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31
331화
* * *
“알고 있다.”
시현은 침착하게 말하며 다시 지면을 향해 한 손을 펼쳤다.
상황은 처음의 암습과는 달랐다. 땅이 진동할 정도로 거센 기운이 지하로 밀려들고 있었다. 안 쉬면 죽겠다던 몫꾼들이 벌떡벌떡 일어서 진형을 짜고, 수레 안에 있던 성지가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듬성듬성한 침엽수림 저편에서 굉음이 터지고 흙이 치솟아 일어섰다. 채원이 미리 경고한 대로 장군석 세 개가 각각 다른 위치에 몸을 세우고 있었다.
아직 남아있는 작은 거석들도 시현의 주문이 끊긴 틈을 타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발밑을 포함한 모든 방향에서 적이 오고 있었다.
“장군석은 제가 저지하겠습니다. 문께서는….”
채원이 말하며 마력석 궤짝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시현이 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아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
“침정하라.”
당장 발밑을 뒤집을 듯 힘을 더해가던 지하의 기운이 한순간에 짓눌렸다. 아까보다 힘은 훨씬 큰데도 제압은 오히려 수월했다. 주문이 이어졌다.
“오래 맺힌 영혼에 갇힌 별의 본태여. 내가 강요한다. 이끌리라. 이끌리라. 이끌리라.”
시현은 앞으로 뻗었던 손을 꽉 주먹 쥐며 위로 번쩍 쳐들었다. 무엇을 잡아뽑기라도 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동시에 일행 앞의 공터가 뻥 뚫리고 강렬한 빛이 용천수처럼 치솟았다. 땅속에 넘치던 기운이 시현의 손짓을 따라 공중으로 끌려 올라오고 있었다.
기운의 덩어리를 향해 시현이 외쳤다.
“복종하라. 본령으로 화하라!”
수 장 높이 상공까지 솟아오른 빛덩이가 무수한 빛줄기로 갈라져 산지사방으로 뻗었다.
빛줄기의 절반은 세 개의 장군석을, 나머지는 사방에서 다가오는 작은 거석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기결의 파점을 정확하게 꿰뚫린 돌 거인들이 폭음을 울리고 불꽃을 쏟아내며 허물어졌다.
시현이 주문을 다루는 데 쓴 시간보다 파괴된 거석들이 무너지고 토연을 피우는 데 걸린 시간이 더 길었다.
흙먼지 사이로 장군석의 기결에서 튄 불꽃이 잎이 안 돋은 침엽수 몇 그루에 옮겨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시현이 난처해했다.
“아, 이런. 마지막에 제어를 잃었군. 이런 일은 잘 없는데.”
시현은 품에서 마력석을 하나 꺼내 불을 끄고 토연을 가라앉혔다. 그게 시현이 이번 싸움에서 처음으로 손댄 마력석이었다.
채원이 혀를 내둘렀다.
“계속 설마 하고 생각했는데… 문께서 거석의 기결에서 새어 나오는 힘을 자재로 활용하시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돌 인간이 직접 다스리는 기운까지 끌어와 사용하시는 겁니까?”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법력이 물리로 구현되기 전에 지배권을 빼앗아 온 것뿐이다. 막상 해보면 거석의 기운을 쓰는 것과 그렇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상대는 돌 인간인데요. 거석에 비하면 의지도 지배력도 훨씬 강한 존재가 아닙니까. 호락호락 힘을 빼앗겨 주지 않을 텐데요.”
“그래도 다른 법술사의 주문을 가로채는 것보다는 쉬운 부분도 있다. 운모와 감람의 본체에 얽힌 기운을 다뤄보면서 요령도 약간 생겼고.”
“요령입니까.”
채원은 졌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이제 보니 마력석을 그렇게 많이 실어올 필요가 없었군요. 지금이라도 저랑 성지 쓸 것만 남기고 좀 버릴까요? 가뜩이나 애들도 힘들어 죽어가는데.”
채원의 곁을 지키고 있던 반하가 경멸하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채 도련님. 제가 도련님을 왜 싫어하시는지 아세요? 진짜로 짐을 줄여주실 것도 아니면서 그런 농담을 하셔서입니다. 심지어 그게 진심으로 재밌다고 생각하시죠.”
“반하야. 나 상처받는다.”
“받으세요 좀. 이거보다 더 받으셔야 돼요.”
반하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고 움직이는 직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수통을 채우러 짐수레로 갔다. 항상 자세가 꼿꼿한 그도 지금은 발걸음이 터덜거렸다.
시현이 말했다.
“몫꾼들을 쉬게 해야겠구나. 이제 저이들도 한계다.”
“적이 다시 올 텐데요. 여기는 위치가 안 좋습니다. 언덕과 숲에 싸인 저지대이고, 지맥도 한 번 엉킨 뒤라 부자연스러운 흐름을 찾기도 어렵고.”
“어디를 가든 적이 다시 오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차라리 싸움이 끝난 직후가 낫다.”
시현은 채원의 반대를 듣지 않고 큰 소리로 주위에 명했다.
“모두 수통을 채우고 쉬어라! 막사 칠 시간도 아까우니 잘 사람은 내 수레에 들어가서 자거라. 침구도 자유롭게 써라. 번은 내가 서겠다!”
말이 떨어지자 몫꾼들은 대답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우르르 수레에 들어갔다. 아무도 예의를 따지고 사양하는 시늉을 할 기운이 없었다.
진씨 성지도 별말 없이 짐수레에서 풍로를 꺼내다 자양제 달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채원만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로 마력석 궤짝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시현이 그에게 말했다.
“그대도 쉬어야지. 어젯밤부터 내내 기감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은가.”
“저야 애들 뛰는 동안 수레 안에 편하게 퍼져 있었는걸요. 적 대부분을 문께서 맡아주셔서 주문도 많이 쓰지 않았고.”
“초반 싸움에선 그대도 상당히 무리했다. 더구나 기감을 넓게 펼쳐두는 것은 익숙한 주문 쓰는 것보다 부담이 더 심하지 않은가.”
“요 반년 기파 탐색이 특기가 돼서 괜찮습니다.
“아니, 지금 속이 메슥거릴 텐데. 아니라면 왜 내내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는가.”
“…….”
채원은 시선을 피했지만 쉬러 갈 생각은 여전히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는 다시 시현을 설득하려 들었다.
“문이시여. 돌 인간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거석만 계속 보내오는 건 문께서 지치시길 노려서입니다. 길에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적과 싸우는 횟수만 많아집니다. 하루라도, 아니 단 한 시진이라도 백벽에 빨리 다다르는 게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이미 예정보다 훨씬 빨리 움직이고 있지 않으냐. 장내산만 넘으면 백벽이 보일 것이다.”
“그래도 사흘은 더 걸립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그대라고 사흘 내내 안 잘 것은 아니겠지. 그러면 지금 쉬어라. 짐수레에 침낭을 넣고 방풍막을 내리면 잠들 만할 것이다. 자, 어서.”
시현이 채원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채원은 반대로 뒷걸음질 쳐 수레 벽에 등을 댔다.
그가 머리를 뒤로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잠들고 싶지가 않아요….”
“채인.”
“제가 잠든 사이에 호란이와 단이 도착해서, 깨어 보면 문께서 그 둘과 함께 떠나셨을까 봐…. 그런 생각을 하면 눈이 감기다가도 도로 뜨입니다.”
시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내가 대체 왜 그러겠는가.”
“그렇죠. 그러시지는 않겠죠. 제가 주위를 살펴 드려야 문께서 반 시진 한 시진이라도 눈을 붙이실 테니까. 지금은 제가 필요하실 테죠….”
채원은 반쯤 혼미해 보였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는 있나 의심이 갔다. 시현이 그를 다시 당겼다.
“그대의 힘이 필요한 것도 물론이고, 그렇지 않다 해도 함께 싸운 이를 두고 가지 않는다. 쓸데없는 일로 심로하지 말고 가서 자거라.”
“하지만 문께서는 저를 믿지 않으십니다. 결정적일 때 등을 맡기지 못하실 겁니다.”
“도대체 그대는….”
시현이 화난 듯 눈썹을 치켰다. 그의 음성이 약간 올라갔다.
“그래. 내가 그대를 못 믿어서 장유를 피신시켰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훗날을 생각하면 호란과 단의 안전마저 걱정이 된다. 갈수록 불화가 커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돌 인간과 싸우는 일에서라면, 나는 그대를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대는 생각이 다른 이와 함께 일을 도모한 적이 없는가? 내가 모든 면에서 그대와 뜻이 같아야만 하는가? 더 중요한 일에서 얼마든지 힘을 합칠 수 있는데, 한 가지 뜻이 다르다고 나를 못 믿는 것은 그대가 아닌가!”
“…….”
채원은 감은 눈을 두 손으로 가리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가 느리게 말했다.
“그럴지도요…. 믿음을 잃은 건 저일지도요. 이제는 제가 무엇을 더 두려워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종말인지, 아니면 문께서 돌 인간의 망언을 퍼뜨려 기껏 구해낸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인지.”
“설령 그대 말대로 혼란이 온다 한들, 당연히 종말이 더 크고 두려운 일이 아닌가. 다른 이는 몰라도 그대라면 멸망을 막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리라 생각했는데.”
“그랬을 겁니다. 제게 이 말을 하는 분이 문이 아니셨다면.”
채원이 눈에서 손을 내렸다. 낯빛은 피곤으로 파리했지만 그렇게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그가 씁쓸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어차피 그런 망언, 퍼져 봤자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다른 누가 말해도 손가락질이나 받고 미친 사람 소리나 들을 겁니다. 제가 많이 당해봐서 알죠. 하지만 문께서, 그것도 종말을 막아내고 세상을 구한 뒤에 문께서 직접 선언하시는 거라면, 어쩌면….”
채원은 느리게 말을 멈췄다. 불평불만일지언정 말을 하는 동안엔 그나마 살아나던 눈빛이 도로 지친 기색에 잠겼다.
그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문이시여, 적이 옵니다.”
시현의 기감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쿵쿵 지반을 타고 진동이 전해지고 있었다.
시현은 좀 심하다고 생각했다. 몫꾼들을 자라고 들여보내고서 아직 반 각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게 문제였다. 시간이 없었다.
잘 시간도 밥 먹을 시간도 쉴 시간도 없고 시현과 채원이 대화할 시간도 없었다.
유를 도주시킨 후, 시현은 단과 호란이 돌아올 때까지 채원과 대화할 시간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뜻을 합치지는 못하더라도 날 섰던 마음이 누그러질 만큼은, 서로 공유하는 지점을 확인할 만큼은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채원이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거석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간을 보는 것처럼 두어 무리씩 몰려오며 긴장 풀 틈을 안 주더니, 달이 지기 무섭게 아득한 숫자의 적이 몰려왔다. 관성을 점령하고도 남을 숫자였다.
샘터를 포기하고 마을로 가니 거기로도 공격이 밀려왔다. 마을을 떠나 이동을 계속하자 뒤에서 쫓아오고 앞길을 막아섰다.
이제까지 돌 인간들은 한 번 대공세를 펼친 후에는 힘을 비축하는 것처럼 상당한 시간을 두고 나타났다. 다친 뒤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저들 입으로 말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모들과 금강은 귀수관에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시현이 소수 정예로 백벽 공략을 하겠다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세와 공세 사이에 간격이 거의 없었다. 돌 인간이 쓰는 힘에 한계가 사라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금강이건 누구건 거석을 일으켜 보내는 주체가 있을 터인데, 채원과 시현이 아무리 기감을 곤두세워도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모새와 싸울 때보다 더 막막했다.
시현은 발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언덕 너머로부터 거의 성벽만큼 높고 커다란 갑병 세 놈이 다리 여럿을 움직이며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놈들은 기감에도 걸리지 않고, 마력석 없이 부술 수도 없었다.
채원에게 다 맡기고 눈 붙이고 있으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시현은 마력석 궤짝으로 손을 뻗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