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54
0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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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후계 문제는 함씨 가주 함원규의 큰 골칫거리였다.
그에게는 젊어서 자식이 셋 있었다.
첫째는 어릴 적부터 될성부른 대갓집 망나니였다.
둘째는 소심하고 허약하여 강단이라곤 없었다.
둘 다 집안 말아먹기 딱 좋은 관상이라 원규는 일찌감치 마음을 거뒀다.
마지막으로 얻은 셋째가 빼어난 자질과 온 집안을 휘어잡을 성질머리를 타고났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키웠는데 격을 얻자마자 웬 남방 것하고 눈이 맞더니 후계 자리를 내버리고 온강을 떠나버렸다.
원규는 딸이 남방에 가보면 정신을 차리리라 생각했다.
까다롭고 독불장군인 그 성미에 금방 이혼하고 돌아올 것이고, 그러고 나면 아비한테 고분고분해지겠거니 여기고 잡지 않았다.
딸은 돌아오지 않았고 원규의 평생 한이 되었다.
이제 자식을 빼고 후계를 골라야 했다.
그는 방계 후계도 양자도 원치 않았다.
첫째와 둘째에게서 얻은 손주들을 신중하게 재며 후계를 골랐다.
그렇게 겨우 한 아이가 준비되었는데 하필 격 시험을 앞두고 변고가 난 것이다.
평시면 모를까, 세상도 집안도 뿌리째 흔들리는 이런 때에는 반드시 후계가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명문 함씨가의 후계로 격 없는 이를 세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원규는 예정대로 시험을 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마음을 먹었으니 일은 될 것이었다. 되어야 했다.
아무도 그가 하는 일에 감히 토를 달고 방해를 할 사람이 없었다.
지금 눈앞에 선 손주 아이 아니고서는.
원규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래연이 와서 그의 팔을 잡았다.
“원규,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오, 들어가서….”
“듣기 싫소!”
원규는 부인의 손을 뿌리치고 시현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가 삿대질을 하며 고함쳤다.
“내가 산 같이 물자를 모아 남운관에 지원 보낸 것이 오늘 새벽이다! 할아비가 무슨 말을 들어가며 그 일을 했는지 아느냐! 지금이라도 사람을 보내 되돌리려면 못 할 것 같으냐!”
시현은 공손하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조부를 보았다.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베푸신 은혜이니, 거두시는 것도 할아버지 뜻입니다. 다만 사려해 주십시오. 할아버지께선 진심으로 남운관을 위해 은혜를 베푸셨고, 저는 진심으로 윤지관에 도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처음 진심을 생각하시고, 제 진심을 헤아려주시면 더 바랄 바가 없겠습니다.”
“아아, 끝까지 네가 잘했다는 것이구나! 네가 하는 일은 온강에 좋은 일이고, 내가 하는 일은 나쁜 일이고? 그게 네 속생각이지, 그렇지?”
원규가 호통치고 빈정대어도 시현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두려움도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양이 셋째가 제게 대어들던 것과 찍어낸 듯 똑같아서 원규는 더 분통이 터졌다.
경이가 혼인하여 집 나간 것이 저 비슷한 나이였다.
딸이 낳은 자식이 어느새 그때의 딸만큼 컸다.
깨달았더니 갑자기 기운이 쪽 빠졌다.
원규가 식식거렸다.
“오냐, 오늘은 실컷 너 하고픈 대로 했구나. 어디 끝까지 네 뜻대로 되는지 보자. 여기가 너와 네 아비 행세하던 남운관 촌구석인 줄 아느냐! 할아비가 네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려주고 말 것이다!”
그는 우당탕 소리를 내며 사랑채로 들어갔다.
안에서 무엇이 깨지고 박살나는 소리가 났다.
중당 앞에 서 있던 래연이 지친 듯 기둥을 붙잡았다. 시현이 고개를 숙였다.
“심려를 끼쳤습니다, 할머니.”
“아니야. 아니다, 시이야…. 우리, 우리 시이가….”
래연이 목이 메어 무얼 말할 듯 말할 듯하는데 좌사랑에서 또 한 번 와장창 소리가 났다.
래연은 숨을 훅 들이켜더니 뛰듯이 별당 쪽으로 가버렸다.
시현은 천천히 숨을 내쉰 후 돌아섰다.
가주의 성질을 잘 아는 종과 사용인들은 처음 원규가 호통을 치기 시작했을 때 모두 자리를 피했다.
시현의 시종만이 한쪽에 등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호란이 중문 밖에 동그마니 서 있었다.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를 본 시현이 꽃을 피우듯 활짝 웃었다.
“호란아, 어찌 아직 안 잤느냐. 오늘 네가 힘든 일이 많았는데.”
호란은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했다.
시현이 웃는 얼굴을 하니 더 마음이 안 좋았다.
다가가서 무어라도 말을 걸고 싶은데 중문 안에 들어가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호란이 머뭇거리자 시현이 말했다.
“섰지 말고 이리 오거라. 내가 바로 잠을 못 잘 것 같다. 늦었지만 잠시 산책이나 하자꾸나.”
호란은 냉큼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협문을 향하자 종이 말없이 호란에게 등을 건네고 물러났다.
정원에 이르자 시현이 입을 열었다.
“단은 무얼 하고 있느냐?”
“약 먹고 자요. 여기 사람들이 진통제를 달여 줬어요.”
“많이 다쳤느냐?”
“자기 말로는 별것 아니라고 하는데….”
호란이 말끝을 흐렸다. 시현이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이가 솔직하지를 못하지.”
정말이었다. 호란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시현이 말했다.
“서격원 간 일은 아주 잘되었다. 시험 논의에서 한 발 빼고 있던 사람들이 너나없이 적극적이 되어서 의견을 내더구나. 불만이 있었지만 차마 반대를 못 하고 있던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던 모양이다.”
“그럼 단이 말한 대로 되는 거예요?”
“되다 뿐이냐. 별일이 없으면 놔두어도 순리대로 흘러갈 듯하다.”
시현은 개운한 얼굴이었다. 그가 감탄조로 말했다.
“단이 참… 대단하지 않으냐?”
“진짜 대단해요! 단처럼 똑똑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호란은 흥분했다가 밤이란 걸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낼까요? 신기해요.”
“단은 자질을 타고났고 모든 일에 치열하게 매진하지. 자연히 빼어남에 이른다. 그런 이들이 드물게 있다.”
시현은 표현을 신중히 고르느라 천천히 말했다.
원래 그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다른 이를 평하는 말을 하면 안 되었다.
좋은 말도 나쁜 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현은 제가 조금이나마 호란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곁에서 제게 속도를 맞추어 걸어주는 소녀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좋은 말은 좋은 뜻으로, 걱정하는 말은 걱정하는 뜻으로 듣고 무엇을 부러 헤아리지 않을 것이다.
시현은 조금 더 속내를 꺼냈다.
“다만… 단의 견식과 생각은 단지 노력했다고만 하기에는 규격을 벗어난 데까지 닿는구나. 그렇게 된 데에 하나하나 어려운 사연이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호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은 알기 어려운 사람이었고 그만큼 마음 쓰이는 사람이었다.
시현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본래라면 단이 낸 방도가 큰 공이 되었으니 상을 내려야 하는데, 어째선지 일을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단도 도리어 화를 낼 것 같다.”
“맞아요. 엄청 싫어할 거예요.”
호란은 웃었다.
단과 이유는 다를지 몰라도, 호란 역시 무슨 일을 해냈다고 상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시현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고 언젠가부터 호란은 자신이 그 일을 같이 하고 있다 여겼다.
시현이 갈 길을 정하고 할 일을 정해도 그 일을 하는 것은 호란의 뜻이었다.
어느 날 그렇게 결심한 것이 아니라, 함께 여기까지 오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호란은 그런 생각을 시현에게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정원 한쪽에는 연못이 있고 가운데 정자가 있었다.
단이 매번 보기만 해도 성질이 뻗친다고 말하는 연못이었다.
요즘 세상에 집안에 관상용 연못을 두는 사치는 대운관 훈작 사족들도 안 할 짓이라 했다.
시현은 앞장서서 다리를 건넜다.
멀찍이서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종은 다리 앞에 머물렀다.
사방이 트여 있었으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한 누가 엿듣기 어려운 장소였다.
정자 가운데 이르자 시현은 본론을 꺼냈다.
“석영의 일로 마음이 많이 아프지는 않았느냐? 네 눈앞에서 서슴없이 그를 쳤으니 나를 원망했을지도 모르겠다.”
호란은 놀라 말했다.
“아니에요! 그때 시문 님이 안 오셨으면 단은 잘못하면 죽었어요!”
잘못하면이 아니라 틀림없이 죽었다.
호란은 석영에게서 단을 지킬 수 없었다.
그 생각에 호란의 얼굴이 굳어지자 시현이 미안해했다.
“공연히 말을 해서 네 마음이 더 상하는구나.”
“아뇨….”
“또 생각하게 해서 미안하다만, 세상의 끝에 대해 석영이 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자세히 들려줄 수 있겠느냐.”
호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시문 님. 오늘은 쉬세요. 시문 님도 피곤하시잖아요. 그 많은 흰 거석을 다 없애고, 사부… 석영이랑 싸우고, 회의도 두 번이나 하시고.”
시현이 기운 없이 웃었다.
“피곤하기는 피곤하지. 그런데 전부 하잘것없는 일에 진을 뺀 것이다. 세상이 망한다는데… 마력석 어디에 쓸지, 땅 한 뙈기를 어떻게 고칠지, 한 사가의 후계에게 격이 있느니 없느니, 이런 일에 내내 시간을 들였구나. 어찌 이대로 쉬겠느냐.”
“시문 님, 오늘은 쉬세요.”
호란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사부 일로 속이 상해서 이야기하기 싫은 게 아니었다.
호란은 낮에 시현에게 이야기를 할 때 일부러 빼놓고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결국 해야 할 이야기였지만 하루라도 늦게 하고 싶었다.
오늘 밤만이라도 소년이 모른 채 쉬길 바랐다.
시현은 물러나지 않았다.
“해가 뜨면 또 똑같이 하잘것없는 일에 끌려다녀야 할 것이다. 이야기해다오, 호란. 낱말 한 개, 토씨 한 개도 빼놓지 말고. 네 사부가 한 말을 전부 다시 해다오.”
호란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이왕 이야기하기로 한 것, 시현이 원하는 대로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가며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결국에는 ‘특출한 마법사가 나타나면 균형이 크게 뒤틀린다’는 이야기까지 다 했다.
호란이 눈치 보는 기색을 알고 시현이 웃음을 지었다.
“그 말을 하기가 어려웠느냐. 말하지 않아도 짐작한 바니 마음 쓰지 말거라. 내가 어려서 글자 읽기보다 먼저 기운 읽는 데 통했다. 문에 이르기 전부터 온갖 과목의 법술에 세상 기운을 숨 쉬듯 퍼다 썼다.
기운 쓰는 것이 해악이라면 근 백 년간 나만 한 해악이 없겠지. 누군들 짐작을 못 하겠느냐.”
“해악이라뇨….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호란이 안타깝게 말했다.
“아시죠?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시문 님 탓이 아니에요.”
“안다.”
시현은 생각보다 가뿐하게 답했다.
“석영이 ‘대처를 했는데도 문이 났다’고 말했다 했지. 그 대처란 게 무엇일지 짐작하겠다.
비가 갑자기 줄어든 것이 300여 년 전이다. 점차 큰 강이 사라졌고, 거석은 250여 년 전부터 나타났다. 그나마 있던 물이 더 줄고 기운이 말라 들기 시작한 것은 최근 50여 년 사이다.
돌 인간은 이미 오래전에 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문이 났든 안 났든 결국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시기 차이야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만.”
시현은 조금 생각하더니 미간을 찡그리며 이상한 얼굴을 했다.
“온 세상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면서, 저들이 일하는 것이 너무 느리다. 그렇지 않으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