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8
0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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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확인한 건 아니지만 앞에 앉은 소년이 진짜 시문이 아닐지 모른다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날 때부터 윗전 중의 윗전으로 살아온 저 태연자약한 태도는 열 몇 살 젊은 애가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시문도 법술을 잃은 건 똑같을 터다.
허나 완씨 시문이라 하면 온강의 세도가 함씨 원의의 직계손이다.
변고 후에도 윤지관은 물론 온강 대부분이 성했다 들었으니 함씨 집안의 막대한 부도 대개 건사했을 것이다.
세도가 상대로 과욕은 금물이지만 세상이 다 뒤집어진 판이다.
적당한 수준에서라면 뭔가 이득 볼 게 있을 것이다.
그가 슬쩍 운을 띄워 보았다.
“마력석을 찾으신다 하셨지요. 저희가 물건은 있으나 대개가 팔려나갈 곳이 결정되었습니다. 더구나 사태가 이러하니 부르는 게 값이 된 상황이라….”
“짐작한 바다. 값을 불러 보거라.”
이건 쉽지 않겠다. 곤호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말을 돌렸다.
“아이고, 제가 어찌 문을 모시고 흥정부터 하겠습니까. 일단 말씀을 좀 들어보고요…. 마력석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떤 물건이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시현이 조금 생각하고 말했다.
“내가 마력석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몇 개를 써보니 기운의 질과 힘을 머금은 모양새가 하나하나 다르더구나. 어떤 것은 불을 일으키기가 좋고 어떤 것은 물을 다루기에 알맞았다. 너희 물건은 어떠하냐?”
곤호가 맞장구를 쳤다.
“아! 맞습니다. 마력석은 산지에 따라 품은 기운이 다릅니다. 가공을 하면 또 달라지지요. 지금 가장 많은 상품은 벽명관 위쪽 삼서산에서 캔 것들인데 제가 보기엔 벼락 내리기에 좋은 거 같습니다. 가공한 물건과 패물 만들기를 마친 물건도 여럿이고 가공 안 한 원석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시현이 의아한 듯 물었다.
“가공을 하면 기운이 달라진다고? 내가 가공한 것과 각인 넣은 것을 써보았으나 기운의 질에는 영향이 없는 것 같던데. 마력석 가공은 기운의 질이 아니라 돌에 기운이 담긴 모양새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더냐?”
곤호가 쩔쩔매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쿠. 이거 아는 체해보려다 들켰군요. 실은 제가 마력석에 영 젬병입니다. 원래 저는 다른 품목을 주로 다뤘는데, 갑자기 백희상단을 인수하면서 물건을 한꺼번에 맡게 되어서…. 상인 놈이 상품도 제대로 모르니 면목이 없습니다. 이실직고를 하자면 이놈은 변고 나기 전에는 마력석을 만져본 적도 없었답니다.”
시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나도 같다. 공부란 것이 늘 해도 모자라는구나.”
“에이, 저야 상인이지만 어르신께서야 마력석 잘 모르시는 게 어디 흉입니까? 본디 마력석이란 기운 제대로 못 다루는 서툰 술사들이나 쉬쉬하며 쓰던 물건 아닙니까? 이 난리만 안 났으면 어르신과는 평생 연 없었을 물건이지요….”
곤호가 너스레를 떠는데 사람 하나가 밖에서 그를 찾았다.
곤호가 짐짓 호통을 쳤다.
“윗전을 모시는 중이다! 감히 어딜 방해하느냐?”
“주인어른, 이건 꼭 들으셔야 합니다….”
안달하는 목소리를 듣고 시현이 허락했다.
“듣고 오거라.”
곤호는 연신 굽신거리며 자리를 떴다.
시현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입장이 입장이라 욕심 많은 자를 상대한 일은 자주 있었다.
바라는 게 뚜렷한 이는 차라리 낫다.
곤호처럼 욕심은 가득인데 뭘 얻을지 몰라 하며 시간을 끌고 간이나 보려 하는 이가 더 상대하기 피곤했다.
막사 밖에서 곤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했다.
소리를 죽인다고 죽여 내용은 들리지 않으나 무언가 흥분되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옆을 보니 호란이 제 앞의 다과를 다 해치우고 막사 안의 번쩍이는 사치품들에 한눈을 팔고 있었다. 영 지루해 보였다.
호란을 생각해서라도 이야기를 빨리 마무리 지어야겠다 싶었다.
전언을 다 들었는지 막사의 휘장이 활짝 열리며 곤호가 들어왔다.
뒤에는 단단하게 생긴 함을 든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곤호가 싱글벙글거리며 말했다.
“어르신! 가장 좋은 마력석을 골라왔습니다. 한번 보시지요.”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였다.
탁자 위에 함이 올라왔다.
곤호가 열쇠를 들고 함에 걸린 자물쇠를 열었다. 그 눈이 빛으로 번들대고 있었다.
시현은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밖에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몰라도 저것은 제가 욕심내는 바를 확실히 정한 자의 얼굴이었다.
곤호가 제 손을 맞잡고 시현의 낯을 살피며 말했다.
“문께서 누추한 곳을 찾아주시고 이 천한 놈을 친히 위로해 주셨으니, 오늘 제가 천금만보로도 못 갚을 은혜를 입었습니다. 감히 이문을 생각하고 푼돈을 받겠습니까.
이 함에 든 마력석은 상단 상품 중에서도 특히 귀한 물건들입니다. 받아주신다면 바치고 싶습니다. 다만 어르신께 작은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지 모르겠습니다.”
시현은 눈을 가늘게 했다. 그가 딱딱하게 말했다.
“말해보아라. 무슨 청이냐.”
“하하,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마력석을 살펴보셔야지요. 고객에게 만족을 먼저 드리고 청을 내어놓는 것이 장사꾼의 도리입지요.”
곤호가 자랑스러운 듯이 함을 열어젖혔다.
안에는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세공된 패물과 합이 예닐곱 개 들어 있었다.
성인 남자 주먹보다 더 굵은 것도 있었다.
곤호는 물건을 차례로 가리키며 순도가 어떻고 크기가 어떻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시현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그가 슬쩍 눈치를 보았다.
“물건들이 너무 사치스러워서 어르신의 안목에 오히려 누가 되는 거 아닌지요. 뭐든 과하면 품위가 떨어지지 않습니까. 저도 이해가 안 갑니다. 마력석 쓰는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이렇게 금붙이 은붙이로 감싸놓는지…. 쯧쯧. 봤더니 가공 안 한 원석조차 하나하나 귀한 벽력목 갑에 담아놨더군요. 너무하다 싶어 상등품을 빼고는 무지 은갑으로 옮겨 넣었습니다.”
“…….”
시현은 결국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급하게 인수를 했다지만, 이자는 마력석에 대해 아는 것이 정말로 하나도 없었다.
이런 자가 물건에 제대로 된 값을 매기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구나 공짜로 내어놓겠다니 사리에 맞는 청을 할 리가 없었다.
그때 밖에서 시중꾼이 말했다.
“주인어른, 손님의 길잡이란 이가 찾아왔습니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이로구나. 들라 해라.”
시중꾼이 휘장 한쪽을 걷어주자 단이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늦었습니다, 나리님….”
단이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곤호에게 날아가 박혔다.
“이 씨발!”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었다. 단은 외마디 비명 같은 욕설을 던지고 막사를 뛰쳐나갔다.
곧 밖에서 소란과 함께 단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놔! 씨발! 이거 놔!”
호란은 곧바로 달려나갔다.
단은 막사에서 그리 멀리 도망치지도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거한 둘이서 무릎으로 단을 깔아 누르고 밧줄로 묶으려고 하고 있었다.
“무슨 짓이야?”
호란이 외치고 거한들을 밀쳐냈다. 상대가 반민들이라 주먹을 쓰지는 않았다.
단을 일으키는데 하늘인 셋이 나타나 거리를 두고 주위를 둘러쌌다.
곤호의 호위를 섰던 남녀 둘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남자 하나가 더 있었다. 셋 다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제일 덩치 큰 호위 곁에 곤호가 느릿느릿 와서 섰다.
그가 단을 내려다보고 말했다.
“단아, 단아.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한 번만 더 도망을 치면 목줄을 채워서 개 우리에 가두겠다고.”
“나는… 나는.”
단의 목소리가 덜덜 떨려서 호란은 속으로 놀랐다.
단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나는 도망치지 않았어. 네 손으로 내 문서를 남운관 관인한테 건네줬잖아.”
“그때 내가 속으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게 다 네가 부린 수작이었지 않느냐. 미리 관인하고 약조를 맺고 밀고를 해서 내가 빠져나갈 길이 없게 만들었지.”
곤호가 품에 손을 넣었다.
“뭐, 지나간 일은 됐다. 혹시 이걸 알아보겠니?”
곤호의 품에서 두툼한 문서 하나가 나왔다.
단의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새파래졌다.
곤호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노비 문서다. 이게 내 손에 돌아왔으니 너도 마땅히 내 손에 돌아와야지.”
단이 악을 쓰며 외쳤다.
“그걸 왜 니가 갖고 있어!”
“남운관 길사 유예 어른이 이 문서를 내게 파셨다. 얼마를 치렀는지 알면 네가 아주 깜짝 놀랄 거야.”
황씨 유예는 남운관에 변이 났을 때 제일 먼저 빠져나간 땅인이었다.
평소에도 이문 남길 것은 좁쌀 한 톨 안 빠뜨리는 인간이었지만 그 난리통에 단의 노비 문서까지 챙겨갔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단은 이를 갈았다.
“유예, 그 새끼가!”
“어허, 단아. 어디 아랫것이 비속한 말로 위를 능멸하느냐. 그런 죄는 이 주인이 애써도 덮어줄 수가 없다!”
곤호가 짐짓 걱정하는 듯이 야단쳤다. 단은 분에 차서 죽으려고 했다.
호란은 말없이 곤호의 하늘인 수하 셋과 거리부터 재었다.
상황을 전부는 모르겠지만 저 양곤호란 자가 단과 예전 악연이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더구나 단의 노비 문서를 갖고 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단 곤호의 손에서 문서부터 빼앗아놓는 게 순서였다.
어떻게 될 것 같다가도 곤호와의 거리가 딱 한 발짝이 멀었다. 수하를 먼저 치기도 애매했다.
호란이 고민하는 참이었다.
“그만하지 못할까.”
또렷한 목소리가 광장을 갈랐다.
시현이 막사 앞에 서 있었다. 그가 엄하게 말했다.
“노비니, 문서니, 이게 다 무슨 헛말들이냐. 단은 노비가 아니다. 남운관의 백성이다.”
곤호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문이시여, 어지러운 꼴을 보여드려 송구합니다. 여기 이 단이는 제가 무척 아끼는 아이로, 제 노비가 맞습니다. 사정이 있어 길사 유예 어른께 문서를 건넸다 돌려받은 것입니다.”
“남운관은 사람을 노비 삼기를 법으로 금하고 있다. 유예가 감히 그럴 수 없다.”
시현은 단호했으나 곤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말 송구하오나… 단이는 남운관에서 못 다 갚은 빚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랬으니 이 문서가 돌고 돌아 제게 온 게지요. 알고 보면 빚이 있다는 것과 노예라는 것은 그리 다른 말이 아니랍니다.”
“지랄!”
단이 욕을 했으나 곤호는 아랑곳 않았다. 그가 시현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시문께서 단이를 곁에 두고 쓰고 계셨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단이는 여행길 시중보다 다른 재주 쓸 곳이 더 많은 놈입니다.
시문이시여, 이게 제 작은 청입니다. 단이를 제게 돌려주시지요. 그리해주시면 마력석은 물론 새 길잡이와 시중들 노비들을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제가 법적으로 단이의 주인이기도 하고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