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4
004화
* * *
적막이 깨지며 한꺼번에 탄성과 외침이 쏟아졌다.
군중이 하나같이 바닥에 머리를 대며 시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문이시다!”
“시문이시다!!”
“문이시여!”
모두 꿇어 엎드린 가운데 호란만이 넋을 놓고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놀랍게도, 소년은 호란의 무례함을 불쾌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소년의 녹회색 눈에는 빛과 어둠이 함께 어려 있었다.
살짝 곱슬진 홍색 머리칼이 어깨에 닿아 부드럽게 굽어졌다.
희고 단정한 얼굴과 짙게 쌍꺼풀진 큰 눈은 미인이라 할 만했지만, 감정을 씻어낸 듯 고요한 무표정이 보는 이를 압도하여 밉다 곱다 같은 말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옥색 도포 위에 어깨를 넉넉하게 덮는 답호를 걸쳤고 얇은 광다회를 둘렀다.
옷감에 은은한 구름문양이 비칠 뿐 자수나 장신구 하나 없어 경인의 화려한 복색과 대조를 이뤘다.
그가 완시현 문이었다.
사람들은 구세주라도 영접한 듯 시문을 연호하고 있었다.
장군석을 쓰러뜨리던 위용을 생각하면 그가 이 도시의 구세주라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조용히 하여라.”
경인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끊일 줄 모르던 외침과 아우성이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군중은 경인 자신이 나섰을 때보다 훨씬 격하게 호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인은 전혀 언짢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가 아들에게 따뜻한 목소리를 건넸다.
“어떻게 된 것이냐. 번거로워지는 것이 싫어서 갈도(喝道) 중에 이름을 안 내겠다더니.”
시현이 말했다.
“무람하지만 말씀 올리고픈 것이 있어서 얼굴을 보였습니다. 제가 이 하늘족 아이와 몇 마디 말을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이 아이와?”
경인은 놀란 듯했다. 호란도 귀를 의심했다.
이 높으신 나으리께서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호란이 처한 상황은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오히려 한 줄기 희망이 찾아드는 느낌이었다.
경인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곧 수락했다.
“그렇게 하거라. 어미가 왜 네 청을 거절하겠느냐?”
시현이 호란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고 답해도 좋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호란이라 합니다, 나으리!”
아까부터 계속 고개를 든 채였기에 민망해진 호란은 연거푸 바닥에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호란, 내가 네 기색을 기억하고 있다. 어제 성 밖에서 거석과 싸웠느냐?”
“그렇습니다! 네! 그랬습니다!”
호란의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문께서 자기를 기억한다고? 어제 그 짧은 차에? 그 먼 거리에서?
“어디에서 싸웠고 어느 대열에 있었느냐?”
“남쪽… 남쪽 성문 밖에서 몫을 했습니다. 왼몸 혼자였습니다.”
옆에 선 추선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째선지 몫을 한다고 자처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장군석이 쓰러진 뒤에 무엇을 하였느냐?”
“작은 거석과 싸웠습니다. 작은 놈 둘을 쓰러뜨렸습니다.”
추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 이 녀석, 감히 어느 안전에서 허풍을 늘어놓느냐! 네가….”
시현이 손을 저었다.
“아니다, 추선아. 내가 이 아이를 기억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 아이의 말과 내 기억이 정확하게 겹친다. 네가 맞구나.”
그러더니 시현은 줄곧 무표정하던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띄워 올렸다. 호란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네가 거석의 기결을 정확하게 파훼하는 것을 보았다. 맨주먹으로 때린 것이 맞더냐?”
“그, 기결이란 게…. 어, 맞습니다! 아, 한 번은 발로도 찼습니다!”
호란은 허둥지둥 답했다.
기결이란 말은 처음 들어보지만 거석의 빛나는 나선무늬 얘기인 듯싶었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특히 추선은 완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족의 용맹함을 익히 알지만 혼자 힘으로 기결을 깨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비법이 있느냐?”
“그, 별것 아닙니다….”
호란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마음이 흔들렸다. 용서를 받으려면 전부 털어놓아야 하나? 동생을 살리기 위해 사부와의 약속을 어겨야 하나?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시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경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 어떻습니까. 성을 지키는 데 공이 작지 않은 아이입니다. 저를 보아서 시에서 쫓겨나는 것만은 면하게 해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경인은 못마땅한 듯했다.
“재주가 있다 해도 고작 하늘족 하나 아니냐. 무리를 지어도 대장석 하나 변변히 상대 못….”
“어머니, 부탁드립니다.”
시현이 경인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숙였다.
자세는 공손했지만, 목소리가 단호한 것이 경인이 끝까지 말을 잇게 두고 싶지 않은 듯했다.
경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 우리 문께서 말씀하시는데 들어야지 않겠느냐. 처분은 네게 맡기마.”
경인은 그리 말하더니 먼저 윤거 안으로 훌쩍 들어가 버렸다.
호란은 이제 신을 보듯이 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몸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믿어지지 않지만, 이 자비로운 나으리께서 지금 그와 동생의 목숨을 살린 것이었다.
시현이 호란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아까 무엇이라 말했느냐? 네가 성 밖에서 몫을 했다고 하였느냐?”
“아, 그, 그것은….”
호란이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아무리 습관대로 한 말이라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문 앞에서 몫을 했다 소리를 하다니.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하지만 시현은 호란을 책하려고 그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몫을 한다. 하늘족들은 종종 그 말을 하더구나. 그리고 어제 네 활약은 그 말에 실로 어울렸다.”
“!”
호란은 입에서 말도 나오지 않아 그저 땅에 머리만 박았다.
시문께서 자기를 칭찬하고 있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너희 하늘족은 자기 몫을 하고 가족을 보살피는 것을 가장 가는 긍지로 여긴다지. 다소 시야가 좁기는 하나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는 갸륵한 마음결이다. 백성 모두가 다 그 두 가지에 힘쓴다면 이 남운관이 한층 더 굳건하지 않겠느냐?”
시현은 동의를 구하는 듯 군중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감히 대답하지는 못했지만 하나같이 벅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히 군중에 섞여 있는 하늘인들은 배로 뿌듯한 얼굴이었다.
시현이 호란을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네가 한 몸에 지닌 힘을 믿고 관병의 말을 무시하며 위의 행차를 가로막은 것은 용서치 못할 일이다. 하지만 동생을 생각해서 그리하였고, 가족을 중히 여긴 것은 네가 하늘족답게 행동한 것이니 민적에서 파이는 것은 면하게 하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호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터졌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환호했다.
어쨌든 도시의 가장 높은 사람이 자비를 내보이길 좋아한다는 건 백성들에게 좋은 일이었다.
시현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다만 벌은 받아야 할 것이다. 법도를 범하고서 아무 벌도 없어서야 형평에 맞지 않겠지. 추선아.”
“예, 작은 어른.”
추선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네가 남아서 적절한 처분을 내려라. 우리는 먼저 가겠다. 길이 지체되었구나.”
“예.”
그 말을 끝으로 시현은 윤거 안으로 들어갔다.
휘장이 드리워지고 문이 달칵 닫혔다.
추선이 다가와 거칠게 호란을 길가로 잡아챘다.
호란은 이번에는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나갔다. 사실을 말하면 아직 얼이 빠져 있었다.
앞길이 트이자 행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갈도하는 사람들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떠엉떠엉 징 소리가 길게 꼬리를 물었다.
멍하니 행차를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추선이 거칠게 호란을 걷어찼다.
“멍청한 것. 천한 것이 감히 경인 마님의 심기를 거스르다니! 문께서 영을 내지 않으셨다면 내가 네 녀석의 시체를 성 밖으로 내던졌을 것이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호란은 속으로 욱했다.
차인 것은 둘째치고, 엄연한 하늘인 몫꾼인데 천한 것이라니? 땅님 앞에서야 아랫것이지만 같은 하늘인끼리!
하지만 추선은 당장 호란의 처분을 결정할 사람이었다.
호란은 화난 표정을 숨기고 최대한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잘못했어. 그렇게 높은 분은 처음 뵈어서….”
호란이 숙이고 나오는데도 왜인지 추선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딱딱하게 물었다.
“이름이 호란이면, 성은 있느냐?”
“어어? 남운관에선 하늘인도 성을 써?”
호란이 놀라 되물었다.
하늘인은 가족끼리 이름에 같은 돌림자를 쓸 뿐 성이 없다.
그나마도 몫꾼이 되어 독립하면 보호자의 돌림자를 버리고 이름 끝 자를 고쳐 쓴다.
그러고 나면 각자 알아서 살고 서로 돌보지 않는다. 돌볼 필요가 없다.
땅인이나 반민처럼 대대로 성씨를 공유하며 가족 수를 끝도 없이 늘리는 것은 하늘인에겐 생소한 문화였다.
자신이 물어봤으면서 추선은 더 성을 냈다.
“없으면 됐어! 네 몫은 누가 가졌느냐?”
“나야.”
“너 같은 어린애가 제 몫이 있다고? 열네댓밖에 안 돼 보이는데?”
“열여섯 살인데….”
호란은 억울한 듯이 중얼거렸다.
호란이 하늘인치고 키가 작은 편이긴 했다.
하지만 어리고 크고 전에 호란이 제 몫을 한다는 것을 다름 아닌 시문께서 보증하지 않았는가.
호란이 느끼기에 추선은 아까부터 꼬투리를 잡는 것 같았다.
추선이 다시 물었다.
“대열은 어디냐? 직은 뭐고?”
순간 호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분명 라왕한테 들었는데 당황해서 그런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왼대열이란 것과 위치는 기억하고 있었다.
“왼대열… 먼외측 왼대열이야!”
“어느 왼대열? 먼외측에 왼대열이 한둘이냐?”
“그건….”
호란이 더듬거리자 추선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패부터 꺼내라. 도장도.”
호란이 주섬주섬 패와 도장을 꺼내 내밀었다.
그런데 추선은 호란의 도장을 보자마자 목소리를 험하게 했다.
“도장에 왜 인감 번호가 없느냐?”
“응?”
“민적에 이름을 올렸으면 인감 장부에 도장을 찍고 번호를 받았을 것이 아니야? 왜 네 도장에는 번호가 없느냐?”
“어….”
호란은 더듬거렸다. 어제 인감 장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는 것은 들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게… 라왕이 인감… 그거는 아직 하지 말라고 해서….”
추선은 얼굴을 찡그렸다.
“라왕이 누군데?”
“라왕은…. 라왕?”
군중 속에 라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호란이 사고를 치니 얽히지 않으려고 내뺀 모양이었다.
대답을 못 하는 사이 추선이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다.
“말로는 왼대열이라고 하면서, 자기 직도 모르고, 소속도 모르고, 인감도 없고. 네 녀석 정말 시민이 맞느냐? 몰래 숨어들어온 방랑족은 아니겠지?”
“아니야! 진짜로 민적에 이름이 있어! 바로 어제 패를 만들었단 말이야!”
호란은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추선은 잘 걸렸다는 듯이 기세를 올렸다.
“시끄럽다! 나는 바쁜 몸이라 너 같은 것과 한없이 실랑이할 겨를이 없다! 당장 신원을 증명하든가, 아니면 썩 시에서 나가라!”
“아니, 그러지 말고….”
“저어, 외람됩니다만, 미천한 놈이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둘러선 구경꾼들 사이에서 안경 쓴 남자가 말을 붙여왔다.
호란은 반가움에 탄성을 흘렸다. 그는 바로 어제 호란의 패와 도장을 만들어준 반민 기술자였다.
아는 이라곤 몇 없는 남운관에서 드물게 호란의 신원을 아는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추선은 더 기분이 안 좋아진 듯했다. 그가 으르렁대는 듯한 소리로 반민의 이름을 뱉었다.
“단! 천한 놈이 왜 끼어드느냐? 주제에 어디서 참견질을 하려고!”
보아하니 다른 사람에게 천하다고 욕하는 것이 추선의 삶에 크게 중요한 부분인 모양이었다.
말만 걸었다 냅다 욕을 들어먹고서도 반민 기술자는 나긋한 목소리로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왜 그러십니까? 이놈이 그래도 민적을 담당하지 않습니까? 신원 문제에 저만치 도움 될 놈이 어디 있다고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