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44
044화
* * *
호란이 이제까지 싸운 거석은 모두 얼기설기 모인 암석이었다.
머리통과 몸통에 팔다리를 갖추고 섰으니 사람 모양이라 할 뿐이지, 어디로 보나 돌멩이였다. 움직이면 흙과 모래가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한 거석은 완전히 달랐다.
전신이 조각상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돌로 되어 있었다. 팔다리의 이음새도 만들어 붙인 듯했다.
기결을 흐르는 기운도 더 치밀하고 잔잔했다.
약점을 읽기가 제법 어려워 보였다.
몸통이 굵고 팔다리가 짧아 둔해 보이는 모양새인 것만 다른 거석 비슷한 점이었다.
크기는 안 큰데 한번 싸워 봐?
아니면 시문 님께 먼저 알려야 하나?
호란이 고민하는데 거석들이 호란을 눈치채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움직임도 전에 싸운 거석보다 빨랐다.
호란은 주먹을 쥐었다. 단은 이쪽으로 수레를 몰아오고 있을 것이다.
마주치기 전에 한 놈이라도 깨놓는 게 나아 보였다.
호란은 크게 반원을 그리며 우회하여 먼저 왼쪽 거석을 치고 들어갔다.
한 놈의 사각에서 다른 놈을 상대할 셈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호란을 향해 덤벼들 줄 알았던 거석이 생각지 못한 움직임을 보였다.
왼쪽 거석은 방어하듯 팔을 휘두르며 옆으로 움직였다.
그 뒤에서 오른쪽 거석이 쿵쿵쿵 호란에게 달려들었다.
“와, 이게 뭐야?”
호란은 오른쪽 거석이 내리친 팔을 피하며 놀라워했다.
거석이 이렇게 지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호란이 훨씬 재빨랐기 때문에 흰 거석들은 호란을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두 녀석이 연계하며 서로를 지켜주어 호란도 좀처럼 틈을 노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콰앙 벼락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오른쪽 거석이 크게 흔들렸다.
호란은 때를 놓치지 않고 오른쪽 거석의 기결에 주먹을 들이박았다.
매끄럽게 파인 나선무늬에 굵고 긴 금이 갔다.
호란은 거석들과 거리를 두며 소리 난 곳을 보았다.
둔덕 위에 수레가 있고 단이 크고 두꺼운 총통을 경사에 걸쳐놓고 서 있었다.
방금 오른쪽 거석을 친 것은 단이 쏜 포탄이었다.
호란이 소리쳤다.
“무늬를 쏴, 무늬를!”
“이건 쏜다고 다 맞는 것 아니거든!”
단이 불평을 외치며 다시 총통에 장약과 탄자를 넣었다.
성한 쪽 거석이 몸을 돌리더니 수레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호란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도 일 대 일이 된 데다 눈앞의 거석은 이미 기결에 금이 있었다.
도움닫기 해 꽂은 발차기 한 번에 흰 거석이 넘어갔다.
호란은 곧바로 다른 거석을 쫓았다.
단이 다시 총통을 쏘았다.
몸통에 직격을 받은 놈은 주춤 뒷걸음질 쳤지만 다시 수레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와 씨, 나리님! 뛰세요!”
재장전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단이 총통을 놔두고 둔덕 아래로 도망쳤다.
수레 옆에 서 있던 시현도 당황한 얼굴을 하고 아래로 뛰었다.
호란의 마음속 책임감이 무한한 크기로 부풀었다.
단도 단이지만 시문 님… 그렇게 느리셔서 이제까지 어떻게 돌아다니셨지….
호란은 인생 최고로 빠르게 뛰어서 흰 거석을 따라잡았고 놈이 둔덕을 오르기 전에 기결을 파하는 데 성공했다.
호란은 숨을 씨근거리며 땀을 닦았다.
발치에는 흰 거석이 빛을 잃고 몸통에 여러 갈래 금이 간 채 쓰러져 있었다.
그가 시현 쪽을 보고 물었다.
“이런 거석 처음 봐요. 중부 거석은 다 이래요?”
“그럴 리가 있느냐.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을 하던 시현이 얼굴을 굳히며 소리쳤다.
“물러나라, 호란!”
분명히 기운을 다 흩어놨던 기결에 어느새 빛이 돌아와 있었다.
흰 거석은 호란이 반응할 틈도 없이 빠르게 몸을 세웠다.
호란은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흰 거석의 기운이 쓰러뜨리기 전보다 오히려 더 커진 것을 느끼고 호란은 바짝 긴장했다.
먼저 해치웠던 거석도 다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다시 일어난 거석은 일행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일행을 내려다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시현이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근처에 괴인이 있구나.”
“어디야! 나와!”
호란이 허리에 주먹을 얹고 소리쳤다. 단이 중얼거렸다.
“아니, 나오면 큰일 나지….”
“어차피 상대해야 할 거 아니….”
호란은 말하다가 딱딱하게 굳었다.
저쪽 부서진 마을로부터 머리칼이 길고 팔다리가 쭉쭉 뻗은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시현은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옅게 회색기 도는 갈색 피부, 성별을 알기 어려운 외모는 틀림없는 괴인이었다.
다만 모들과 암장과는 옷차림이 달랐다.
반민이 흔하게 입는 올이 거친 저고리와 정강이까지 오는 홑바지를 입고 있었다.
검푸른 빛 긴 머리칼이 등 뒤로 내려 묶인 채 바람에 휘날렸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난처한 미소를 띠었다. 그가 말했다.
“안녕. 호란아, 잘 지냈니.”
호란이 뻣뻣하게 선 채 더듬댔다.
“사, 사부….”
시현과 단은 깜짝 놀라 호란을 바라보았다. 상대가 다시 말했다.
“암장을 죽게 한 게 너라고 들었어. 약속을 어겼더구나.”
호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약속… 안 어겼어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아니, 어겼어.”
사부란 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약속은 두 가지였지. 거석을 파하는 걸 가르쳐주면, 너 자신과 무리를 지키는 데에만 사용하기로 했잖니.”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된 시현과 단이 호란과 사부란 이를 번갈아 보았다.
여전히 놀람을 감추지 못한 얼굴이었다.
호란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변명의 말을 했다.
“지키는 데 썼어요. 그 모들이랑 암장이란 사람이 먼저 우릴 공격했다고요.”
“호란아, 내 말뜻을 알면서….”
사부란 이는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그가 호란에게 말했다.
“괜찮아. 약속을 했지만 인간이니까 어길 수도 있지. 암장이 죽은 건 나한테는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만…. 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 그걸로 내가 너를 책망할 수는 없어. 이건 크게 보면 내 책임이야.”
시현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암장도 모들에 비하면 눈에 띄게 호전성이 덜했다.
그런데 호란의 사부는 보다 더 온화했다. 호란에 대한 호의도 커 보였다.
시현은 일단 끼어들지 않고 호란에게 맡겨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괴인들과 대화의 여지는 없다 결론지은 후였으나, 혹시라도 자신이 생각지 못한 실오라기 같은 가능성이 있다면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부가 호란을 달래듯이 말했다.
“말 안 해도 알지? 나는 너를 해칠 마음이 하나도 없어.”
“저도 사부하고 싸우기 싫어요.”
“그래. 그러면 말이야….”
사부가 무척 미안해하며 호란에게 물었다.
“네가 정말 마음이 아프겠지만… 내가 저기 저 두 사람만 죽이게 놔둬줄 순 없을까?”
시현이 숨을 들이켰다.
단은 두렵기 전에 어이가 없었다. 사부란 이의 말투는 무슨 돈 몇 푼 꿀 때 면목 없어 하는 사람 같았다.
호란은 곧바로 얼굴이 새파래져서 단과 시현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그럼 그 시문이란 사람만이라도. 안 될까? 둘 중에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호란이 팔을 벌리고 고개를 홰홰 저었다.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절대 안 된다니까요! 아무리 사부라도 저하고 사생결단하셔야 돼요!”
사부가 긴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사생결단이라도 되면 싸울 마음이 들겠다. 네가 날 상대로 뭘 하겠니. 그리고 어떻게 내 손으로 너를…. 나는 못 해.”
그는 고개를 젓더니 거석을 향해 손짓했다.
하얀 거석들이 기결의 빛을 잃더니 흰 모래가 되어 땅으로 부서져 내렸다.
그가 호란에게 말했다.
“지금은 그냥 갈게. 나중에 둘이 이야기하자.”
사부는 등을 돌렸다.
떠나기 전 그가 호란에게 야단치듯 말했다.
“울지 마, 뚝!”
그는 다리로 땅을 차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호란이 털썩 주저앉았다.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시현이 그에게 다가갔다.
“호란. 어떻게 된 일이냐.”
“죄송해요…. 이제까지 말씀 못 드려서. 하지만 약속을 해서….”
호란이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단은 한숨을 쉬었다. 찜찜하기는 하지만 저 반쯤 부서진 마을에 행장을 풀어야 할 것 같았다.
* * *
마을에는 성한 집이 꽤 있었다.
세 사람은 개중 깨끗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현이 호란에게 물었다.
“좀 진정이 되었느냐.”
“네에….”
호란이 약하게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호란은 큰 그릇에 담긴 물을 꿀꺽꿀꺽 비운 다음 자초지종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호란이 처음 사부를 만난 건 일곱 살 때였다.
혼자서 산을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어서 엉엉 울고 있는데 사부가 발견하고 동구 보이는 데까지 데려다주었다.
좀 더 큰 다음에 다시 만났다. 뛰어서 절벽 오르는 것을 연습하다가 잘못 떨어져서 발목을 다쳤는데 사부가 업어서 절벽 위로 올려 주었다.
그리고 황야를 돌아다니다 거석을 만났는데 사부가….
결국 거기서 단이 참지 못하고 이야기를 끊었다.
“아니, 좀 안 돌아다니고 마을에 있으면 안 됐어?”
“우리 마을이 얼마나 좁았는데. 거기서 뭐 하라고.”
호란이 억울해했다. 시현은 잠자코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알고 보니 사부는 약바위산의 빈 동굴에 혼자 살고 있었다.
신세를 진 호란은 은혜를 갚겠다고 자꾸자꾸 찾아갔지만 사부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호란이 작은 짐승을 사냥해 가져가면 당황하며 질색을 했다.
호란은 은혜 갚기를 포기하고 그냥 놀러 가기 시작했다.
마을에는 호란 또래 아이가 몇 없었고, 호란은 달리기도 잘 못하는 하란이가 따라다니는 걸 귀찮아했기 때문에 사부를 만나는 게 더 좋았다.
“처음에는 사부가 하늘인인 줄 알았어요. 간혹 무리 없이 혼자 사는 사람도 있거든요. 나중에 사부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걸 알았지만…. 사부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전 사부를 좋아하니까 캐묻고 싶지 않았고요.”
시현이 심각하게 물었다.
“네 사부란 자가 그동안 계속 남운관 근방에 있었던 것이구나. 그가 거기서 무얼 하였느냐?”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새를 키웠어요. 다친 고라니도 돌봐주고요. 싹 잘못 틔워 시들어가는 나무를 더 좋은 데로 옮겨 심어주기도 하고요.”
시현이 눈을 깜박였다.
호란은 제가 말을 하고도 시현의 기대에서 벗어난 답이란 걸 아는지 주뼛주뼛했다.
“그리고… 햇볕 따뜻한 바위 위에 누워 있길 좋아했고요…. 사실 사부는 엄청 게을렀어요. 자는 것도 아니면서 사흘 동안 같은 자리에서 안 움직인 적도 있어요.”
시현이 생각에 잠겼다. 호란이 계속 말했다.
“제가 제몫 갖고서 좀 있다가, 아랫마을에 거석이 잔뜩 쳐들어온 적이 있었어요. 마을 몫꾼들이 다 가서 싸웠는데 저도 같이 싸우러 갔다가 다쳤어요. 사부가 그걸 알고 자기가 먼저 거석하고 싸우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