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45
045화
* * *
사부는 두 가지 약속을 하길 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 호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만 힘을 쓸 것.
힘이 있는데도 가족과 무리를 안 지키면 하늘인이 아니라고 호란이 부득부득 우겨서 사부가 양보를 했다.
호란이 배울 것을 다 배우고 얼마 후, 사부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호란은 온 산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게 일 년쯤 전이었다.
호란이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모들을 처음 봤을 때 사부와 외모가 비슷한 걸 바로 알았어요. 하지만 설령 사부가 모들의 동족이라 해도, 절대로 모들하고 같은 패거리는 아닐 거라 믿었어요….
사부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산 것은 다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인데. 그렇게 나쁜 일을 할 리가 없는데…. 왜, 왜 사부 같이 좋은 사람이….”
또 눈물이 흘러나왔다.
남운관에서, 치풍관에서, 또 다른 장소에서, 모들과 암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모른다.
그런 끔찍한 일에 사부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졌다.
단이 눈물을 닦으라고 수건을 건넸다.
호란은 단의 팔에 고개를 묻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시현이 조용히 물었다.
“네 사부의 이름이 무엇이냐.”
“석영이에요….”
“그것은 돌 한 종류의 이름이다. 알고 있느냐?”
호란이 고개를 들었다. 시현이 말을 이었다.
“모들은 옛날 말로 돌무더기나 돌무지라는 뜻이고, 암장은 땅 밑의 돌이 열에 녹아 걸쭉한 액체 된 것을 이르는 말이다. 더군다나 암장이 죽어 무슨 모양이 되었는지 네 눈으로 보았지.”
“하지만….”
호란은 뭔가를 부정하고 싶은 듯했다.
시현이 손을 뻗어 호란의 얼굴에 남은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에 놀라고 황망해하지 말거라. 그들은 애초에 산 자가 아니다. 자기에게 생명이 없으니 생명을 죽이는 것을 죄라 못 느끼는 것이다.”
단이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다 거석이었던 거지요, 돌을 조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저들 자체가 돌이었어요.”
“그렇다. 아무리 사람 같이 말하고 행동한다 한들 그저 기운을 지녀 움직이는 돌이다.”
호란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시문 님, 저는 이해가 안 가요. 대체 왜….”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호란아. 네가 오늘 마음을 너무 많이 상했다. 지금은 더 생각하지 말거라. 그냥 쉬려무나. 나도 생각을 좀 해야겠다.”
호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터덜터덜 밖으로 나갔다.
시현이 단에게 말했다.
“호란 곁에 가 주거라.”
“좀 있다가. 지금은 잠깐 혼자 놔두게.”
“그래. 그것도 좋겠다….”
시현이 앉은 자리를 바꾸어 벽에 등을 기댔다. 얼마간 침묵이 흐른 뒤 시현이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저지른 죄가 너무 커 도저히 용서하거나 타협할 수 없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치풍관에서 싸워 보고 문제가 더 큼을 알았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그것은 산 사람이 타협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닐 것이다.”
“아마 그렇겠지.”
단이 불편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밤마다 이 인간도 저 인간도 다 죽기를 바라며 잠드는 사람이었지만 정말로 세상 사람을 다 죽이려고 드는 존재가 있다면, 그들이 인간조차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문제였다.
시현이 다시 말했다.
“그들은 거석으로 물을 땅속에 가두어 땅 위의 온갖 생명을 멸하려 하고 있고. 제게 생명이 없어 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세상이 전부 사막이 된들 눈도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가 통할 바가 없고 협상할 여지가 없다.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다 해도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사실이었다.
먹을 필요도 마실 필요도 없고 세상의 권력이나 부귀영화를 원하지도 않을 것 같은 돌멩이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이 난리를 피우는 이유란 게 무엇일까?
단으로선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따지자면 굳이 제가 생각할 일도 아니었으나 앞에 앉은 인간이 저를 대화 상대로 삼고 있으니 생각을 안 할 수도 없었다.
시현이 수심에 차서 말했다.
“결국 우리와 그들 중 한쪽이 완전히 멸해져야 싸움이 끝날 것이다. 어떻게 이길까를 먼저 걱정해야 하겠으나… 당장은 호란 생각에 마음이 안 좋구나.
제 사부와 저리 연이 깊고 정이 깊은데, 그를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고 차마 어떻게 말하겠느냐.”
단이 뚱하게 말했다.
“그런 걱정을 뭐 하러 벌써 해.”
“어찌 걱정을 안 해….”
“어차피 마력석도 없으면서? 그 녀석을 내일 만나도 니가 훅 가고 모레 만나도 니가 훅 갈 건데?”
시현이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슬슬 네가 못되게 말하는 것에 적응이 되어 간다.”
단은 몇 마디 더 해줄까도 생각했지만 시현이 알아서 쳐져 있길래 그냥 내버려두었다.
적당히 시간이 지난 다음 단은 호란을 찾으러 나갔다.
호란은 사립을 나오면 바로 보이는 곳을 괜히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단이 다가가자 호란이 울어서 부은 눈을 하고 물었다.
“시문 님이 뭐라셔? 우리 사부 죽일 거라셔?”
단은 멈칫했다. 호란은 다정한 아이였지만 투사였고 생각의 방향 침이 대체로 고정되어 있었다.
단이 멈춰선 채 대답을 못 하고 있자 호란은 다 안다는 듯이 쓸쓸한 얼굴을 했다.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은데, 근데 시문 님 입장에선 그러시는 게 당연하잖아.”
호란이 걸어와서 단에게 풀썩 기댔다. 품에 얼굴을 묻은 채 호란이 중얼거렸다.
“단, 나… 너무 속상해….”
“응.”
“아무것도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응.”
“잘래. 해 안 졌지만 그냥 잘 거야. 너무 많이 울었어.”
호란이 투정 부리듯 웅얼댔다. 단이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고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근데 조금 기다려. 따뜻한 거 만들어 줄게 먹고 자.”
호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눈을 비비고 단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호란은 잤다.
자고, 저물녘에 일어나 저녁밥을 먹고, 또 자고, 새벽에 탐색 겸 마을 주변을 한 차례 뛰고, 아침밥을 먹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호란은 시현에게 다음에 사부를 만나면 한 번 더 얘기를 해보겠노라 말했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 말하지 않았다.
길을 출발하고 오래지 않아서였다.
고개를 하나 오르는데 위쪽에서 함성 소리가 들렸다.
한 무리의 하늘인 대열이 거석 둘을 상대로 고투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둘 다 평범한 놈이었다.
호란은 곧바로 수레를 내렸다.
그는 쌓인 속을 풀어내려는 듯 돌진해서 거석 두 개를 다 날려버렸다.
시현이 열어놓은 앞쪽 들창으로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호란이 더 강해졌구나.”
단이 뒤를 돌아보았다.
“원래 셌잖아? 전에도 맨주먹으로 거석을 부쉈는데, 그거보다 더 세질 수가 있나?”
“다르다. 기운을 더 명확하게 읽고 짧은 파점에도 잘 파고들게 되었다. 아직 놓치는 흐름이 있기는 하나 보면 볼수록 놀랍다.”
놀랍다는 것은 단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거석을 상대하던 하늘인 대열이 놀라서 허둥지둥하는 게 멀리서도 선연했다.
하지만 하늘인 대열이 놀란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정말이오? 정말로 저 수레에 타고 문께서 오고 계신단 말이오?”
“응. 진짜로!”
호란의 말을 들은 대열 머리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주위의 몫꾼들도 다 눈이 커다래져서 수군거렸다.
“시문이시면… 함씨 집안의?”
“그 함씨 원의 어르신네의?”
호란은 의아했다.
‘함씨 집안의 시문’이라니? 시문 님은 완씨인데. 세상에 시문이 둘 있을 리도 없고.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수레가 도착하고, 꿇어 엎드린 몫꾼들의 예를 받으러 내린 시현이 호란에게 귀띔했다.
“어머니께서 이 지방 출신이시다. 윤지관에서 관직에 계신 함씨 원의께선 내 할아버지시다.”
“아아.”
호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몫꾼들이 하는 양을 보니 함씨 집안이란 엄청 위세가 대단한 집 같았다.
거석과 싸우던 몫꾼들은 윤지관의 관병이었다.
한 사람을 전갈꾼으로 먼저 보내고, 머리가 호위를 자청하여 일행은 대열을 앞뒤에 벌여 두고 다시 움직였다.
재를 넘자 넓은 평야와 그 건너 구릉 위에 선 윤지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란은 입을 떡 벌렸다. 처음 남운관을 봤을 때 세상에서 제일 큰 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윤지관은 멀리서 봐도 그 세 배는 되어 보였다.
놀라운 것은 윤지관만이 아니었다.
윤지관에서 구릉 아래 벌판까지 사통팔달로 대로가 닦여 있고 집과 농토가 조각보처럼 펼쳐져 있었다.
곳곳이 거석에게 짓밟히기는 했으나 아직도 성한 인가와 농토가 많았다.
이렇게 넓은 삶터가 있을 수가 있다니.
감탄을 멈추지 못하는 호란에게 단이 말해주었다.
“온강 땅은 이게 많이 줄어든 거래. 예전에는 이거 두 배도 넘었다더라.”
“예전 언제?”
“나도 모르지. 하지만 여기는 원래가 남방하고는 비교가 안 되게 살기 좋았어. 거석이 늘어난 다음에도, 남운관하고 치풍관이 몰려오는 거석 떼 막는 동안 이 동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꿀 빨았지.”
윤지관의 윤지(潤地)는 젖은 땅, 혹은 윤택한 땅이라는 뜻이다.
윤지관이 자리 잡은 온강은 북방의 대운관과 더불어 이 땅 위에 가장 물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그만큼 사람과 산물이 넘쳐났다.
거석의 발호를 피해 가지야 못했다.
하지만 온강에는 막강한 군대, 서격원 본원이 거느린 수많은 법술사, 이를 뒷받침하는 거대한 부가 있었다.
다른 관성도시가 점점 성곽 안으로 찌그러드는 와중에도 온강은 여전히 윤지관 성 밖에 넓은 터전을 지키고 있었다.
함씨 집안을 비롯하여 이 지역 사람들이 저를 윤지관 사람이 아니라 온강 사람이라 말하는 것은 그런 자부심의 표시였다.
일행이 윤지관에 도착하기도 전에 고위 관인 한 사람이 수행을 이끌고 달려 나왔다.
그는 시현에게 갖은 인사말을 늘어놓더니 그를 일단 관성 밖에 설치된 군영으로 모시겠다 했다.
“이미 함씨 댁에 전갈이 들어갔습니다. 바로 행차를 준비할 터이니 객청에서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시현이 딱딱하게 말했다.
“상황이 엄중한 데다 좋은 일로 온 것이 아니니 갈도는 물론 행차가 일체 필요 없다. 조부 댁에 곧바로 갈 것이니 조용히 이를 수 있게 하라.”
관인은 시현이 타고 온 상인들의 수레를 보며 난처해했다.
“최소한 수레라도 새로 대령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런 수레로 모시기엔….”
“…알겠다.”
시현은 씁쓸함을 감추고 허락의 말을 했다.
비상한 때에 형식과 체면만 따진다고 책하기에는 이들의 입장도 모를 것은 아니었다.
이곳 역시 법력이 사라진 이래 땅인들의 위치가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문이 찾아온 것을 세를 보이는 데 이용하고 싶다 하면 이용하게 두어도 좋았다. 이쪽에서도 청할 것이 많았다.
군영에 도착하자 시현이 준비된 객청으로 오르며 말했다.
“호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들어오거라. 단, 너는 차를 내어오거라.”
“예.”
긴한 얘기란 말에 호란은 긴장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