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33
3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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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현은 결국 산 밑에서 감람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몫꾼들은 오랜만에 막사 치고 땅에 등 대고 쉴 수 있어서 기뻐했지만 채원은 몸이 달아했다.
“설령 위험이 있다 한들, 그래도 한 발짝이라도 더 전진하는 것이 낫습니다.”
“안전이 더 중요하다. 감람이 산에 매복한다면 변수가 너무 많아진다.”
“그러면 제가 수하 일부를 데리고 먼저 산길을 헤쳐보겠습니다. 놈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전한 것이니 뒤따라오시고, 우려하시는 대로 놈이 매복해있다면 저희가 공격받는 틈을 타 반대편 산안장으로 빠져나가시면 됩니다.”
시현이 한숨을 쉬었다.
“채인, 나를 강제로 재우고 그 작전을 강행하기 전에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아라.”
“문이시여, 저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채원이 한 손을 등 뒤로 숨기며 정색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마력석 노리개에 걸쳐진 다른 쪽 손은 딱히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이 영 무성의했다.
시현이 말했다.
“그대가 이제껏 행한 대로 그대를 보고 있네만…. 어쨌거나 듣거라. 혹시 그대는, 감람이 마지막 순간에 남은 적의로 움직인다는 말을 듣고 감람의 표적이 그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가? 마지막에 감람을 공격한 것이 그대이니, 나와 떨어져 움직이면 그대에게 적의가 쏠릴 거라고?”
채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팔꿈치가 살짝 움직인 것을 보면 지금 재울지 한마디 더 듣고 재울지를 고민하는 게 틀림없었다. 시현이 빠르게 덧붙였다.
“끝까지 들으라 했다. 우리가 둘로 갈라진다면 감람은 틀림없이 나를 공격할 것이다. 돌 인간들의 표적은 변고 첫날부터 줄곧 나였고 감람에겐 나를 죽여야 이유도 따로 더 있다. 그대의 뢰법술을 절하하는 것은 아니다만 벼락 세 발이 잘 꽂혔다고 그 순위가 바뀔 것 같지 않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않습니까.”
채원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가망은 적고 위험은 크다. 이미 부족한 전력을 분산시켜 무엇이 좋은가. 안전이 중요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어차피 진짜 전력은 문 한 분뿐입니다. 문께서 챙기셔야 할 안전도 문 한 분의 안전뿐입니다.”
“그대를 포함한 모두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나를 백벽에 데려다 놓기만 하면 된다는 뜻처럼 들리는구나.”
“그런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시현은 이 문제로는 채원과 논쟁해 봐야 소용 없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한 시진만 기다리자. 한 시진 후까지도 감람의 움직임이 없으면 반드시 출발하겠다. 그러니 그대가 먼저 반 시진 쉬고 와서 나와 경계를 교대하라.”
“딱 한 시진입니다. 약속하신 겁니다.”
채원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고서 그제야 마력석 노리개에서 손을 뗐다. 수레로 향하는 그의 등을 보면서 시현은 역시 의법술도 좀 공부해놨어야 했다고 속으로 후회했다.
결과만 말하면 시현은 채원과의 약속을 안 지켰다. 하지만 그 뒤의 결과까지 말하면 그 약속을 안 지킨 것이 잘한 일이었다. 아마 채원에게 물었다 해도 불만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로 출발이 늦어졌고, 무엇보다도 출발이 늦어진 덕에 감람과의 첫 격돌을 산속이 아니라 산 아래에서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감람이 움직인 것은 원래 출발 예정 시간으로부터도 서너 각쯤 더 뒤, 일행이 산에 언제 오르느냐 누구부터 어떤 작전으로 움직이느냐를 놓고 한참 입씨름을 하는 도중이었다.
시현이나 채원이 무엇을 느끼기 전에 눈으로 볼 수 있는 변화가 먼저 일어났다.
초목이 적어 절반은 민둥산인 장내산에서, 많지 않은 동물과 새들이 뛰쳐나와 사방으로 도망쳤다.
거의 동시에 산정을 주홍색으로 빛나는 둥근 동심원이 두르고, 거기서부터 여러 색 빛의 선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산면을 타내려 오는 복잡한 선은 하나하나 마력회로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시현이 말했다.
“적의 정체가 감람일 거라고 정색하고 주장한 것이 민망해졌군. 이래서야 상대가 이름을 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최소한 이제 와서 놀라거나 당황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섣불리 산에 오르면 안 된다는 문의 말씀도 옳았고요.”
채원이 말했다. 그의 눈은 회로의 선이 뻗는 것과 함께 빠르게 면적을 넓혀가는 붉은 색을 띤 영역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 영역 안에서는 법술을 쓸 수 없는 것이겠지요? 발밑 불안한 산길에서 저 영역 안에 갇히면 정말로 위험했겠습니다.”
“저 영역은 법술의 시전을 가로막기도 하지만 영역 안에 모인 힘을 내 기감으로부터 감추는 역할도 한다. 아마 감람은 내가 제 기운을 자꾸 빼앗아다 쓰는 게 약이 올랐던 모양이다.”
시현이 아껴둔 참석 중에서도 큰 것을 무더기로 집어 들며 말했다.
“그러니 감람은 산 내부에 힘이 모이면 이제껏 못 했던 것을 마음껏 하려 들 것이다. 한 사람도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
이미 마력회로가 만드는 영역은 산 전체를 다 덮어가고 있었다.
시현의 기감 안에서 생기로 가득한 거대한 산 하나가 존재감을 감추고, 구멍 뚫린 듯 부자연스러운 빈자리가 그만큼의 면적을 차지했다.
하지만 시현은 그 빈 공간 안에 무엇이 어떤 형태로 있을지 짐작하고 있었다. 기감이 아니라 경험으로 알았다.
시현이 마력석을 태우며 주문을 읊었다.
“말한다. 이것이 나의 완고. 내 의지가 점한 곳에 타를 불허한다.”
일행 주위에 은은한 은빛을 머금은 반투명 보호막이 생겨났다. 일행만이 아니라 수레 세 대, 급습을 대비해 내놓은 마력석 궤짝과 다른 기물을 모두 포함하고도 남는 상당히 넓은 범위가 모두 빛의 보호막으로 감싸였다.
채원과 성지는 물론 법술사가 아닌 사람들도 주위의 기색이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기의 흐름이 멈춘 듯 느껴지고 대신 숲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작은 소음이 더 커졌다.
사람들은 시현의 보호막에 들어가고 나면 안심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시현의 손이 계속 새 마력석을 태우고 있었다. 장군석만 한 갑병을 깰 때도 안 쓰던 됫박만 한 참석이 이미 다섯 개나 녹아내려 발치를 구르고 있었다.
도대체 뭘 막으시려는 거지.
누군가 못 참고 입을 열려고 한 순간, 산이 움직였다.
성지는 일어나는 사건이 너무 상식을 넘으면 사람이 놀라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자락 끝에서 끝을 시야에 다 담기도 어렵고, 높이는 수천 장은 될 바위산이 눈앞으로 쓱 다가왔다.
산사태 같은 것도 아니었다. 무슨 천지개벽하는 소리가 나지도 않았다. 원래 산이 솟은 형태를 다 유지하고 표면에 그려진 마력회로까지 그대로 유지한 채 장내산이 빠른 속도로 돌진해왔다. 눈에 보인 모양만 생각하면 이쪽이 달려가서 박았다는 게 훨씬 현실감이 있었다.
시현이 만든 방어벽과 산이 충돌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굉음이 울렸다. 모두의 귀청을 터뜨릴 것 같은 충돌음 사이로 맑고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완고하라.”
방어막 내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고속으로 돌진해온 바윗덩이들이 투명한 벽에 부딪혀 박살 나며 주위를 스쳐 가고, 무엇보다 힘과 파동 그 자체가 방어막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는데도 아무 충격이 전해지지 않았다.
반투명하게 빛나는 보호막 너머로 토사가 움직임을 멈춘 것을 보고서야 산이 이동하길 멈춘 것을 알 수 있었다.
성지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입을 떡 벌렸다.
“뭡니까, 보호막 바깥에 넘치는 이 힘은…? 이렇게 막대한…. 우리가 혹시 지금, 장내산 내부에 들어와 있는 겁니까? 변고 이후에도 땅속에 이런 힘이 남아 있다니….”
“문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 감람의 자아를 통해 원천에서 흘러나온 힘이라고.”
채원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허공에서 손가락을 잠깐 움직여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사방이 이렇게 기운으로 가득한데도, 한 자락이라도 내가 다룰 수 있으리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군. 이건 이미 감람의 의지가 점유한 힘이다. 아니 그것의 의지 그 자체일지도.”
“의지여, 침범하라. 틀을 넓혀라.”
시현이 조용히 말하며 두 손을 약간 벌렸다. 보호막이 우득우득 소리를 내며 반경을 넓혀나갔다.
“물론, 누구 거든 아니든 상관 안 하고 편하게 가져다 쓰시는 분도 계시지만.”
채원이 겸연쩍은 듯이 말했다. 하지만 성지의 얼굴은 흐렸다.
“감람은 문께 이 기운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장내산 표면을 마력회로로 덮었던 게 아닙니까? 그런데 우릴 기운 가득한 산 내부로 끌어들였다는 건….”
“네. 걱정하시는 게 올 겁니다. 땅속, 산속, 굴속…. 이런 데선 절대 좋은 일이 없죠. 장담하고 남죠.”
단이 뒤쪽에서 말했다.
그가 바로 일행의 입산을 늦추고, 약속 시간에서 서너 각이 지나고도 전략회의가 끝나지 않고 입씨름이 길어지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시현과 채원이 약속했던 한 시진에 딱 맞춰서 도착한 바람에 채원에게 길잡이 주제에 왜 이리 늦냐고 질타를 들었지만, 그가 늦은 데도 참작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말했다.
“아까 다 말씀드렸죠? 마법사 세 분 긴장 타세요. 혀 깨물지 않게 미리 입 딱 닫고 계시고. 특히 나리님 정신줄 꽉 잡으시고.”
“준비됐다.”
시현이 약간 긴장한 기색으로 말하며 단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제 방어막을 확장시키거나 주위 기운을 다스리려는 일을 멈춘 채 유지에만 약간 신경을 쓰고 있었다.
단은 맷돌을 조금 크게 만든 것 같은 희고 둥근 물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석질의 표면에는 다들 여러 번 보아 익숙해진 마력회로의 금속선이 뻗어 있었다.
단은 말과 생각을 동시에 하느라 인상을 잔뜩 쓴 채 회로 기판을 조작했다.
“작동까지 시간도 걸리고, 꼭 유가 말한 대로 된다는 보장도 없어요. 걔도 말 몇 마디만 듣고 즉석에서 뜯어고친 거니까. 공격 온 후에 속으로 다섯 세시고 효과 없는 것 같으면 그냥 약 드시고 다 터뜨리세요.”
“알겠다….”
시현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좀 자신이 없게 느껴졌다. 옆에서 자기가 더 긴장하고 있던 호란이 시현 옆에 딱 붙으며 말했다.
“효과 있을 거예요! 유가 잘 만들었을 거예요, 틀림없어요!”
단은 호란 나리는 딱히 근거 없이 말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까지는 없었다. 기분 탓인지, 방어막 바깥에서 무언가 술렁이는 기척이 단에게까지 느껴진 것 같았다.
직후 보호막을 누르고 있는 바깥 공간 전체가 금색으로 둘러싸였다. 마법사 세 사람이 동시에 귀를 감쌌다.
“악!”
채원이 고통을 못 참고 무릎을 꿇었다. 시현은 눈을 꽉 감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정신이 얼마나 또렷한지 겉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었다.
모새도 써먹고, 운모도 써먹고, 그때마다 시현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기파의 과잉 진동이었다. 또 써먹는 놈이 나올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세 번째로 당한다고 익숙해질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호란은 시현의 팔을 잡은 채 단 쪽만 바라보았다. 시간이 안 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회로 기판을 내려다보고 있던 단이 한 군데를 꾹 건드렸다.
그 별것 아닌 동작 하나가 상황을 끝냈다. 보호막을 꿰뚫을 듯 점점 강해지던 금색 광채가 한순간에 훅 사라졌다. 미세한 땅의 진동도 술렁이는 기색도 끊어졌다.
“완고하라!”
시현이 귀에서 손을 떼며 소리쳤다. 흐려져 가던 방어막에 뚜렷한 은빛이 돌아오고 주위의 진동이 멈췄다.
“시문 님! 괜찮으세요? 이제 이명 없어요?”
호란이 황급히 물었다. 시현이 찌푸렸던 얼굴을 폈다. 어깨에서도 긴장이 사라졌다. 거의 땅에 머리를 박으려고 하고 있던 채원과 성지도 고개를 들었다.
“그래. 괜찮다.”
시현이 단의 앞에 있는 둥근 물체를 바라보았다. 마력회로 한가운데의 동심원이 계속 색깔을 바꾸며 은은한 빛을 뿜고 있었다.
“정말로 되는구나. 기운의 파동을 서로 상쇄한다는 걸 이렇게도 쓸 수가 있구나.”
탄복을 넘어 감동하고 있는 시현에게 단이 말했다.
“나리님, 감탄하실 시간 없어요. 말씀하시는 중에도 마력석 계속 녹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