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21
321화
* * *
거대한 힘이 대지를 점령했다. 하지만 그 힘은 땅을 흔들지도 지반을 쪼개지도 않았다.
가진 구조를 잃고 지반에서 떨어져나온 토사가 중력을 거스르며 위로 위로 밀고 올라가 지표 밖까지 넘쳐흘렀다.
일행의 앞으로 길을 열어주듯 대지가 물러났다. 힘이 밀고 지나간 자리에 좁은 방사형으로 골짜기가 생기고, 밀려 올라간 흙은 경사를 만들며 구덩이 바깥에 쌓였다.
시현이 마력석을 계속 바꿔 들자 공간이 뻗어나가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공간이 수십 장을 더 나아가자 드디어 찾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어서는 흙 사이로 사람 여럿이 허우적대며 빠져나왔다.
“제가 먼저 가 볼게요!”
호란이 소리치고 달려 나갔다.
대지가 물러나면서 속속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현이 빠르게 손을 쓴 덕택에 다들 무사해 보였다. 쓰러진 사람도 몇 있었지만 잠시 흙더미에 파묻혔던 것뿐인지 몸을 움직이며 기침을 하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달려오는 호란을 보고 은실이 소리쳤다.
“호란! 채 도련님은?”
“저기 뒤에 시문 님이랑 같이 계셔! 다들 무사해?”
“그런 거 같….”
은실은 흙을 털며 주위를 둘러보다 말고 몸을 굳혔다. 호란도 눈을 크게 떴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무리에 사람이 몇 모자랐다.
은실이 황망하게 소리쳤다.
“율이가… 속필 님이 없어! 반하도!”
“유는! 장유는?”
“어, 그 사람도… 없는 것 같은….”
호란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현이 열어 놓은 공간은 좁은 방사형을 만들며 뻗어, 지은학당 사람들이 있는 곳에 다다라서는 웬만한 군영 훈련장보다 훨씬 더 넓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유와 율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하유관 관군 무리가 서로를 수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쪽에도 하늘인의 새카만 머리칼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은학당의 의법사 성지가 땅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안 보이는 몇 사람은 지하로 내려간 것 같다.”
“지하요?”
“저기를 보거라.”
성지가 제 뒤쪽을 가리켰다. 얼마 떨어진 곳에 상당히 큰 구멍이 수직으로 뚫려 있었다.
입구는 시현의 마법으로 형태를 잃었지만 정사각으로 뚫린 모양을 보면 인공적인 구조물이었다.
“통로가 막히고 채인 어른과 떨어져 새 길을 찾던 중에 발견했다. 마지막에 통로 전체가 무너지기 직전, 그 반민 장인과 속필은 저 구멍 앞에 있었다. 무너지는 천정을 피해 구멍 아래로 뛰어내렸을지도 몰라.”
호란은 얼른 달려가 통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통로는 둘레가 한 장이 넓게 넉넉해 입구로 비쳐 드는 빛으로 바닥이 보였다.
“유야! 속필 님! 반하!”
호란은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러 보았지만 통로 안쪽으로 호란의 목소리가 울릴 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호란은 더 생각하지 않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수직 통로는 세 장 정도 깊이였다. 유와 율비에겐 위험한 높이지만 반하가 데리고 내려왔다면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통로 아래는 바닥에 판석이 깔리고 벽이 탄탄하게 다듬어져 제대로 된 시설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쏟아진 흙무더기가 수직 통로 아래에 쌓였을 뿐 사람 모습은 여전히 없었다. 전방에 두 갈래로 긴 통로가 뚫린 것이 보였다.
“유야! 장유! 거기 있어? 속필 님!”
호란은 컴컴한 통로를 향해 다시 소리쳤다. 이번에도 답은 없었다.
대신 약하게 쿵 소리가 들렸다. 호란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둠 너머에 무언가 기척 같은 것이 있었다.
기세나 살기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호란은 알 수 있었다. 통로 안에 적이 있었다.
“호란 호위님!”
수직 통로 위에서 단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란은 위를 향해 소리쳤다.
“여기 통로가 있어! 그런데 유랑 사람들은 안 보여!”
은실이 단을 데리고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단은 바닥에 닿자마자 유등을 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근처에는 안 보여. 통로 어딘가로 갔을지도 모르지만 불러도 대답이 없었어.”
단이 유등을 낮추어 발밑에 깔린 흙더미를 살폈다. 호란과 은실이 여기저기를 짓밟아 놓았는데도, 단은 흙무더기 한끝에서 뒤축이 둥근 태사혜 자국을 금방 구분해 냈다.
“이건 속필 나리가 밟은 거군요. 여기로 내려오신 게 맞아요. 통로 쪽에도 흙이 어지럽게 떨어진 걸 보면 통로 안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쪽의 붕괴를 피해서 들어간 거면 멀리 갈 이유가 없잖아. 시문 나으리가 구해주실 때까지 시간도 많이 안 지났고. 최소한 목소리가 들릴 거리에 있었어야 하는데….”
은실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율비와 반하 때문인지 그도 마음이 조급해 보였다.
“도망친 걸지도 몰라.”
호란이 문득 깨달음을 얻고 말했다.
“도망치다니, 설마….”
“응. 이 어딘가에 감람이 있어. 세 사람이 이 통로 아래서 감람과 마주쳤다면, 그래서 반하가 유랑 속필 님을 데리고 전속력으로 도망쳤다면 대답 못 할 곳까지 갔을 거야.”
은실은 입술을 깨물고 잠깐 통로 쪽을 보았지만 곧 돌아섰다.
“일단 올라가서 윗전들께 말씀 올리자. 돌 인간이 있으면 우리끼리 못 찾아.”
“응.”
은실이 먼저 단을 데리고 땅을 차 벽을 타올랐다. 호란도 뒤를 따라 지하에서 뛰어나왔다.
바깥에는 시현과 채원은 물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하유관군과 지은학당 사람들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유와 율비, 반하 외에 더 없어진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시현이 물었다.
“아래에 사람들이 없었느냐? 유는?”
“감람이 있는 것 같아요.”
시현의 얼굴에 긴장이 비쳤다. 호란이 말했다.
“감람의 은신처가 있던 방향이랑 그 오른쪽으로 길게 통로가 나 있어요. 조명이 없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통로 너머에서 기척 비슷한 게 느껴졌어요. 제 생각엔 적 같았어요.”
단이 덧붙였다.
“호란 나리 생각엔, 유와 다른 분들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감람과 마주쳐 통로 안쪽으로 도망간 것 같다고 합니다.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시현은 수직 통로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나는 지금 감람의 기운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호란이 그렇게 느꼈다면 맞을 것이다. 감람이 세 사람을 쫓고 있다면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이다. 어서 찾으러 가야겠구나.”
시현이 사람들 쪽으로 돌아서서 명령했다.
“수색대를 꾸려라. 다만 수색대를 여럿으로 나누면 감람이 공격해올 때 내가 보호할 수 없다. 정예로 한 무리만 꾸리고 나머지는 몸을 피하라.”
성지가 깜짝 놀라 만류했다.
“설마 문께서 직접 거동하십니까? 위험합니다! 적과 싸운들 놈을 밖으로 끌어내셔야지, 놈의 소굴로 직접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사람부터 찾아야 하지 않느냐.”
“차라리, 방금 하셨듯 법술로 지하를 열면….”
“이미 무리하게 대지를 움직여 주위가 불안정하다. 그이들이 간 방향도 모른다. 마력석을 낭비했다가 감람과 마주치면 낭패할 수 있다.”
시현이 호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색대가 꾸려지는 사이 나를 먼저 아래로 데려다 다오. 상황을 보아야겠다.”
“네!”
호란은 얼른 시현을 데리고 수직 통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땅에 내려선 시현은 짧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두 곳 통로 쪽을 향해 섰다.
“감람!”
시현이 통로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모습을 감췄어도 네가 이 땅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안다! 내 목소리를 듣고 있겠지! 내가 갈 때까지 세 사람에게 손대지 마라! 네게 진짜 위협이 될 사람은 그들이 아니란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어두운 통로에서는 시현의 목소리만 메아리쳐 돌아왔다. 그래도 시현은 계속 외쳤다.
“나는 네가 먼 훗날에라도 원천을 복구하길 바란다. 네가 나를 적대하더라도 한 번 너를 놓아 보낼 생각이 있다! 하지만 네가 내 눈앞에서 인명을 해친다면 그것은 놓아둘 수 없다!”
시현이 말을 더 이으려는데 호란이 시현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귀를 기울이자 제가 만든 메아리 끝에 작은 퉁 소리가 울리는 것이 들렸다.
퉁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그리고 시현의 한 장 앞 바닥에서 판석 모퉁이가 불쑥 솟았다.
바닥에서 흙이 판석을 밀치고 나와 나지막한 덩어리를 만들었다. 흙덩이가 움직거리며 소리를 흘려냈다. 웅얼대는 듯한 음성이었다.
“네가, 나를, 놓아 보내준다고. 왜 날 당연히 이길 것처럼 생각하지? 인간 주제에.”
“하지만 너는 내 주문을 보았다. 내가 무엇을 어디까지 다룰 수 있는지 보았다.”
흙덩이는 한참을 침묵했다. 시현이 다시 말했다.
“인간을 믿지 않겠다면 나도 믿지 말아라. 내가 이곳을 무사히 나가게 되면 무엇을 할지 더 염려하거라. 그리고 그들을 살려두어라. 나와 다시 담판하든가, 인질이라도 삼을 수 있을지 모르지 않느냐.”
판석이 움찔움찔 떨렸다. 마치 그 밑에 있는 존재가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감히.”
흙덩이는 그 말만을 남기고 내려앉았다. 판석이 쿵 원래 자리에 맞춰지고 살기 어린 기척이 사라졌다.
시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감람이 확답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짧게라도 으름장이 통한 것 같았다.
한편 수직 통로 위쪽에서는 채원과 사람들이 수색대 문제로 웅성이고 있었다. 성지가 머뭇대며 말했다.
“인이시여. 어쩌면 좋겠습니까. 사람을 얼마나….”
성지의 얼굴은 두려움과 주저에 차 있었다. 그는 외상 치료에 능숙했지만 전장을 다닌 경험은 없었다.
채원이 말했다.
“그대는 하늘인들을 인솔해서 여기서 최대한 가까우면서 발밑이 탄탄한 곳으로 몸을 피하시오. 수레도 끌어오고 남은 마력석을 모아서, 필요할 때 언제든 지원에 나설 수 있게 준비하시오.”
“예!”
성지는 안심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채원이 하늘인 무리를 향해 명했다.
“내가 문을 따라가겠다. 은실이가 참석 자루를 가지고 따라오거라. 나머지는 성지를 보호하고 하유관군을 이끌어 인근에서 대기하거라.”
지은학당의 호위 두엇이 당황해서 말했다.
“도련, 아니 채인 어른, 수색대에 몫꾼이 너무 적습니다!”
“예. 저희도 가겠습니다!”
“명에 따르거라. 너희 쪽이 습격받을 수도 있지 않으냐. 공격 법술사가 모두 수색에 나서니 몫꾼이라도 있어야 한다.”
채원은 단호하게 말한 뒤 단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만 너는 방향을 잘 찾는다지. 지하에서 길을 잃을 수 있으니 너도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
단은 표정을 구길 뻔했다.
하늘인 호위도 다 빼놓으면서 굳이 단을 데려가려 하는 것은 의도가 뻔했다. 그는 자신과 시현이 감람을 찾으러 간 사이 단이 지상의 하늘인들에게 쓸데없는 말이라도 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도 단은 애초부터 유를 찾으러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싸움이 일어나거나 이동에 속도를 내야 할 때는 도움이 안 되어도 지하 통로가 미로 형태라면 자기가 할 일이 있었다.
단은 나오는 욕을 참으며 대답했다.
“예. 그러겠습니다.”
곧 은실이 단과 채원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왔다.
온 사람이 셋뿐인 것을 보고 시현은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그가 채원에게 물었다.
“이것뿐이냐? 하늘인 호위가 더 필요하지 않겠느냐?”
“어중간한 몫꾼은 돌 인간 상대로 짐만 됩니다. 반하와 무사히 합류하면 그것이 최선입니다.”
채원이 몸을 낮추어 시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만의 하나의 경우, 입을 막을 사람은 적을수록 좋습니다.”
시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시현 역시 채원이 무엇을 우선하는지 바로 깨달았다. 하지만 이 이상 채원과 실랑이하면서 출발을 끌 수 없었다.
시현은 고개를 젓고 말했다.
“일단은 알겠다. 움직이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