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47
047화
* * *
원규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만하면 급한 일은 다 챙겼는가…. 돌 인간 일은 내일 사람을 더 모아 이야기하도록 하자꾸나. 그리고 서격원 사람들이 너를 만나기를 청하고 있다. 피곤하지 않으면 오후에라도 만나주도록 해라.”
“예, 그러겠습니다.”
자리가 정리될 것 같아 시현은 조금 긴장을 풀었다.
할아버지가 베푼 모든 것은 진심으로 감사해 마땅한 것들이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고 빨리 일어나고 싶은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원규는 한 가지 이야기를 더 꺼냈다.
“논의를 하건 군을 일으키건 시일이 걸릴 테니 네가 잠시 여기 머물겠지. 그동안 네게 긴히 부탁할 것이 있다. 도와주겠느냐.”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일입니까? 남운관이 할아버지와 윤지관에 이리 큰 은혜를 입었는데 마땅히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한 일이긴 하나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실인즉….”
원규가 눈을 빛냈다.
이야기를 듣던 시현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 * *
시현이 중문 안에 들어간 뒤, 곧 종이 호란을 찾으러 왔다.
종은 호란이 쉴 처소로 안내하겠다 했다.
함씨 집안에는 여러 일에 종사하는 하늘인이 많아 하늘인 처소가 따로 있다고 했다.
안내를 따라 문을 여러 개 넘으니 너른 뜨락 너머에 일자형 건물이 길게 서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하늘인 관리자가 호란을 맞았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였다.
그는 큰몫꾼이 위를 모시느라 수고가 많았다며 치사를 줄줄 늘어놓고 식사를 주겠노라 했다.
“저기… 단은?”
몇 걸음 뒤에 가만히 서 있는 단이 신경 쓰여 호란이 물었다.
노파는 그제서 단을 발견한 것처럼 대뜸 눈을 부라렸다.
“예끼! 예는 하늘인 처소다! 종자놈이 뭘 얻어먹겠다고 예까지 따라 들어와? 밖에서 기다리면 어련히 밥숟갈을 챙겨줄까!”
호란은 제가 더 화가 나서 노파에게 따졌다.
“말을 왜 그렇게 해? 시문 님 모시느라 고생한 건 단도 똑같은데!”
“아닙니다, 나리. 제가 처신을 잘못한걸요. 이놈이 이런 대갓집엔 처음 와봐서 실수했습니다요.”
단은 멋쩍게 말하고 협문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호란은 성큼 가서 단의 팔을 붙잡았다.
처소는 갈라지더라도 이렇게 쫓겨나듯 가게 놔두기는 싫었다.
호란이 하는 걸 보고 하늘인 노파가 오묘한 얼굴을 했다.
그는 단과 호란을 번갈아 보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어? 그랬어. 내가 미안해.”
노파의 목소리가 갑자기 살가워졌다. 호란은 뜻 모르고 당황스러웠다.
노파가 짐짓 호란을 격려하는 투로 말했다.
“둘이 애틋한 사이였구먼? 진작 말을 하지. 요즘 세상에 신분 차이가 뭐 그리 큰 흉이라고.
큰몫꾼에 큰윗전의 특별 호위시기도 하고, 내가 특별히 별채를 드리지. 그래도 이불은 두 채가 편하지?”
단의 머릿속에 정말로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이미 시현과 서로 말을 전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호란과도 갈라지느니 사람 눈 덜 닿는 별채를 처소로 받으면 좋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별채에 가겠다고 하면 인격적인 뭔가를 포기해야 했다.
바닥 친 인생을 살면서도 나름대로 지켜온 뭔가를….
생각을 너무 오래 했다. 호란이 우물쭈물하다가 별채를 단하고 둘이서만 쓸 수 있는 거냐고 물었다.
노파는 당장 날기라도 할 것처럼 신이 나서 두 사람을 저택 한쪽으로 데려갔다.
전에 정원지기 부부가 살던 곳이라는 별채는 아담하고 깨끗했다. 작은 부엌도 딸려 있었다.
장소도 딱 좋았다. 위치가 외지고 샛길 하나만 통해 있어서 얘기가 밖으로 새어 나갈 걱정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단은 이미 모든 게 다 싫었다.
얼른 방으로 들어가 버리려고 대청을 오르는 그의 뒷모습을 노파가 위아래로 훑더니 호란에게 소곤거렸다.
“반민이래도 키도 크고 골격이 잘 섰네! 애를 봐도 잘하면 반몫꾼은 나겠어!”
노파는 둘이 방에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지켜보고 샐죽샐죽 웃으며 문까지 닫아주고 떠났다.
단이 안경을 밀어 올리고 두 눈을 가렸다.
“와…. 이런 ㅅ… 맙소사….”
거리를 두고 선 호란은 엄청나게 어색해하고 있었다. 제발 안 그랬으면 좋겠다.
호란이 주뼛거리며 말했다.
“그게… 내가 이상한 생각이 있는 게 아니고. 별채가 더 편할 거 같아서…. 사부 얘기나, 다른 중요한 얘기도 우리끼리 해야 하고….”
“알아. 아니까 더 얘기하지 마.”
물론 단이 뭘 하지 말라고 할 때 사람들이 말을 들으면 그건 그의 인생이 아니었다.
호란이 눈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어…. 단, 내가 진짜로… 진짜로 이제까지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혹시 네가 그런 생각이 있으면….”
“없어. 살려줘….”
“응. 나도 아는데, 근데 혹시 해서 말해두는 거야. 너도 몫꾼이지만 그래도 내가 너 하나는 더 책임질 수 있거든….”
“좀 닥칠래? 진짜 세상 사람 다 죽이고 혼자가 되고 싶다.”
단은 답지 않게 행장도 제대로 안 풀고 방구석에 뻐드러져 버렸다.
호란은 괜히 흘끔흘끔 곁눈질을 했다.
단은 친구였지만 그런 말을 들으니 신경 쓰이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호란은 이제껏 연애를 한 번도 안 해봐서 좀 궁금하기도 했다.
계속 흘끔거리다가 들켜서 얼음장 같은 시선을 받고 난 다음에야 진정이 됐다.
조금 후 두 사람 몫의 식사가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져 들어왔다.
단은 이게 더 모욕적이라고 말했지만 밥을 먹으면서 화를 좀 풀었다.
그리고….
호란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호란은 이럴 때 단이 좀 신기하고 멋져 보였다.
단은 항상 일할 거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 할 일이 없을 때가 없었다.
짬이 있으면 수첩이니 공책을 뒤적이면서 뭔가를 생각하거나 적었다.
지금도 공책과 종이를 쌓아놓고 뭐를 계산하고 있길래 무얼 하느냐고 물었더니 치풍관서 화포 시험하고 운용한 기록을 정리한단다.
쓸데는 없지만 그냥 한다는데, 그 말을 누가 믿나.
틀림없이 단의 머릿속에선 어디 도움 될 데가 있을 것이다.
단이 하는 일은 대체로 그랬다.
몸이 가만히 있을 때도 머릿속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반면 호란은 몸이 움직여야 머리도 같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돌아다니려 해도 갈 데가 없었다.
함씨 저택에는 허락 없이 가면 안 되는 곳이 많았다.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것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뭐 도울 일이 없느냐고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귀한 분 모시는 큰몫꾼께 아무 일이나 시킬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둘째 날 밤에 이미 호란은 쾅 터져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호란이 진저리를 치며 소리쳤다.
“할 일 아무것도 없어! 간식 먹는 것도 이젠 지겨워!”
단이 탁자로 쓰던 소반에서 고개를 들며 안경을 고쳐 썼다. 손가락이 흑필 가루로 꺼멨다.
“이제 와서 지겹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이 먹지 않았냐, 너.”
“심심해서 먹었지, 평소에는 단 거 그렇게 안 먹어.”
호란이 볼멘소리를 했다.
함씨 집안에서 내어놓는 음식과 간식은 하나같이 맛있고 처음 먹어보는 것도 많았으나 신기하기도 한두 번이었다.
“그리고, 시문 님 드나드시는 거 몇 번 보러 갔는데, 눈도 안 마주쳐 주시고….”
단이 피식 웃었다.
“아, 그게 그 양반들이 좋아하는 법도라는 거지. 워낙 귀한 분이시라 누구한테 눈길 한 번 더 주는 것도 총애가 되거든.”
첫날 딱 한 번 시현이 보낸 종이 둘을 찾아왔다.
안부를 묻고, 한동안 여기 머물 것이니 거리끼는 것 없이 푹 쉬라고 전했다.
불편한 것이 있느냐 묻는데 차마 너무 심심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냥 없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심심하다 소리라도 했어야 했다.
이후 아무 전갈이 없었다.
여기 왜 머무는지 언제까지 머무는지도 시현이 무얼 하고 있다고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쪽에서 말을 전할 방법은 당연히 없었다.
호란은 점점 서운해지고 있었다.
호란의 불퉁한 얼굴을 보고 단이 위로했다.
“그 나리 딴에는 우릴 생각한다고 거릴 둔 거야. 지금 그 나리가 누굴 만나서 무슨 말 하고 무얼 신경 쓰는지 온 저택이 다 보고 있을걸. 동향서 데려온 호위 아낀다 말이 나면 우리가 제일 귀찮아진다.”
그것은 호란도 알았다.
호란이 저택을 돌아다니고 있으면 괜히 알은 척을 하면서 시문 큰어른 일을 묻는 사람이 반민 하늘인 땅님을 안 가리고 많았다.
단에게서 미리 귀띔 들은 게 있어 모른다 못 들었다 그런 적 없다로 일관했기에 망정이지, 어설프게 아는 척을 했었다면 별채로 들여지는 것이 갖가지 간식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아도 심심한 건 심심한 거였다.
그리고 심심하고 답답한 마음은 금방 서운함으로 넘어갔다.
호란이 한마디 더 불평을 하려는데 밖에서 기척이 났다.
누구 신발 신은 사람이 정원 오솔길을 자박자박 달려오는 소리였다.
함씨 댁 종들은 모두 발소리를 내지 않고 다녔기에 오는 사람은 종이 아니었다.
호란은 방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뜨락으로 달려 들어오다 멈칫하여 선 것은 시현이었다.
어디로 어떻게 왔는지 머리칼과 옷에 풀잎이 붙었고 늘 단정하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다.
“안으로 들여주겠느냐. 남의 눈에 띄면 안 된다.”
시현이 숨을 잔뜩 몰아쉬며 말했다. 호란은 얼른 비켰다.
시현이 안으로 들어오고 단이 섬돌에서 시현의 신발을 가져왔다.
호란이 문을 닫고 물었다.
“시문 님? 무슨 일이에요?”
호란의 얼굴이 걱정으로 굳어진 것을 보고 시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별일은 없다. 호란 네가 매번 인사하러 나와주었는데 말도 못 걸어주지 않았느냐. 미안하기도 하고. 잠깐 얼굴이라도 보면 좋을 것 같아서….”
호란이 막 감동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단이 삐딱선을 탔다.
“뻔한 거짓부렁 하지 마시고요. 뭐 한다고 이 밤중에 몰래 오셨어요? 결국에는 들킬 거 나리님도 아셨지요? 그럴 가치가 있는 얘기라도 있습니까?”
단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방석을 내어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시현이 조금 쓸쓸한 얼굴을 했다.
그가 자리에 앉으며 옷매무새와 머리칼을 정돈했다.
호란은 아직 머리에 붙어 있는 풀잎 하나를 떼어드려야 하는지 고민했다.
시현이 말했다.
“얼굴 보러 온 건 거짓말이 아니다. 내가 너무 가슴이 답답하고 도리가 없어서…. 말이라도 하면 나을 것 같아서. 너희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왜요, 누가 못살게 굴어요?”
호란이 근심에 차서 물었다. 서운했던 마음은 이미 어디로 갔다.
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나를 못살게 굴면 그것이 낫지. 그자들이 시험을 본다고 하는구나.”
“시험이요?”
호란이 묻자 시현이 손으로 제 가슴을 꽉 눌렀다.
“서격원에서 과거시험을 본단다. 매 해 격을 안 낸 적이 없었다고. 윤지관만이라도 시험을 볼 거고, 그 시험에 마력석을 어마어마하게 쓴다고 한다!”
시현이 높아지려는 언성을 억눌렀다. 녹회색 눈이 활활 불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