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50
050화
* * *
아무 움직임이 없던 크고 흰 거석은, 호란이 바로 앞까지 다다르자 한순간에 픽 무너져 흰 모래 더미로 돌아갔다.
그 모래 무더기는 곧 자석에 끌린 듯 숲속의 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호란은 안내를 따라 모래가 뻗는 쪽으로 달렸다.
그 끝에는 호란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터였다.
두렵지는 않았다. 사부는 호란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사부는 언제나 자연 그대로 행동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일이 없었고 입 밖에 낸 것은 다 지켰다.
늘 자기가 원하는 일을 했고 원하지 않는 일은 호란이 아무리 조르고 애걸해도 하지 않았다.
사부가 호란을 해치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니 사부는 호란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사부가 수많은 거석을 일으키고 몫꾼들을 해쳤으니 그것은 사부가 원해서 한 일일 것이다.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호란은 가슴이 깨지는 것 같았다.
숲은 밖에서 본 것보다 넓고 복잡했다.
하지만 흰 모래 줄기가 이끌어준 덕택에 호란은 금방 석영을 찾았다.
석영은 숲 가운데의 작은 샘가에 있었다.
편평한 바위에 앉아 평화롭고 느긋하게 수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예전과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호란은 샘에 다다르자마자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거석을… 거석을 물려주세요. 싸우고 싶지 않아요!”
석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지금 우리 애들이 하나하나 부서져 가는 게 느껴지는데. 시문이라 했던가? 그 골치 아픈 땅인이 손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정말, 마법은 상대하기가 어렵네.”
호란은 그제야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시현이라면 신호탄을 보자마자 바로 움직였을 것이다.
윤지관엔 마력석도 병사도 많다. 괜찮을 것이다.
석영은 미소 띤 얼굴로 호란을 향해 팔을 벌렸다.
“그런 이야긴 됐고, 이리 와. 오랜만에 안아보자.”
호란은 멍하니 석영을 바라보았다.
사라지고 몇 달은 꿈에서까지 봤던 사부였다.
다른 것은 다 잊고 저 품에 뛰어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호란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자리에 선 채 석영에게 물었다.
“사부는… 정말로 사람이 아니에요? 시문 님 말처럼, 돌 인간이에요?”
석영이 가볍게 웃었다.
“이번에는 우릴 돌 인간이라고 부르기로 했니? 인간들은 무엇이든 봤다 하면 이름을 붙이지. 그런 점이 좋지만.”
그건 충분한 대답이었다.
호란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사부의 얼굴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왜… 사부가 이런 일을 해요?”
호란은 땅을 보며 물었다.
“왜 사람을 죽이고 왜 물을 없애요? 사부가 살린 동물들도 나무도, 다 죽어도 좋다는 거예요?”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애써야 했다.
석영은 호란이 다가오려 하지 않자 쓸쓸한 듯 벌렸던 팔을 거뒀다.
그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우리가 지내던 약바위산은 무사해. 거기는 아이들을 보내지 말아 달라고 모들에게 부탁해놨어. 네가 그곳에 있을 줄 알고 한 일이었는데….”
“사부! 왜 이런 일을 하냐고요!”
호란은 결국 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석영의 눈꼬리가 쳐졌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이건 이 세상 전체를 살리기 위한 일이야. 땅 위에 인간이 너무 늘어나선 안 돼…. 특히 땅인들. 그들은 세상의 기운을 지나치게 많이 소모해.”
호란은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뜻이에요?”
석영이 설명했다.
“호란, 네가 딛고 선 땅, 숨 쉬는 공기, 흐르는 물, 풀이 싹 트고 자라는 것, 네 생명…. 이 모든 건 공짜가 아니야.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커다란 기운이 필요해. 인간들이 마력이나 법력이라고 부르는 그 힘 말이야.”
호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도 기운과 법력, 생명력은 다 같은 힘이라고 말했다.
석영은 어두운 눈으로 말했다.
“기운은 무한하지 않아. 땅 위에서 단기간에 소모하는 기운이 너무 많아지면 순환의 고리가 깨지고 말아. 땅속 기운이 일방적으로 땅 위로 빨려 나가고…. 내버려 두면 끝이 우릴 향해 다가올 거야.”
“끝이요?”
“세상의 끝. 이 별과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끝. 생명 있는 것도 생명 없는 것도 다 사라지고, 우리가 발 디딘 이 땅조차 사라지고, 별이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끝.”
호란은 무슨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단이 호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세상이 끝나는 게 무섭지 않으냐고.
그때 호란은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웃어넘겼다.
하지만 지금, 호란이 누구보다도 믿는 사람이 세상의 끝을 말하고 있었고 그것은 단이 말한 끝보다 훨씬 더 무서운 형태였다.
진짜냐고 되묻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석영은 호란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네가 이해하기엔 힘든 일일 거야.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세상을 끝으로 몰아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땅님들이… 마법을 너무 많이 써서 그래요?”
호란은 목소리를 떨면서 물었다. 석영은 고심하는 얼굴을 했다.
“다른 것도 곤란하기는 해. 땅 밑에서 물을 끌어 올리고, 석유와 석탄을 캐내서 불태우고, 대량으로 농사를 짓고 짐승을 길러 생명의 순환을 빠르게 하고…. 하지만, 맞아.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마법이지.
짧은 삶을 사는 너희는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어떤 힘은… 죽음 맞을 운명을 가진 산 사람이 가져서는 안 돼.”
석영이 계속 말했다.
“마법은 계속 발전하고. 발전이 쌓이면 필연처럼 특출한 인물이 튀어나오고. 그때마다 균형이 크게 뒤틀려.
우리도 안일했지. 대처를 한다고 했는데도 시문 같은 인간이 또 생겨날 줄 몰랐어. 이대로는 결국….”
“왜 말로 하지 않았어요?”
호란이 석영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사부가 한 말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해결 방식은 결코 수긍할 수 없었다.
“사람들한테 말하면 되잖아요! 이대로는 큰일 난다고, 마법을 쓰지 말고 기운을 아끼자고 설득하면 되잖아요! 이렇게 다짜고짜 물을 없애고, 사람을 죽이고….”
“설득은 소용없어. 인간은 통제되지 않아. 약속을 지키지 않아. 그 약속이 자기 자신을 위한 거라 해도.”
석영의 단호한 말에 호란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호란부터가 그와의 약속을 어겼다.
호란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제가 약속을 어긴 건 죄송해요…. 저는 제가 남운관에 가면 남운관이 제 무리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시문 님을 지키는 일도 똑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 일은….”
석영이 안타깝게 말했다.
“내가 두 가지 약속을 시킨 건 널 위해서였어. 네가 남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게 알려지면 보나 마나 이 일에 말려들 테니까. 그리고 걱정한 그대로 됐지. 애초에 왜 남운관 같이 크고 복잡한 곳에 간 거니?”
“동생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요….”
석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선 애정과 슬픔이 함께 느껴졌다.
“그래. 그게 인간들이 약속을 어기는 방식이지. 그리고 너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할 거란다.
다들 똑같이 말할 거야. 종말은 나중 일이고, 당장 눈앞에 삶이 있지 않느냐고. 살릴 수 있는데 왜 죽게 내버려두겠냐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데 왜 이대로 살겠느냐고.”
석영은 앉았던 데서 일어섰다. 그가 먼눈을 했다.
“난 가끔 의아해. 아프면 아픈 채로 살다가 죽으면 안 되는 걸까? 불행하면 불행한 채 그대로 살아가면 안 되는 걸까?
너희는 너무나도 빨리 죽어버리는데…. 그 짧은 삶을, 눈 감으면 지나가 버릴 삶을 어떻게든 지금과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못내 발버둥치지. 그게 인간이야.
그런 너희를….”
석영이 호란과 눈을 마주쳤다. 그가 얼굴에 가득 미소를 지었다.
“나는 사랑해.”
석영의 눈에 어린 애정은 진심이었다.
항상 호란에게 베풀어주던 그 애정이었다.
하지만 호란은 처음으로, 그 애정이 제 생각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석영이 팔을 벌렸다. 이번에는 끌어안으려는 동작이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사랑해, 호란. 이 세상도, 인간이란 종도, 네 삶도, 결코 허무한 끝을 맞게 두지 않을 거야. 네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괜찮아.”
호란은 반사적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석영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양팔을 잡혔다.
호란은 몸부림치려 했지만 붙잡힌 팔은 태산에 갇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석영이 호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널 이대로 약바위골에 데려다줄게. 원하면 동생도 찾아다 줄게.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 정리가 끝나면 모든 게 평화로워질 거야.”
호란은 소름이 돋았다. 그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싫어요!”
“약속할게. 괴로운 일은 금방 끝날 거야. 전체 인간의 수가 줄어들면 남은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풍요롭게 살 수 있어. 물도 넉넉하게 쓰게 해줄게. 식물도 동물도 늘어날 거야.”
“싫어요! 절대로 싫어요!”
호란은 필사적으로 힘을 썼지만 석영의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석영이 작게 말했다.
“나를 미워해도 괜찮아. 이게 너를 위한 거야….”
호란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안일함에 치가 떨렸다.
치풍관에서 단이 말해줬다. ‘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정하는 게 상대방일 때는 맹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똑같은 잘못을 다시 저질렀다.
사부가 저를 해치지 않겠다니까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호란과 사부의 관계에서, 해치고 말고가 무슨 뜻인지 정하는 사람은 호란이 아니었다.
“나는 싸울 거예요!”
호란은 힘껏 소리쳤다.
“사부가 날 어디로 데려가든! 어디다 가두든! 돌아올 거예요! 계속 싸울 거예요!”
“세상이 끝나도 좋단 말이니?”
“남들을 다 죽게 놔두고 혼자 살 순 없어요!”
석영은 안타까운 얼굴로 뭐라 더 말하려 했다.
그 순간 퍼엉 하고 폭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석영과 호란은 동시에 소리 난 쪽을 보았다.
열 몇 보쯤 거리를 두고 단이 서 있었다.
손에 총통이 들려 있고 발치에는 신호탄의 약통이 구르고 있었다.
단이 총통을 이쪽으로 겨누며 소리쳤다.
“호란한테서 떨어져!”
단을 보는 석영의 시선은 냉정했다. 그가 말했다.
“수준 낮은 총인걸. 그걸로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거 같아?”
“아, 너도 이게 후진 줄 아는구나? 그게 우리가 공유하는 문제지.”
단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사실 나도 쏘기 싫어. 이거 명중률이 개판이거든. 이 거리에서 호란이 안 맞는다는 보장이 없어.”
석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단에게 말했다.
“당장 총구를 치워.”
“호란을 놔줘. 나는 보기보다 도박 좋아해.”
저를 잡은 석영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을 때 호란은 이미 어떻게 움직일지를 정한 후였다.
그는 단을 향해 돌진하려는 석영의 허리에 전력으로 매달리며 소리쳤다.
“단, 쏴!”
“너 맞는다고, 멍청아!”
도박 좋아한다던 사람은 총구를 이쪽으로 향하고 있을 뿐 쏘지 못했다.
석영은 호란을 허리에 달고도 성큼 움직여 단의 코앞까지 가까워졌고, 그제야 단이 총통을 발사했다.
벼락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석영의 상체가 흔들렸다.
탄환은 어깨에 명중했지만 석영은 꿈쩍도 하지 않고 단의 손에서 총통을 잡아채 내던져버렸다.
“안 돼! 단!”
호란은 석영이 다시 움직이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석영의 허리를 부여잡고 있었고, 옷 한 겹 아래서 기운과 호흡이 어떻게 흐르는지 느낄 수 있었다.
거석의 거칠고 단순한 기운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이것도 기결이라면 기결이었다.
땅에 발을 디디고 팔을 몸통에 붙이면서 호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마음은 이게 아니라고 외쳤지만 몸이 그냥 움직였다.
살기를 담아 꽉 쥔 주먹이 석영의 옆구리를 향해 곧게 뻗었다.
단을 향해 손을 치켜들던 석영이 곧바로 몸을 뺐다.
호란의 주먹은 허공만 찔렀다.
석영은 크게 뛰어 두 사람에게서 물러섰다.
“호란.”
석영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방금 나를 죽이려고 한 거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