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23
323화
* * *
크게 구멍 뚫린 회색빛 벽이 와르르 허물어졌다 일어서며 돌 인형의 모습을 만들었다.
호란은 처음에 감람이 제 분신을 만들어 내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솟아오른 돌 더미의 한가운데에 기결이 열렸다. 정교하게 빚어진 이목구비가 여러 색깔을 갖고 금속성의 광물이 머리칼을 이뤘다.
하반신은 돌기둥의 형태로 지면에 연결되어 있었으나, 상체는 원래의 감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기결을 중심으로 크게 갈라진 상처 역시 원래 몸의 상태 그대로였다. 그의 몸 안에서는 여전히 막대한 힘이 넘실대고 빛과 기운을 불안정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감람은 잔뜩 화가 나 보였다. 그가 시현에게 소리쳤다.
“진짜 장난해? 짓누르면 죽을 침입자 놈들을 살려뒀더니, 너희가 다 뒤집고 부숴 대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그것들을 보호까지 해 줘야 돼?”
“내가 쏜 것은 너다. 주문이 지나간 경로에 사람의 기척은 없었고, 겨냥은 정확했을 터.”
“설비 회로가 부서지잖아! 지하에 공기만 끊겨도 죽는 것들이! 그리고, 침입자 세 명을 살려두면 찾으러 오겠다고 한 건 너 아니야?”
시현은 눈을 깜박이더니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보니 그렇게 말하기는 했구나. 그래도 사람 찾는 데에도 방법이 여럿 있지 않으냐. 그때 너도 조건을 좀 더 확실히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난 조건 따위 건 적 없어!”
“암묵적으로는 서로 조건이 있었지. 너는 내가 찾는 세 사람을 살려두고, 나는 네게 나를 죽일 기회를 주기로 한 것이 아니냐.”
“누, 누가 너한테 기회를 받아?”
감람은 바로 부인했다. 하지만 당혹과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은 긍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시현이 말했다.
“인정해라. 너는 노골적으로 인질극을 하기엔 자존심이 너무 강하지만, 강적의 처리를 동료에게 떠넘기기엔 책임감이 너무 강하다. 애초에 몸 상태가 불완전한데도 후일을 기약하지 않고 곧바로 싸움을 건 것도 내가 모들과 금강에게 가는 것을 막으려고 한 일이 아니냐? 지금 이곳이 아니면 나를 죽이기가 더 어려워질 거라 판단했을 것이다.”
감람은 입을 꾹 다문 채 시현을 노려보기만 했다. 시현이 말을 이었다.
“굳이 내 앞에 나타난 것도 네게 기회와 방법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이겠지. 아마 너는 지금 대지와 연결된 채 자폭하여 나를 휘말리게 하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을 것이다.”
“네?”
“정말입니까? 저것이 어찌!”
호란과 채원이 경악했다. 하지만 시현의 태도는 평온했다. 감람도 표정에서 분노가 떨어져 나가 오히려 침착해졌다.
시현이 말했다.
“단언할 수 있다. 네가 성공할 확률은 낮다. 홍은산의 감람도 운모도 각자 시도했다가 실패한 일이다.”
감람이 살짝 비웃었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하네. 네 목숨이 걸린 일인데 확률을 말하는 거야?”
“근거 없이 하는 말이 아니다. 지금 네 몸을 채운 기운, 너와 이 대지를 연결하는 힘은 대부분 첫 번째의 것이다. 첫 번째가 제 뜻으로 내게 건네어 내가 한 번 온전히 지배했던 힘이다. 나는 그 힘을 속속들이 느낀다. 네가 무엇을 하려 해도 바로 알 수 있고 바로 억누를 수 있다.”
감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현이 목소리를 더 부드럽게 했다.
“그리고 너는 원천을 복구해야 하지 않느냐. 네가 죽으면 첫 번째가 제 자아를 버려 가며 남긴 기록도 사라질 것이다. 그 또한 무책임한 일이 아니냐.”
“당장의 종말을 막는 것이 먼저야.”
“네가 목숨을 버려도 나를 못 죽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감람의 얼굴이 꿈틀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성을 내지는 않았다.
시현이 말했다.
“차라리 지금은 도망치거라. 세 사람을 내보내 주면 나도 너를 놓아 보내겠다. 네가 땅에 고인 기운에서 떨어져 내 인지에서 벗어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주겠다.”
채원이 다시 놀란 소리를 냈다.
“문이시여. 안 됩니다! 저것을 살려 보내면 틀림없이 문을 노려올 것입니다!”
“알고 있다.”
“세상에 한 분뿐인 문이십니다! 아무리 인명을 구하기 위해선들, 그렇게까지….”
“그렇게 중요해?”
감람이 채원의 말을 끊고 시현에게 물었다.
“지하에 있는 인간들, 많지도 않은 그 몇 명이 왜 그렇게 중요해? 땅인들은 둘 다 마법사가 아니고, 하늘인 쪽도 평범해 보이던데.”
채원의 낯빛이 험상궂게 변했다. 그와 은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서로를 향했다.
채원과 눈이 마주친 은실은 당혹한 기색이 되었다. 그가 채원을 본 것은 율비의 진짜 신분을 의식해서였지만, 채원의 심상찮은 태도를 보고 무엇이 더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시현이 감람에게 말했다.
“특별한 자라서 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같은 사람 목숨이라 구하려는 것이다.”
“아니. 너희는 사람 목숨을 구별하잖아. 특히 너같이 힘을 가진 인간일수록… 아.”
감람의 눈이 빛나며 살기를 띠었다.
“그렇군. 그 두 사람이 마력회로를 조작했던 인간이군.”
“아니다.”
시현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답했다. 감람이 시현만큼이나, 어쩌면 시현 이상으로 살려 보내기 싫어할 상대가 유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감람은 제 직관에 확신을 가진 것 같았다. 그의 눈에 돌던 살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니, 그것들이 맞아. 마법사가 아닌 땅인을 전장에 데려온 것부터가 이상했어.”
“아니라고 했다! 아무도….”
“율이는 아니야!”
감람의 살의를 깨달은 은실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가 황급하게 팔을 저으며 감람에게 소리쳤다.
“율이까지 죽이면 안 돼, 걘 진짜 아무것도 몰라! 애초에 걘 땅님도 아니야, 옷만 그렇게 입었지 반민이야!”
호란이 입을 가렸다. 단과 시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은실이 한 말은 나머지 한 사람이 기술자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과 같았다.
감람이 얼굴에 미소를 보였다.
“좋아. 이러면 어때? 시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기술자가 아닌 둘은 살려 보내고, 나는 여기서 물러나지.”
시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당연히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거절하면 감람은 시현에게 공격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바로 유를 죽이려 할 것이다.
더는 여지가 없었다. 결국 감람과 싸우는 방법뿐이었다.
감람은 시현이 고민한다고 생각했는지 은실에게 물었다.
“그래서, 네가 말한 율이가 둘 중 누구란 거야?”
“어….”
자기 말이 유를 죽이란 뜻이 된 걸 뒤늦게 깨닫고 은실은 얼굴이 허예졌다. 감람이 채근했다.
“여자 둘 중에 누구냐니까? 난 반민이고 뭐고 너희들이 하는 구분은 몰라. 나한테는 아무 차이….”
그 순간 감람의 기결에서 전광이 터졌다. 태평하던 목소리가 날카로운 비명으로 바뀌었다.
“아악!”
감람을 친 벼락은 흔히 하듯 허공에서 내리꽂히는 공격이 아니었다. 감람 자신에게서 솟아난 듯 갑작스레 나타난 전광이 한 줄기, 두 줄기 그의 몸을 감싸며 기결에 꽂혀 들어갔다.
모두가 반응할 순간을 놓쳤다. 시현마저도 직전에야 느꼈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채인!”
채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입을 열어 주문을 외친 것도 큰 손동작을 보인 것도 아니었다.
손에 들린 마력석 주머니가 실그러지고 있지 않았다면 벼락을 만든 것이 채원이란 사실조차 눈치채기 어려웠을 것이다.
표적에게 기운의 움직임을 읽히지 않기 위해 구성된 최단 시간의 묵언 주문, 암살과 기습만을 전제하여 정련하고 또 정련한 류해선 학맥의 정수였다.
“감히! 너희가 감히!”
감람이 분노에 찬 소리를 질렀다. 채원이 만든 전격이 감람을 집요하게 옭아매고 기결 내부를 불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감람의 힘은 쇠하기는커녕 점점 더 커졌다. 상체의 금이 쩌적 소리를 내며 깊고 굵게 갈라지고 기결이 사람의 눈을 태워버릴 듯한 빛을 뿜었다.
감람이 부들부들 떠는 두 손을 제 기결에 올렸다.
“대가를 치르….”
“정이여, 침강하라!”
감람이 무엇을 다 말하기 전에 시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부풀어 올랐던 힘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광채가 사라졌을 때, 시현은 감람의 몇 발짝 앞에 있었다.
감람의 기결에서는 여전히 끝없는 기운이 쏟아져나오고 있었지만 그 힘은 더 이상 사납게 폭주하지 않았다. 기운은 빛으로 된 폭포수처럼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돌로 된 몸체를 타고 흘러내린 빛무리가 바닥에 퍼졌다가 서서히 대지로 스며들었다.
감람을 향해 손을 뻗은 채 시현이 말했다.
“감람. 그만두어라.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네가 지닌 힘 대부분을 통제할 수 있다.”
감람이 부르르 떨었다. 모욕당한 듯한 반응이었다. 시현은 면목이 없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부탁이다. 여기서 물러서 다오. 말했듯이 이 기운은 첫 번째의 힘이다. 원하던 일을 모두 마치고 대지로, 원천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던 힘이다. 무의미한 파괴로 무산시키지 마라. 가려던 곳으로 갈 수 있게 놓아다오.”
감람의 입술이 비틀렸다.
“무의미할 리가. 너희를 시작으로 인간을 이 별에서 일소할 수 있는데.”
“제발, 감람.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오만하고 뻔뻔한 것들.”
감람이 말했다. 다갈색 눈동자가 빛을 잃고 회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것은 항상 너희다. 가진 시간이라곤 몇십 년밖에 안 되면서, 왜 항상 저지른 일을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시현이 눈을 꽉 감았다. 그가 마력석 대련을 붙잡으며 크게 소리쳤다.
“채인! 보호를!”
“예!”
채원이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소리쳤다. 그가 다른 일행에게 오라고 손짓하며 시현의 뒤로 달려왔다. 은실이 마력석을 주머니째 채원에게 건넸다.
“단절하는 결이여!”
“강벽으로 둘러치라!”
채원과 시현이 차례대로 소리쳤다.
두 겹 주문의 벽이 선 순간 금빛이 주변을 짓눌렀다.
빛이 사라졌을 때 감람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그가 섰던 자리를 중심으로, 보호벽이 범위를 제외하고 수 장 너비 분화구 같은 구덩이가 생겨 있을 뿐이었다. 지표까지 열어놓은 골짜기 벽이 좌우에서 후둑후둑 무너져내렸다.
“가, 감람은….”
호란이 질문을 하려는데 은실이 소리쳤다.
“입구가! 지하층 입구가 묻혔어요!”
“괜찮다. 입구만 조금 무너졌을 뿐 주위 지반은 건재하다.”
시현이 빠르게 주문을 외워 입구를 덮은 돌과 흙을 물렸다. 곁에서 집중해서 기감을 펼치고 있던 채원이 화색을 보였다.
“반하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가깝습니다!”
“제, 제가! 제가 가볼게요!”
안달복달하고 있던 은실이 단에게서 유등을 빼앗아 쌩하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거석이 돌아다닐지 모르니 위험하다고 경고할 틈도 없었다.
호란도 뒤를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몇 발짝 들어가기도 전에 은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어요! 모두 무사해요!”
통로 저쪽에서 여럿의 목소리가 웅웅 울려나오는 것이 들렸다. 유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어째 쓸데없이 기운찼다.
단은 혀를 차면서도 안도한 기색을 했다. 시현도 작게 한숨을 쉬었다.
호란은 여럿의 모습이 통로 끝에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도로 통로를 돌아나왔다. 시현은 어두운 얼굴로 바닥을 보고 서 있었다.
호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문 님, 감람은… 죽은 거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