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5
035화
* * *
전투가 끝난 다음 날, 치풍관에는 새벽부터 비가 왔다.
아직 치풍담을 막아둔 땅이 완전히 굳지 않아서 다들 허둥지둥 지반과 토대를 보하러 나섰다.
그래도 모두 싱글벙글이었다. 한 달 반만의 비라 반가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단은 비가 그친 다음에 길을 떠나자고 말했다.
시현이 아직 피로해 보이는지라 호란도 찬성이었다.
별관 대청에 앉아 지짐떡을 먹으며 비를 보고 있는데 수리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호란, 있잖아….”
“아니, 치풍관에 안 남아. 회유 안 당해. 나는 시문 님 모시고 큰몫 할 거야.”
“누가 뭐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수리가 짧게 성질을 내고는 호란의 옆에 앉았다.
“너는 그 모들이란 놈을 쫓아갈 거지. 내 몫을 맡길게. 원수를 갚아줘.”
호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리는 이번 전투에서 우군에 있던 모친을 잃었다.
스러져간 친구와 동료는 헤아려보지도 못했다.
몫꾼이 감당할 일이라곤 하지만 고통스러운 것은 변하지 않았다.
“시문 님이 그러시는데, 괴인은 그 두 놈이 다가 아닐 거래. 모들과 암장이 치풍관에 와 있는 동안에도 땅속 기운은 계속 북쪽으로 흘러갔대. 원흉은 북쪽에 더 있을 거라고 하시더라.”
호란이 말하자 수리도 동의했다.
“사비 큰머리도 비슷한 말 했어. 한두 놈이 작당해서 일으킬 수 있는 사태가 아니라고.”
전투가 끝난 후 사비는 큰머리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하지만 반대가 많았다. 급한 치료를 받고 목소리만 쌩쌩해진 동우가 제일 큰 소리로 반대했다.
설령 물러난다 한들 후임이 누가 되느냐도 말이 분분했다.
어영부영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사비는 아직 전후 처리를 맡고 있었다.
수리가 긴 다리를 뻗어 발등에 빗발을 받으며 말했다.
“몇 놈이건 간에… 괴인을 다 해치우고 나면, 땅인의 마법도 돌아오고 거석도 없어질까?”
“…아마?”
호란은 조금 자신 없게 말했다.
시현은 어젯밤 하늘인 지도부 몇, 땅인 대표 몇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란은 피해 복구를 돕느라 그 자리에 끼지 않아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지 못했다.
수리는 마법이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데 그리 크게 신경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뭐가 됐든 거석은 없어졌으면 좋겠어. 거석 걱정 안 하고 산아래 평야를 돌아다니고 싶어. 동생한테 넓은 땅에서 똑바로 뛰는 걸 가르치고 싶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달리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려주고 싶어.”
호란은 수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이해했다.
호란은 아빠 얼굴은 까먹었지만, 어릴 적 아빠한테 달리기 배우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거석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시문 님이 말씀하신 역사책에 나오는 옛날, 거석은 없고, 비는 지금보다 많이 오는 세상이 되면 좋을 것 같았다.
단이 건너편 일각문에 와서 소리쳤다.
“호란 나리! 이제 곧 비 그친답니다! 가시죠!”
“응!”
호란은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어느새 비가 많이 줄어 있었다.
호란은 수리에게 말했다.
“마법이 되돌아와도, 너네는 괜찮을 거야. 시문 님이 다른 동네 땅님들하고 사이에 이야기를 잘 해주실 거야.”
수리가 코로 웃었다.
“뭐? 우린 땅인 안 무서워. 성도 다시 쌓고 화포도 더 센 거로 잔뜩 만들 거야.”
“그래도 안 싸우는 게 더 좋잖아.”
“응….”
수리가 주먹을 들어 인사했다.
“잘 가, 호란.”
“응! 너네도 잘 있어!”
호란도 주먹을 들어 인사하고 일각문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다 뭐가 생각난 호란은 다시 문간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근데 진짜로 걱정 안 해도 돼! 시문 님은 자비로운 분이야. 진짜 말 잘해주실 거야! 내가 전에 뭐 잘못한 거 있을 때도 시문 님 덕분에 벌금만 내기로 하고 끝났거든? 뭐 삼십 금인가 얼마.”
수리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가 대청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벌금이 삼십 금이라고? 그게 자비롭다고?”
“쫓겨날 걸 돈 내는 걸로 면해줬으니깐?”
“야, 나 지금 완씨 시문 살려 보내면 안 될 거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호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수리가 뭔가 오해를 한 거 같았지만 이미 단과 시현이 문 반대편에서 중문을 나서는 게 보였다.
“호란, 가자!”
시현이 불렀다. 호란은 얼른 달려갔다. 해 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 새 쉼터까지 찾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수리가 뒤에서 소리쳤다.
“잘 가! 꼭 또 봐! 적으로는 말고!”
“물론이야!”
호란은 주먹을 붕붕 흔들어 보이며 달려갔다.
간만에 밟는 젖은 땅이 기분 좋았다.
10. 상단
치풍관을 떠나고 이틀째, 호란은 고민이 그칠 새가 없었다.
북쪽으로 가는 길 자체는 순조로웠다. 비가 온 후라 물도 넉넉했고 거석도 한 번밖에 안 만났다.
원래도 치풍산 이북은 남방에 비해 거석이 훨씬 적다 들었는데 그것은 세상이 뒤집힌 지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호란이 고민하는 것은 단에 대한 일이었다.
치풍관을 나온 후부터 단과 시현 사이에 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이거라고 말할 순 없는데 어딘가에 가시 같이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치풍관에서 시현이 단에게 몰래 일을 꾸몄다며 화를 내기는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일이 잘 풀렸으니까 그걸로 된 것 아닌가?
단이 땅인들을 모아온 덕에 거석과 싸울 마력석을 잔뜩 얻었다.
단은 위험을 무릅쓰고 모들에게 총포를 쏴 호란과 시현을 구해주었다.
단이 안 와주었으면 호란은 십중팔구 죽었을 것이다.
설령 누가 뭐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해도, 이 정도 큰 싸움에 이겼으면 다 풀리는 게 보통이었다.
왜 분위기가 이상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더 이상한 게, 화가 나 있는 쪽은 시현이 아니었다.
시현은 평소대로… 어쩌면 평소보다 더 부드럽게 단을 대하고 있었다.
평소라고 말하면 단 역시 호란과 시현을 평소대로 대하고 있기는 했다.
늘 보는 웃는 얼굴로 척척 잔일을 해치우고 길을 잡았다.
하지만 호란이 느끼기에 단은 시현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근거는 전혀 없지만 감이 그랬다. 정말 영문 모를 일이었다.
단 한 번 이상한 표가 났던 건 치풍관을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호란은 그때도 영문을 몰랐다.
치풍관의 하늘인들, 땅인들과 회동을 마친 후, 방에 돌아온 시현이 단에게 뭔가가 잔뜩 적힌 천을 내밀었다. 얼핏 화포 그림이 보였다.
“사비가 이것을 네게 돌려주라 했다.”
단이 천을 흘깃 보더니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내키지 않는 듯 천을 받아들며 말했다.
“뭐하러 굳이. 그치들이 가져도 되는 건데요.”
“여러 장 베껴두었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사비가 전하라는 말도 있다.”
“저한테 말씀입니까?”
시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치풍관이 안정되고 나면 다른 삶터에도 화포 도면 사본과 기술을 전하겠다고 했다. 각지에서 화포를 많이 만들어 거석과 싸우게 하겠다 하더구나.”
단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 하하…. 새끼들. 그 소릴 진짜로 믿었네. 순진한 놈들….”
시현이 물었다.
“화포 기술을 세상에 널리 퍼뜨려 거석과 싸우는 게 네 꿈이라 했다면서?”
“아이고, 그냥 기름칠 삼아 한 소립니다. 꿈은 무슨.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그런 생각을 해요. 믿는 놈이 등신이죠.”
단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놈들이 그런 말에 홀랑홀랑 속아 넘어가 주니까 이쪽이야 편합니다만.”
시현은 잠시 단을 바라보다 말했다.
“속은 것이 아니다. 네 진정을 알아본 것이다.”
“예에….”
단이 좀 싫다는 얼굴을 했다. 시현이 이야기를 이었다.
“치풍관 장인들은 능하고 노련한 이들이다. 너는 그 노련한 이들을 가르치고 지휘하여 며칠 만에 놀라운 성과를 내지 않았느냐.
네 빼어난 지식과 기술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곧은 목표를 갖고 진심으로 정진하여 얻은 출중함이다. 사비는 이를 알아보고 너를 믿은 것이다.”
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가 천을 구겨쥐었다.
“진심이고 진정이고 그런 거 없다니까 그러시네요. 나리님, 칭찬하셔도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그는 농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눈이 웃지 않았다.
단은 몇 마디 인사말을 주워섬기더니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죽이지 않은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져갔다.
호란이 얼떨떨해져서 물었다.
“시문 님, 단이 지금 화낸 것 맞아요?”
시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것 같구나.”
호란은 너무 놀랐다.
남운관에서 갖은 모욕을 다 당해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던 단이었다.
그런 그가 화를 냈는데 그게 시문 님으로부터 굉장한 칭찬을 받은 다음이었다.
호란은 그 이유가 상상조차 안 갔다.
“단이… 왜 그럴까요?”
시현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호란, 내가 많이 피곤하구나. 쉬고 싶다.”
이를 말이실까요. 그날 시현은 세상에서 가장 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호란은 찍소리도 못 하고 내실을 나왔다.
호란도 싸우느라 기력이 다했기에 그날은 일단 잤다.
자고 일어나서 단한테 잘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밖에 나갔더니 비가 오는 중인데도 뜨락이 왁자지껄했다.
처마 밑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고, 단이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거기 섞여 있었다.
단이 떠난다는 걸 알고 치풍관 장인들이 전송하러 온 거였다.
호란을 보자 단은 활기차게 인사했다.
“아, 호란 나리! 안녕히 주무셨어요!”
웃는 얼굴이 햇살처럼 반짝였다.
호란은 어젯밤 화낸 사람이 누구였는지 좀 가물가물해졌다.
단이 사람들과 워낙 화기애애하게 어울려 있어서 호란은 말을 못 붙였다.
그 이후에도 단은 원래대로 웃고 모두를 살갑게 대했다.
그래서 괜찮은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뭔가 느낌이 계속 걸리는 것이다. 내내. 이틀 내내.
식사 후 지도를 펼쳐놓은 단이 말을 꺼냈다.
“북으로 길을 재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꼭 구해야 할 게 있습니다.”
시현이 물었다.
“무엇이냐.”
“마력석입지요.”
단이 말했다. 호란도 시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괴인이 마법에 약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놈들 너무 셉니다. 다시 만났을 때 손에 마력석이 없으면 우린 다 죽어요.”
시현이 팔짱을 꼈다.
“맞는 말이다만… 귀물인 데다, 시국이 이리 긴박하니 구하기 쉽지 않을 터인데.”
“글쎄요. 생각보다 여기저기 있을지도 모르지요. 여행길도 슬슬 남방을 벗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중부만 가도 마력석은 꽤 흔한 물건입니다.”
단이 안경테 끝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사실 치풍관에서도, 땅님네들 저택이나 관아를 바닥까지 닥닥 긁어내면 뭐가 더 나오지 않았을까요? 딴 게 아니라 그걸 뜯어왔어야 하는 건데.”
시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떠나는 길에 식량이다 화약이다 얻을 만큼 얻어내어 놓고서는. 욕심이 한이 없구나.”
단이 농담조로 받아쳤다.
“아니, 나리님, 그걸로 끝입니까? 마력석은 치풍관의 것이니 치풍관이 써야 한다고 한마디 더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미 치풍관을 떠나오지 않았느냐. 되돌아갈 것도 아니고.”
“며칠 안 왔는데 지금이라도 가지러 돌아갈까요?”
“농하지 말거라.”
시현이 웃었다.
호란은 죽을 맛이었다.
별다를 것 없는 대화인데 뭔가 있었다.
시현이 단의 기분을 신경 써주고 있는 거 같기도 했다.
호란은 속으로 몸부림쳤다.
아아아! 역시 단 화나 있어! 시문 님은 그걸 알아! 나만 아무것도 몰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