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52
052화
* * *
윤지관의 총령전은 화려하고 거대했다.
당 위에는 총령좌가 치워지고 상석 셋이 놓였다.
당 아래 앞쪽에는 땅인들, 뒤쪽에는 하늘인들이 도열해서 위가 당도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현은 가운데 자리로 오르면서 호란을 뒤에 시립하게 했다.
사람들이 일제히 예를 올렸다.
호란이 괜히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시현이 손짓을 했다.
호란이 귀를 가져다 대자 시현이 작은 소리로 귀띔했다.
“호란, 무릎을 펴라.”
“아, 네.”
“자유롭게 행동하면 좋다 생각했는데, 조금은 예법을 가르쳐둘 것을 그랬구나. 너는 내 수행이니 총치와 총령 앞에서도 꿇을 필요가 없다. 네가 내 얼굴이라 생각하고 당당하게 행동하거라.”
“네!”
호란은 바짝 정신을 차렸다.
시현이 저를 굳이 여기까지 데려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약점은 숨기고 강한 입장을 만들어야 했다.
호위의 예법은 미처 못 배웠지만 호란에겐 훌륭한 본보기가 있었다.
경인 나으리 뒤에 선 추선처럼 하면 된다!
숨을 한 번 가다듬은 후 호란은 세상에서 제일 거만한 사람으로 변했다.
때맞추어 총치와 총령이 들어와 시현에게 예를 했다.
회의의 시작은 성 주위에 나타난 수십의 흰 거석과 돌 인간에 대한 길고 긴 보고였다.
중간에 호란도 자신이 석영과 싸운 일을 보고했다.
본격적인 논의로 넘어가자 금방 분위기가 거칠어졌다.
호란은 점잖으신 땅님들이 쉽게 격해지는 데 놀랐고, 시현이 한술 더 뜨는 데는 더 놀랐다.
평소 호란이 알던 시현은 법도를 그림으로 그려낸 것 같은 사람이었다.
말과 행동이 항상 차분하고 고요했다.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윤지관 관인들을 상대하는 시현은 정반대였다.
남의 말을 거침없이 끊고, 말꼬리를 잡아 면박을 주고, 대놓고 불쾌한 낯을 보였다.
그러다가도 누가 뜻에 맞는 말을 하면 반색을 하며 부추겼다.
한 용감한 사람이 호란이 돌 인간들과 내통했을 가능성을 제시하자 시현은 “내가 사람 보는 눈을 믿지 못하는가”고 물어서 바로 입을 다물게 했다.
호란이 생각해도 완전 반칙이었는데 그게 또 통했다.
듣다 보니 호란에게도 이야기의 흐름이 보였다.
전에 모인 땅인들은 세 가지 주제를 온통 뒤섞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래서 이게 다 누구 탓인가’
시현은 세 번째 주제로 이야기가 쏠리는 것을 막으려고 힘을 다 쓰고 있었다.
그런데도 툭하면 논의가 그쪽으로 휘몰아쳤다.
땅인들은 하나같이 책임 돌릴 사람을 찾아 눈이 벌게져 있었다.
호란의 등에 진땀이 흘렀다.
시현이 미리 일러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 아수라장에 대고 “돌 인간이 우릴 공격하는 건 다 땅님들 책임이에요. 땅님들의 마법 때문에 세상이 망할 거래요!”라고 말해버릴 뻔했다.
그랬다간….
어떻게 됐을지 상상은 안 간다.
어쨌든 결과가 무서웠을 것이다.
잘못하면 윤지관의 땅인 모두, 더 잘못하면 온 세상의 땅인 모두를 적으로 삼을 뻔했다.
이제 호란에겐 앞에 앉은 소년이 수호신처럼 보였다.
당장 앞에서 벼슬아치들 상대로 불퉁대고 어깃장을 놓는 모습마저 큰 뜻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렴 있을 것이다.
난맥상이 이어지는데 길사의 녹색 관복을 입은 이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선두에 선 대길사가 보고했다.
“피해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곳곳에 흰 거석이 일어섰던 자리가 모두 메마른 모래 수렁으로 변했습니다. 자라던 작물은 모조리 말랐고, 땅이 꺼지고 갈라진 곳도 숱합니다. 저희가 보니 수맥도 끊어졌습니다.”
총치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예 못 쓰는 땅이 되었단 말이오?”
“물만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땅의 기운이 함께 상했습니다.”
전 안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길사들이 세세한 피해 상황을 보고하자 소란은 더 커졌다.
윤지관의 관료들은 하나같이 지주 집안이었다.
다들 제 집안 땅이 얼마나 상했는지 떠들고 통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현은 잠자코 그 모양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가 침묵하는 것은 그것대로 영향을 발휘했다.
총치가 몇 번 눈치를 보더니 결국 헛기침을 하며 사람들을 꾸짖었다.
“자기 땅 상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오! 대책이 먼저지. 낯부끄러워서, 원….”
시현이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오.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소. 특히 땅 가진 병사들의 동요가 클 텐데. 상황을 잘 알아야 민심을 수습하지 않겠소.”
다들 낯빛이 변했다.
호란도 바로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곳의 하늘인들이 땅인에게 충성하는 것은 땅을 받아서였다.
땅덩어리 자체는 의미가 없다.
땅인의 체제를 유지시킴으로써 하늘인들이 지키고자 하는 건 반민에게서 소작료 걷을 권리였다.
하지만 땅이 황폐해져서 소작료가 나오지 않는다면?
농사지을 반민들이 뿔뿔이 흩어진다면?
남운관이나 치풍관 일이 남의 얘기가 아닐 거였다.
하늘인 중 유일하게 앞열 가까운 데 서 있던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발언했다.
머리의 색 띠가 두 줄인 것을 보면 큰머리였다.
“문께서 바로 통찰하셨습니다. 특히 남쪽과 서쪽은 변고 있던 날에도 피해가 컸던지라 몫꾼들의 불만이 쌓여 있습니다. 서둘러 피해 구제책을 내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관인 하나가 시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법술로 지기를 복구하면 어떻겠습니까? 문께서 도움을 주시면, 마력석을 덜 들이고도 많은 땅을 살릴 수 있을 터인데….”
“도울 일은 마땅히 돕겠소. 헌데.”
시현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덧붙였다.
“마력석의 작은 법력으로 물과 기운을 모아들이면 주변의 땅에 안 좋은 영향이 가지 않겠소? 마력석을 부수어 땅 밑에 묻어두고 물을 부으며 천천히 지기가 돌아오게 하는 게 낫다고 보오만.”
시현의 말에 관료들이 가타부타하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복구를 하려면 몇 달은 걸립니다! 병사들이 못 참고 들고 일어날 겁니다.”
“문께서 하신 말씀도 맞지 않소! 인접한 땅까지 수확이 줄면 그건 누가 책임지고?”
말하게 내버려두니 이야기는 금방 다른 데로 튀었다.
땅을 복구할 마력석을 누가 얼마나 내놓느냐, 누구 땅을 우선 복구할 것이냐 끝이 없었다.
호란은 슬슬 거처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말 못 할 비밀을 쥐었다는 위기감도 시현에게 감동했던 기분도 효력이 다했다.
이대로 반 시진만 더 있으면 자칫 진심으로 추선을 존경하게 될 것 같았다.
겨우 회의가 끝났을 때 호란은 날아갈 듯 기뻐했다.
그런데 총령전의 큰 문이 열리자 거기는 더 수라장이었다.
전에 들어오지 못한 땅인 관인들과 하늘인들이 바깥에 우글우글했다.
고관들이 밖으로 나서자 사람들이 사탕에 모이는 개미 떼처럼 달라붙었다.
저마다 질문을 하고 청을 늘어놓는 것이 시장바닥보다 더했다.
다행히 예법상 문에게는 함부로 말을 걸 수 없는지 시현에게는 다가붙는 사람들이 없었다.
대신 수많은 사람이 눈빛만 열렬히 쏘아 보내며 거리를 두고 졸졸 따라왔다.
호란은 예법이란 게 왜 필요한지, 어째서 시현이 사람과 눈을 안 마주치고 직진하는 기술을 익혀야 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월대의 계단 앞에는 특히 커다란 소란이 벌어져 있었다.
주인공은 나이가 많이 들고 아주 고상하게 차려입은 땅인 여성이었다.
외견만 보면 점잖은 사람인데,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지팡이를 휘두르며 ‘오줌 자리도 못 가리는 개아들 개딸 놈들’을 과격한 언사로 욕하고 있었다.
땅님들이 하는 정치란… 호란이 생각한 것과 정말 많이 달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현이 그 여성에게 다가갔다.
여성을 뜯어말리던 사람들이 좌우로 흩어졌다.
시현은 노인의 몇 걸음 앞에 멈추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스승님, 강녕하셨습니까.”
노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낮게 말했다.
“시문이신가…. 장성하셨구려….”
“이제껏 문안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시국이 화급하여….”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노인이 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시국! 시국 말씀 잘하셨소! 이 시국에 서격원 오라질 것들이 마력석으로 골패 놀음을 하겠다는데. 시문께선 한 발 걸치고 구경이나 하고 계신다면서요?
그러실 거면 무엇 하러 문이 되셨습니까? 지니신 격이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막 나가는 언사에 주변에서 기겁을 하면서 노인을 말렸다.
노인은 한 번 더 소리 높여 호통을 쳤다.
“문안 필요 없으니 어디 가서 제 제자란 말씀만 말아주십시오! 무얼 가르쳤느냐고 대대손손 망신이 전해질 판입니다!”
노인은 등을 돌리더니 지팡이로 땅을 탕탕 찍으며 가 버렸다.
그 뒤에 대고 시현이 다시 예를 올렸다.
주위는 잠시 조용했다가 배로 시끄러워졌다.
호란은 억울해서 발이 저절로 굴러질 지경이었다.
치풍관 땅님들이 잘못해도 시문 님이 욕을 먹고, 윤지관 땅님들이 잘못해도 시문 님이 욕을 먹고.
대체 무슨 일이 이렇게 돌아간단 말인가.
하지만 시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때 흰 대창의를 입은 중년 여자가 앞길에 나타나 거리를 두고 섰다.
시현이 시선을 주고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읍하고 다가와 발을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문을 뵙습니다.”
“회의가 길었는데, 어찌 밖에서 기다렸는가. 지금 서격원도 한창 바쁠 텐데.”
“아무래도 조바심이 나서… 흰 거석의 습격 이후 서격원 시험에 대해 여론이 급격히 안 좋아졌습니다. 마력석을 아껴야 하지 않느냐고 사방에서 항의가 들어옵니다.”
“그럴 만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저희가 급하게 논의를 해보았습니다만. 그 시험을 말입니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호란은 조금 안심했다. 드디어 이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시험을 포기하려나 싶었다.
상대의 입에선 엉뚱한 말이 나왔다.
“반대하는 여론이 더 모이기 전에, 하루라도 앞당겨 시험을 쳐버리면 어떨까요? 수험자가 많지 않으니 바로 전갈하면 가능합니다.”
시현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호란은 시현이 긴 소매 아래에서 주먹을 쥐느라 어깨가 부르르 떨린 것을 보았다.
시현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할 수 없고, 서격원을 닫겠다’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조금 기대되고 조금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시현은 이 말만 했다.
“이런 곳에서 논할 일이 아닌 것 같네.”
“그렇…지요. 원에 자리를 마련할까요? 지금도 사람들이 꽤 모여 있습니다.”
“되도록 빨리 가겠다.”
시현이 말하자 대창의를 입은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물러났다.
총령부를 나서자 바로 앞에 함씨가의 크고 호화로운 수레가 대령해 있고 단이 곁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치료는 잘 받은 모양이었다.
시현은 이번에도 호란과 단을 같이 수레에 타게 했다.
수레가 출발하자 시현이 입을 열었다. 피로한 기색이었다.
“나는 이제 다른 논의를 하러 서격원에 가야 하는데….”
또 회의가 있다고 생각하니 호란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시현은 호란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댁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겠다. 너희는 그대로 거처에 가서 쉬거라. 일이 없으면 출입하지 말도록 해라.”
윗전의 사려 깊음에 호란의 마음이 뭉클했다.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어제보단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감격한 나머지 호란의 입에서 말이 불쑥 나왔다.
“시문 님, 단이 격 시험 못 치게 막을 방법을 안대요.”
시현과 단이 둘 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호란을 보았다.
단이 소리쳤다.
“야 이 배신자야! 내가 언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