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46
046화
* * *
곧 단이 다반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호란이 진지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자 시현은 미소를 지었다.
“실은 꼭 할 이야기는 없다. 기다리는 사이 잠시 얼굴이라도 봐 두려고 불렀다. 이제 시내에 들어가면 한동안은 이렇게 이야기 나누기도 어려울 테니….”
호란이 이해를 못 하고 있자 단이 넌지시 말했다.
“지금부터 함씨 저택에 갈 거잖아. 당연히 나리님과는 거처가 나뉘지.”
“아아….”
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땅님 댁이니만큼 저택이 아주 클 터였다.
시현이 말했다.
“혹시 내게 할 이야기가 있거든 미리 해두거라.”
호란도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기껏 말을 해보라기에 묻고 싶던 것을 물었다.
“전에 이 동네 와보셨다 하셨지요? 할아버지 댁이라 오셨던 거예요?”
“아니다. 문에 달한 후 서격원이 청하여 왔다.”
서격원이 뭔지 모르는 호란은 말을 듣고 더 알쏭달쏭한 얼굴이 되었다.
시현이 눈치채고 설명을 덧붙였다.
“서격원이란 각 관성에서 땅인의 법술 시험을 주관하고 자격을 보증하는 곳이다. 여기 윤지관에는 서격원 본원이 있어 온 땅의 격 얻은 이가 이름을 올린단다.
매해 여덟 관성의 서격원에서 각각 과거시험을 치고, 새로 격이 나면 관성마다 대표를 몇 명 본원으로 보내 자격을 증명하고 모두의 이름을 올리지. 이 먼 곳에 다 올 수는 없으니 말이다.”
호란에겐 신기한 얘기였다.
“시문 님이 남운관 대표셨어요?”
“그해 대표는 따로 있었다. 문이란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만 서격원에서 꼭 와달라 청했다. 서격원에서 공부도 하고, 겸사겸사 집안 어른들도 뵙고. 반년 정도 머물렀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시현이 먼눈을 했다.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세상일이 참 알 수 없구나.”
곧 시현이 탈 수레가 대령되었다.
버젓한 의복을 차려입은 호위와 시중꾼들도 잔뜩 왔다.
호란과 단은 이제껏 타고 온 수레를 몰고 한발 먼저 함씨가에 가게 되었다.
호란은 시현과 떨어지는 것을 저어했지만, 시현이 그러라 하자 곧 말을 들었다.
윤지관 사람들은 땅인이고 하늘인이고 모두 시현에게 극진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윤지관 성내는 겉에서 본 것보다 더 번화했다.
층 있는 건물이 줄줄이 늘어서고 가게마다 물건이 가득했다.
처음 보는 과일과 먹거리도 눈에 띄었다. 사람도 남운관보다 더 많았다.
성문을 통과하고 거리를 지나는 동안 호란은 내내 놀라고 두리번거리기를 멈추지 못했다.
결국 단에게 살짝 타박을 받았다.
하지만 가장 굉장한 것은 함씨 저택이었다.
높다란 담장 안에 또 담과 문이 겹겹이 있고,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건물이 끝없이 서 있었다.
이야기로 듣던 대궐이 이런 곳일까 싶어질 정도였다.
일하는 사람도 셀 수가 없었다. 반민 종만이 아니고 하늘인 몫꾼들도 수없이 드나들었다.
피부색이 짙거나 검은 사람이 다수라 중부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관리하는 직책에 있는 듯한 하늘인 남자 한 사람이 호란을 맞아들였다.
좋은 옷을 입고 허리에 짧은 칼을 찬 것이 어쩐지 추선을 생각나게 했다.
그는 호란을 환영하고 먼 길에 위를 모신 데 치하의 말을 몇 마디 한 다음 물었다
“앞에서 함께 위를 맞이하시겠소, 아니면 처소에서 쉬시겠소?”
“시문 님 오시는 건 봐야지…요.”
말끝을 못 고르고 호란이 어중간하게 말했다. 상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훌륭한 호위시오.”
그는 종을 하나 불러 호란을 안내하라 이른 후 어디로 가버렸다. 상당히 분주해 보였다.
협문 여럿을 지나 앞마당에 도착하니 대문 안과 중문 안이 사람으로 가득했다.
모여 있는 것은 호위나 종들만이 아니었다.
중문 안에 수많은 땅인들이 의관을 갖추고 늘어서서 시현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문 님은 조용하게 오시겠다고 했는데. 이 사람들 말 하나도 안 들었네.”
호란이 단에게 속닥거렸다. 단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담 너머가 소란스러워졌다.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시문 님 오셨나 봐!”
호란이 반색하고 대문으로 가려는데 단이 잡았다.
그는 오히려 호란을 구석진 쪽으로 이끌어갔다.
높고 웅장한 솟을대문이 천천히 양쪽으로 벌어졌다. 남녀 종이 소리를 맞춰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문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시현이 들어왔다. 널찍한 돌길 좌우로 사람들이 좌악 꿇어 엎드렸다.
시현은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
고운 옷을 입은 모르는 이들이 줄줄이 뒤를 따랐다.
중문에 이르자 다른 종이 다시 한번 알리는 말을 외쳤다.
소년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문 안쪽으로, 도열해 있던 수십의 땅님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 것이 들여다보였다.
단이 소곤소곤 말했다.
“아시지요? 우린 위께서 부르시지 않으면 중문 안에 들 수 없습니다.”
호란은 단을 쳐다보았다. 단이 작고 차근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호란 나리, 익숙하지 않으셔도 신경 쓰셔요. 나중에 시문 나으리님을 뵈어도, 절대 먼저 말을 거시면 안 됩니다. 호위이시니 무릎 꿇지 않고 허리만 숙이셔도 되지만 말씀 떨어질 때까지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눈을 똑바로 마주치시면 안 되고, 허락 없이 다섯 걸음 안쪽으로 다가가셔도 안 되고요….”
예법을 일러주는 단의 말씨가 어느새 존대로 돌아와 있었다.
호란은 약간 멍해졌다.
이게 보통이었다. 그동안이 이상한 거였다.
맨 처음 시현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그가 얼마나 까마득히 높고 멀어 보였는지, 자기가 얼마나 황송해하며 땅에 머리를 대었는지를 다 잊고 있었다.
이제 시현은 중당에 올라 조부 조모와 예하고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말을 하는 것 같았으나 중문 밖에 선 호란에겐 잘 들리지 않았다.
호란은 기분이 좀 이상했다.
시문 님이 변해버린 것은 아니었다.
호란이 울 때 눈물을 닦아주고, 상처가 아파서 잘 못 잘 때 머리맡을 지켜주고, 좁은 수레에서 호란과 등을 붙이고 잤던 시문 님은 지금도 지척에 계셨다.
그저 애초부터, 그 윗전은 저한테 글자 읽기나 가르쳐 줄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다.
* * *
조부와 조모가 앉은 내실로 들어서면서 시현은 마음을 다졌다.
할아버지 함원규 의의 낯빛이 험악했다.
밖에서는 오만 사람을 모아놓고 격식을 차리고, 여행한 일을 캐물으며 사람들 앞에서 문의 뜻이 크고 공이 크다며 장광설을 늘어놓은 그였다.
하지만 사적인 자리가 되자 완전히 태도가 바뀌었다.
원규는 시현이 자리에 앉을 틈도 없이 다그쳤다.
“경이는! 네 어미 이야기를 해보거라! 일단은 무사했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야!”
시현은 제가 떠날 때까지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고했다.
폭동이 났고 완씨 별택에서조차 머물지 못하게 되었다는 데 이야기가 이르자 원규의 구릿빛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남운관이 위험하다, 남운관에는 가면 안 된다 하였는데….”
원규가 장탄식을 했다.
조모 유래연 인이 말리는 말을 하였으나 그는 들을 기색이 없었다.
시현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꺼낼지 알고 있었다. 벌써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내가, 경이가 혼인하겠다며 네 아비를 데려왔을 때, 내가 네 아비더러 여기 온강에 남아 경이와 함께 함씨 집안을 이으라 했다. 원래 경이가 집안을 이을 것이었으니 그렇게 했으면 모두가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네 아비가 남방에 작은 집안이 있고 작은 벼슬이 있다 유세하며 부득부득 그 촌구석으로 떠났다. 제 집안만 생각하고 경이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찌 되었느냐. 이 꼴을 봐라!”
시현이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변호했다.
“온강에는 큰 가문과 인재가 많으나 남운관은 예로부터 완씨 집안에 의지하는 바가 컸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는 위된 이로서 차마 남운관을 저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네 아비가 잘했다는 것이냐! 내 앞에서 그 말이 나오느냐! 지금 네 어미의 생사도 모르는데!”
시현은 황급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원규가 가슴을 쾅쾅 쳤다.
“애초에 서로 만나질 않게 했어야 했다! 아무리 격에 올랐대도 열일곱 철모르는 시절이었는데! 경이가 그 얼굴만 반반한 작자를 만나게 놔두는 게 아니었다!”
“…….”
시현은 그냥 바닥만 보았다.
열두 살 때나 지금이나 듣기 곤란하기는 똑같았다.
아버지는 남운관의 총치총령이다.
명문 완씨 집안의 가주이며 스물넷에 무 격에 달한 사람이다.
평생 남방 끝터의 무수한 거석떼와 싸워 남운관을 수성하며 온 세상의 보루 역할을 해왔다.
그간 중부가 이토록 평화로웠던 데 남운관과 아버지의 덕도 있음을 알 사람은 다 안다.
그런 완선보 무를 ‘얼굴만 반반한 작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세상에 딱 둘 있었는데, 하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때의 어머니이고 하나는 할아버지 함원규 의였다.
어머니는 화가 너무 났으니까 그렇게 말한다 치자. 할아버지는…. 시현은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원규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긴말은 필요 없겠지. 당장에 남운관으로 물자와 사람을 보내마. 가문에서 대대로 일해온 충성스러운 하늘족을 중심으로 부대를 꾸리면 폭도 따윈 제압하고도 남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남운관이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시현이 인사했으나 원규는 대꾸하지 않았다.
래연이 주저하면서 말을 꺼냈다.
“원규, 이런 때에 다른 지방으로 물자를 빼내면 말이 많이 날 것이오. 보내는 것은 좋으나 총치와 이야기하여 정식으로 명분을 세우고….”
“한시가 급한 때 무슨 소리를 하시오! 그러고도 자네가 경이 어미요? 그리고, 내 것을 내 딸에게 보낸다는데 누가 감히 토를 달아!”
원규가 버럭 소리를 쳤다. 래연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원규가 다시 시현을 보았다.
“네가 말한 돌 인간 일이 사실이라면 우리 함씨 집안과 윤지관도 힘을 보태야지. 너 혼자로 될 일이 아니니 아예 군대를 일으키겠다.”
“예, 힘을 모아주시면 저도 든든하겠습니다.”
“마력석도 필요하다고 했지. 기다려라.”
원규가 사람을 불러 지시를 내리자 곧 종들이 금으로 장식된 크고 작은 상자를 줄줄이 내어왔다.
하나하나가 다 묵직해 보였다.
상자를 내려놓고 원규가 말했다.
“일단 집안에 놓아둔 것을 가져왔으니 살펴봐라. 모자랄 테니 내가 또 수배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시현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원규가 마땅찮은 얼굴을 했다.
“이런 때에 어찌 빈손으로 다녔어. 남운관에는 마력석도 없느냐?”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찼지만 시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남방은 마력석이 전혀 나지 않아 변고 이전에도 부르는 게 값이었다.
한 개 한 개의 가치가 다 다르니 중간에 농간하는 자도 많았다.
재정 낭비와 횡령을 보다 못해 군과 관에서 마력석을 비축하는 옛 제도를 아예 폐지한 것이 아버지였다.
좋은 뜻으로 한 일이라도 결과가 이렇다. 좋은 소리를 들을 리가 없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