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2
032화
* * *
바짝 독이 올라 전장에 돌아간 사비는 각루에 오르지 않았다.
말리는 사람들에게 호통을 쳐 가며 성 밖에 나갔다.
성치 않은 몸으로 후열에서 고함을 지르며 몫꾼들을 독려했다.
때로는 전략보다 기세가 전황을 바꾼다. 독 올라 있기로는 사비 못지않은 치풍관 몫꾼들은 죽을힘을 다해 전선을 밀었다.
전선이 전진하는 만큼 거석들이 움직일 여지는 좁아지고 몫꾼들의 투력은 집중되었다.
“좋아!”
전열 한끝의 큰 거석이 정통으로 철구에 맞아 뒤로 넘어가는 걸 보고 사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뒤에서 동우가 그를 잡아주며 말했다.
“사비 큰머리, 이제 지휘 각루로 올라가.”
“아직 더 움직일 수 있어!”
“누가 뭐래? 지휘관이 위에서 전황을 봐야지. 우리 이제 총령 없다고.”
동우가 본심을 덧붙였다.
“니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한참이나 위를 지켰잖아! 나도 손발이 근질거리거든!”
“쳇!”
사비가 고집을 꺾자 동우는 곧바로 그를 받쳐 안고 성벽을 타올랐다.
각루에 올라가자 반민 보좌들 사이에서 지휘기를 들고 섰던 수리가 불평했다.
“아, 동우 대장, 금방 온댔잖아! 얼마나 걸리는 거야!”
사비가 딱하다는 눈으로 동우를 보았다.
“아무리 있기 싫어도 그렇지 얘를 각루에 얹어놨냐.”
“너 데리러 간 동안만 놔둔 거거든….”
동우가 변명했다. 동우와 수리는 곧 아래로 내려갔다.
사비는 숨을 한 번 가다듬고 지휘기를 쥐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돌연 남쪽 성곽 위 한가운데에서 콰앙 충격음이 났다.
성벽 윗부분이 국자로 떠낸 것처럼 떡 떨어져 나가 아래로 추락했다.
“뭐야!”
남쪽으로 몸을 돌린 사비는 눈을 크게 떴다.
파여 나간 성곽 끄트머리에 사람 둘이 서 있었다.
알록달록 화려한 옷에 회색기 도는 진한 색 피부. 작은 체격 하나에 거구 하나.
보고받았던 괴인이었다.
모들과 거구는 곧바로 다시 움직였다.
두 사람이 한 번 뛸 때마다 성벽에 설치된 포대가 하나씩 박살이 났다.
화포를 지키던 하늘인들이 덤벼들었지만 상대도 되지 않았다.
괴인들이 벌레 쫓듯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치풍관이 자랑하는 몫꾼들이 족족 나가떨어졌다.
거구가 화포를 하나 들어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말했다.
“이거 대포 맞아? 뒤쪽에 탄환 넣는 구멍이 없는데?”
“몰라. 이걸로 포 쏘는 거 봤으니까 대포 맞겠지.”
모들이 대수롭잖게 말하며 다른 화포의 가운데를 짚단 꺾듯 접었다.
거구가 다시 한번 뛰었고 또 하나의 포대가 날아갔다.
포대를 차례차례 파괴한 두 괴인은 순식간에 서남 각루에 도착했다.
모들과 거구가 맞춘 듯한 동작으로 뛰어올라 각루 지붕 양쪽을 걷어찼다.
대들보와 서까래가 폭약이라도 터진 듯 산산조각 나며 날아갔다. 부서진 기왓장이 빗발처럼 흩날렸다.
보좌들이 비명을 지르며 깃대를 놓치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사비!”
“오지 마!”
사비는 자신을 데리러 달려 올라온 동우에게 소리쳤다.
의미 없는 외침이었다. 동우가 사비에게 다다르기도 전에 거구의 그림자가 동우를 향해 뛰어들었다.
거구의 큼직한 주먹이 빙 돌아 동우의 등줄기를 쾅 쳤다.
동우는 단매에 고꾸라졌다. 바닥에 쓰러진 그는 그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모들이 뒤따라 각루 위로 뛰어내렸다.
보기에는 가벼운 동작이었는데 쿵 소리가 크게 나며 각루 바닥에 금이 갔다.
“색 있는 머리띠가 두 줄. 네가 통솔자구나.”
모들이 웃으면서 사비를 손가락질했다.
사비는 눈을 부릅뜬 채 그와 거구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비는 누구보다 경험 많은 몫꾼이었다. 상대가 움직이는 것만 보아도 역량이 가늠이 갔다.
설령 자기 몸이 성하더라도, 자기가 전성기더라도, 눈앞의 상대에게 잇자국 하나 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이들 같은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사람인가?
‘그들이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럽다’던 시현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이제 사비에게 그와 다시 이야기해볼 기회는 오지 않겠지만.
모들이 간들대는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너희는 조금 웃기더라. 통솔하는 애가 없어지면 다른 애들도 효율이 떨어지던데….
하긴 하늘인은 통솔자를 ‘머리’라고 부르지. 하하하. 너희가 모여서 정말 한 몸을 만들기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넌 누구냐. 치풍관에 무얼 원하나?”
사비가 입을 열어 물었다. 모들은 대꾸하기는커녕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듯 멋대로 지껄였다.
“인간은 머리를 떼내면 죽지? 너희 무리도 죽는지 안 죽는지 한번 볼까?”
그가 사비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비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치켜떴다. 이게 그의 끝이었다.
그때 쇠를 쪼갤 듯 서슬 오른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쏘아져라!”
“모들아! 위험해!”
거구가 소리쳤을 때는 늦어 있었다.
푸르도록 흰 빛을 내는 광선이 직선으로 뻗어와 모들의 갈비뼈 아래를 파고들었다.
모들의 얼굴이 경악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사비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물러났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치풍관에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반쯤 무너진 각루 한끝에, 호란과 시현이 서 있었다. 시현의 손에는 작은 패물이 들려 있었다.
“모들아!”
거구가 모들 곁으로 달려왔다.
“억… 억… 억….”
모들은 한쪽 옆구리를 움켜쥐고 신음하고 있었다.
사비는 천천히 두 사람에게서 거리를 두며 모들을 곁눈질했다.
분명히 빛줄기가 검날처럼 몸을 뚫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시현은 이미 다른 마력석을 바꾸어 들고 무언가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의 앞에 작열하는 빛 덩어리가 떠올랐다.
시현이 다시 외쳤다.
“쏘아져라!”
빛이 살처럼 모들을 향해 뻗었다.
거구가 그 앞을 가리고 빛을 막아 세우려는 듯 굵은 팔을 치켜들었다.
광선은 거구의 손바닥을 뚫고 팔뚝까지 파고들며 빛을 튀겼다.
“우극!”
거구가 신음했다. 이번에도 피는 솟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에서 팔뚝까지 굵은 금이 가는 것을 사비는 보았다.
모들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아아아! 징그러운 인간들!”
그대로 시현에게 돌진하려는 그를 거구가 붙잡았다.
“모들아! 많이 다쳤어! 피해!”
“싫어! 저거를….”
“쟤 마력석 많아! 내가 꼭 죽여줄 테니까 일단 물러나자!”
거구가 모들을 안아 올렸다. 그사이 다시 한번 시현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쏘아져라!”
거구는 광선을 피해 모들을 안고 각루 아래로 뛰어내렸다.
시현이 손짓하자 빛줄기가 붓으로 그린 듯 휘어지며 그를 쫓았다.
모들의 분한 고함이 울린 것을 들으면 맞은 것 같았다.
시현은 다 쓴 마력석을 내던지고 옆에 멘 걸낭에서 마력석 몇 개를 더 꺼냈다.
다시 주문을 외우려고 정신을 집중하는 시현에게 사비가 몇 걸음 다가왔다.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네가 왜…? 마력석은 어디서….”
“급하다!”
시현은 꾸짖듯 사비의 말을 끊고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성곽 아래 전장을 향해 있었다.
사비도 바로 정신을 차렸다.
전열이 무너지고 있었다. 포격 지원이 끊어진 데다 성곽과 각루가 무너져 몫꾼들이 동요한 탓이었다.
사비는 적색 지휘기를 주워들어 휘두르며 천둥처럼 소리쳤다.
“우일군! 우이군! 하강!”
구석에 흩어져 엎드렸던 보좌들도 엉금엉금 기어와 색기와 북채를 손에 들었다.
절벽 위에 있던 우군 일부가 내려와 전열을 보강하자 좌군과 중군도 다시 태세를 가다듬었다.
그 앞에 굵은 벼락 네 줄기가 내리꽂혔다.
“네 본령이 되어라! 강하하라!”
시현의 외침과 함께 전격이 휘몰아쳤다.
벼락을 맞은 거석 넷의 기결에서 불빛이 지글지글 끓었다.
놈들은 그대로 힘을 잃은 돌덩이로 화했다.
“전진! 중군 전진!”
사비가 황기를 높이 들며 외쳤다. 둥둥 북이 울렸다.
느닷없는 마법의 작열에 대열이 당황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큰머리의 지휘가 내려가는 한 대장과 머리들도 제대로 움직일 것이다.
시현이 다시 걸낭 속에 손을 넣으며 호란에게 말했다.
“호란, 내려가라. 너도 싸워라!”
“시문 님을 혼자 놔둘 순 없어요! 그 큰 놈이 돌아온댔잖아요!”
“너 같은 전력이 가만히 서 있는 건 낭비야!”
“그럼 시문 님도 같이 내려가요!”
호란이 시현을 안아 올려 각루 아래로 뛰어내렸다. 시현이 가타부타 말할 틈도 없었다.
“어디로 갈까요?”
성곽 앞에 가볍게 내려선 호란이 물었다.
시현은 숨을 들이켰다. 온 전장에서 거친 기운이 날뛰고 있었다.
작열하는 돌과 사람의 투기, 꺼져가는 생명력, 끊기고 몰아치는 기운의 흐름이 굉음과 비명과 함께 신경을 파고들었다.
시현은 이제까지 성안 높은 곳에서만 싸웠다.
보고를 받아 지원이 필요한 곳에 가고, 전장 전체를 내려다보며 더 큰 힘이 필요한 곳을 판단하여 움직였다.
그 방법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효율적이라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장 한가운데에서만 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전열이 좁혀진 지금, 자신의 역량이 한정 지어진 지금이야말로 그것이 필요했다.
시현은 전열 한가운데를 짓치고 있는 유독 거대한 대장석을 가리켰다.
“저것부터 해치우자. 저것의 기결에 최대한 가까이 나를 데려다 다오.”
“네!”
호란은 곧바로 뛰었다. 시현을 안아 든 채 대열을 뛰어넘으며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왼대열 하나! 몸… 둘!”
호란은 대열 사이사이의 빈 공간을 밟고 계속 뛰었다.
동족의 신호에 치풍관 몫꾼들도 경계하거나 방해하지 않았다.
둘이 목표로 삼은 거대한 대장석 앞에는 큰 대열이 모여 고투하고 있었다.
방금 철구 공격이 대장석의 팔에 튕겨 나가 대열이 흐트러진 참이었다.
대장석이 다시 위협적인 두 팔을 휘둘렀다.
시현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호란은 대열의 틈을 파고들며 외쳤다.
“왼대열 하나! 돌격한다!”
“네 본령이 되어라-”
호란은 대장석의 팔이 내리쳐진 틈에 앞으로 뛰어올랐다.
바로 앞에 대장석의 불길 같은 기결이 있었다.
시현이 쥐었던 마력석을 공중에 놓았다.
“찌르라!”
외침에 응해 마력석에서부터 강렬한 전격이 뻗어 나갔다.
전격에 꿰인 기결에서 빛이 파식파식 튀었다.
대장석이 신음 같은 진동을 구웅 울리며 무릎을 꿇었다.
기결의 빛은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시현이 외쳤다.
“호란! 힘이 모자란다! 네가 쳐라!”
호란은 일순 고민했다. 하지만 곧바로 판단을 내렸다.
대장석 앞에 착지한 후, 대치하고 있던 대열의 머리에게 얼른 시현을 맡겼다.
“시문 님 부탁해!”
머리는 똥그래진 눈으로 시현을 붙잡았다.
호란은 곧바로 돌격했다. 대장석은 팔다리를 버르적거리면서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흩어졌던 기운이 모이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야아아아!”
기합과 함께 호란의 공격이 무늬 한쪽을 치고 들어갔다.
타점의 안쪽, 대장석의 몸 깊은 곳에서 뭔가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대장석이 빛을 잃으며 뒤로 넘어갔다. 남아 있던 빛이 빠르게 흩어졌다.
호란은 대장석의 몸통 위에 내려섰다.
시현이 아래로 다가와 저를 올려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호란은 곧바로 움직여 시현을 가장 높은 곳에 올려주었다.
전선 한가운데의 가장 큰 놈을 넘어뜨렸기에 잠깐은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여유가 길지는 않았다.
쓰러진 대장석을 부수고 밀어내며 거석 떼가 계속 밀려들고 있었다.
시현이 또 하나 마력석을 꺼내 들며 하늘인들에게 외쳤다.
“나는 남운관의 완시현 문이다! 그대들과 함께 싸우고자 한다! 협력을 청한다!”
하늘인들은 적대하는 태도는 아니었지만 함부로 호응하지도 못했다.
어차피 서로 신경 쓰기엔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쪽의 뜻을 알리는 것으로 족했다.
시현은 바로 전장으로 돌아섰다.
그가 대장석 몇 개를 점찍으며 호란에게 말했다.
“저것, 저것, 저것을 차례로 공격할 것인데 이번처럼 힘이 모자랄 것이다. 마력석을 아껴야 하니 네가 마무리를 지어라. 그 후에는 네 판단으로 싸우거라.”
“네!”
호란은 곧바로 시현이 첫 번째로 점찍은 대장석을 향해 달렸다. 그 뒤를 따라 전격이 날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