여럿이 비슷한 때에 알게 되었을까?
어느 쪽이거나, 쉽게 전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니 처음에는 몇 개 집단, 몇 개 가문에만 마법이 내려갔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시간이 흐를수록 밖으로 밖으로 퍼져나갔을 거다. 쓰는 사람이 늘고, 쓰이는 마법의 종류가 늘고, 계속 퍼져나가던 중간에… 누군가가 누군가를 구분 지었다.
재능이든, 재산이든, 편이든, 사는 곳이든, 처음에 무엇으로 구분했든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구분을 한다는 것이었을 테니까.
그게 다였다. 가진 것은 없고 숫자만 많은 자들을 반민으로 구분 지어 떨궈 낸 땅인들은 하늘인의 위로 올라갔다. 더 이상 땅인들을 반쪽짜리라고 못 부르게 된 하늘인들도 자기들 사이에서 다시 몫꾼과 반쪽짜리의 구분을 나눴다.
아마 그것이 사람이 하는 일일 것이다. 구분 짓는 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