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55
055화
* * *
그 말에 뭐가 생각난 호란은 서둘러 말했다.
“어. 그게, 사부가 평소 하는 게 딱 그랬어요. 느려요. 고민도 오래 하고 결정도 미루고 시간 감각도 없고요. 저한테 뭐 준다고 하고서 삼 년 있다 준 적도 있어요. 저는 너무 오래돼서 다 잊고 있었는데 사부는 바로 엊그제 약속한 것처럼 말하더라고요.”
시현이 팔짱을 끼었다.
“내 생각엔, 아마 돌 인간은 생명이 없으니 죽지도 않겠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르지만 오래된 존재라 짐작해도 그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엄청나게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면 느리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자기들의 운명이 걸린 일마저 이렇게 느리게 진행한다는 것은 말이다…. 가볍게 단정할 일은 아니다만.”
시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멸망이란 게 당장 목전에 다가온 일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럴지도요!”
호란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세상의 끝까지 시간이 있다면 파국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이다.
반대로 시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말했다.
“그러나, 정말로 그들에게 수백 년 이상의 시간이 있었다면 돌 인간들은 멸망을 막기 위해 얼마든지 다른 길을 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무고한 이들을 해치고 희생을 해가며 이룰 일이 아니야.”
“맞아요.”
“비단 이번 일뿐이 아니다.”
시현의 표정이 더 험해졌다. 그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비가 줄고 강이 마르면서 수백 년간 무수한 사람이 굶어 죽었다. 역대 법술사들이 줄곧 원인을 연구해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제 보니 자연의 섭리 밖에서 돌 인간들이 인위로 행한 일이라 그랬던 것이다.
땅 위에 물이 모자라니 땅 밑에서 물을 끌어 올리는 데 법술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길을 틀어쥔 땅인 위정자가 무도하게 행동해도 백성이 그저 따라야 했다. 다들 살기 위해 법술 연구에 매달렸고 세상의 재화가 모두 땅인에게만 집중되었다.
이게 다 무어냐. 기운을 쓰지 않게 한다는 그들의 목적에도 맞지 않고, 공연히 세상의 고통만 가중시킨 것 아니냐.”
시현의 목소리에서 억울함과 분기가 느껴졌다. 호란도 분했다.
호란은 태어나서 한 번도 강을 본 적이 없었다.
전해지는 노랫말에서만 들었다.
듣기로 강이란 아무리 써도 다 못 쓸 물이 넘치고 물 안에도 물 밖에도 먹고 쓸 것이 넘치는 낙원 같은 곳이었다.
왜 없어졌을까, 지금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만 누군가가 일부러 빼앗아갔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시현이 다시 말했다.
“세상이 끝에 이르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러나 그를 위해 돌 인간들이 택한 길 무엇 하나 이치에 맞는 것이 없다.”
“그럼 우리가 끝을 막아요!”
호란이 주먹을 쥐며 소리쳤다.
“저도 생각 많이 했어요. 사부는 사부 말을 들으면 저랑 동생은 살려준다고 했지만 대체 그게 뭐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돌 인간들이 틀렸어요. 일단 걔들하고 싸워서 이기고, 그 담에 우리가 끝을 막아요! 할 수 있어요!”
시현은 말없이 호란의 눈을 보았다.
천천히, 그의 얼굴에서 분하고 가슴 아픈 기색이 걷혔다.
시현은 잔잔하게 웃었다.
“그래. 그러자꾸나. 같이 방법을 찾도록 하자.”
시현은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약간 모자란 반달이 낮은 하늘에 걸려 옅은 빛을 내고 있었다.
호란도 같은 곳을 보았다.
바람인지 무엇인지가 물가를 스치며 찰박찰박 소리를 냈다.
모난 곳이 많은 세상이었지만 내일 끝날 것은 아니었다. 더 살아갈 수 있었다.
12. 계승
솔직한 심정으로, 호란은 석영이 아주 크게 다쳤기를 빌었다.
시현이 석영에게 명중시킨 마법은 하나하나가 무서운 기세를 품고 있었다.
암장을 쳤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위력이었다.
일순 석영이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
석영은 살아서 도망쳤지만 부상이 클 것이다.
바로 전장에 복귀 못 할지 모른다.
잘하면 모든 일이 잘 해결될 때까지 꼼짝 못 할 수도 있다.
석영과 시현 양쪽에게 죄책감이 느껴지는 생각이었지만 호란은 제발 그러기를 빌었다. 진심이었다.
하지만 호란의 기대는 곧 스러졌다. 다음 날 바로 습격이 재개되었다.
석영 자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열 개의 흰 거석이 동시에 성을 습격해왔다.
이번에는 윤지관 병사들이 좀 더 침착하게 대응했다.
마력석을 가진 땅인 법군도 대기하고 있어 인명 피해 없이 거석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거석이 일어난 땅이 말라붙고 피해가 생기는 건 여전했다.
거석은 어제 생긴 모래 수렁 여럿 중에서 무작위로 일어섰는데, 새로 거석이 일어난 장소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모래 수렁이 커졌다.
“아주 고약하다. 차라리 크기가 더 크더라도 황무지에서 일어서는 거석이 낫지….”
제 처소에 단을 불러놓고 시현이 한탄했다. 단이 물었다.
“출몰 위치가 고정되면 병사들이 대응하기는 좀 낫지 않나? 아무 데서나 불쑥불쑥 솟는 것보다야.”
“일견 그렇다만, 온강의 토지 상황이 문제다.”
단이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하긴, 이 동네는 병사 삼분지 이가 사병이지. 가뜩이나 따로 놀던 놈들이 아주 콩가루 판을 벌이겠네.”
법군의 전력이 바닥을 친 현 상황에서 윤지관군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각 대갓집이 거느린 하늘인 사병이었다.
만일 어느 집안 땅이 피해를 입을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모든 집안의 병사들이 공동운명체가 된다.
하지만 한번 피해 입은 곳에서만 계속 피해가 이어진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피해가 없으면 없는 대로, 이미 피해를 당한 쪽은 또 그쪽대로 몸을 사릴 이유가 생긴다.
더불어 첫날 제 땅에 피해를 입은 병사들, 피해 지역에 인접한 농토의 지주들은 불만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서둘러 대응을 해주어야 했다.
“하여 미봉책으로나마 당장 일부 토지의 지기 복구에 들어가기로 되었다. 다만 아직 석영을 처치하지 못하였으니 마력석 소모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래서 네게 청이 있는데.”
시현이 본론을 꺼냈다.
“치풍관에서 한 것처럼 화포를 만들어 거석을 상대하면 좋겠다. 네가 여기 사람들에게 기술을 전하고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
“화포를?”
“그래. 그리해두면 당장은 물론 우리가 떠난 뒤나 마력석이 소진된 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병기감 관료들에게 타진해 두었다.”
“그을쎄…. 치풍관 때하고는 많이 다를 건데.”
단은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치풍관에서 화포가 먹히겠다고 생각한 건 그 동네 지형 때문이었어. 거석들이 좁은 산길로 잔뜩 몰려왔으니까 집중 사격이 유효했지, 원래는 포라는 게 그렇게 쏘는 대로 맞는 물건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방이 트여 있고, 흰 거석은 다 따로따로 움직이잖아. 초짜 포병들이 어설프게 쏴 봐야 맞는 것보다 빗나가는 게 더 많을걸. 포탄이 농토나 인가에 떨어지면 그것도 보통 피해가 아니야.”
“그러하냐….”
시현은 잠시 고민했지만 마음을 정하고 다시 부탁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느냐. 일단 패를 한 가지라도 더 갖추어놓고, 사람들에게 각자 생각을 내어 활용할 기회를 주면 차차 이 장소에 맞는 운용 방식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뭐…. 알았어. 여기 사람들하고 얼마나 말이 통할지 모르지만 시도는 해볼게. 마침 내가 만들려고 생각한 것도 있고.”
“고맙다. 큰 도움이 되겠다.”
시현은 화색을 보이며 사람을 불러 단을 병기감으로 안내하도록 했다.
단이 나간 뒤 시현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란은 지금 저택에 없었다.
흰 거석이 나타나면 바로 대응하기 위해 관병들과 조를 짜 성 밖을 순찰 중이었다.
석영이 나타날까 걱정이 되었지만 호란이 더는 단독 행동을 않겠다 약속했으니 괜찮기를 바라야 했다.
석영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소진하기에는 시현이 너무 바빴다.
조부는 서격 기준 논의를 원점으로 되돌리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압력을 넣고 있었다.
논의에 진전이 없으면 곧 태세가 허물어질 것이니 계속 서격원에 들르면서 방향을 이끌어야 했다.
지기를 복구하는 데 직접 손을 쓰고, 길사들에게 주위의 피해가 적은 방식을 가르쳐야 했다.
총치전에서는 아직도 관료들이 모여 누구 땅을 먼저 복구할지로 다투고 있을 것이다.
생각이 있다면 병사들의 땅부터 챙길 것이나 아예 맡겨두기도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화기도감의 책임자이면서 화포 늘리는 데 소극적인 군기시 도제조에게 한 번 더 다짐을 두어야 했고….
헤아리다 보니 아직 한낮인데 진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우선 갈 곳을 정한 시현이 방을 나서려는 차였다. 종이 문전에 들어 대길사가 왔다 전했다.
그가 시현을 찾아왔다는 것은 복구할 농토가 다 정해졌다는 뜻이었다.
하나라도 시름을 던 시현은 서둘러 대길사를 처소에 들였다.
그런데 방에 드는 대길사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가 머뭇거리며 고했다.
“지기를 우선 복구할 곳이 정해졌습니다. 관병들 땅이 많은 남쪽에서 세 곳, 서쪽과 북쪽, 동쪽에서 사병 소유지 중심으로 두 곳씩입니다. 다만….”
결론만 놓고 보면 더없이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대길사는 면목 없어 하는 얼굴로 사정을 털어놓았다.
“다만… 복구에 쓸 마력석이 잘 모이지가 않습니다. 처음에 마력석을 내놓기로 한 각 집안에서 말을 바꿨고, 총치부도 갑자기 소극적이 되었습니다.”
시현은 눈을 감았다.
어째서 일이 이리되었는지 물어볼 것도 없었다.
조부였다. 서격원 쪽이 아니라 이쪽에서 치고 들어왔다.
현재 온강에서, 땅인들의 마력석 출자는 눈치싸움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 집안이 내놓으면 발언권이 약해질까 자기도 내놓고, 다른 집안에서 마력석을 아끼면 자기도 아꼈다.
각처에 쓸 곳이 많았으나 어디에는 마력석이 남도록 돌고 없는 곳엔 씨가 마르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번 일도, 함씨 집안이 먼저 손을 빼니 눈치를 보다가 다 같이 물러났을 것이다.
관의 일에 마력석을 출자할 만큼 부와 세가 큰 집안은 모두 소유지가 드넓어 농지의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체감이 잘 안 될 터였다.
그러나 지금 농토를 돌보는 것은 당장의 피해를 따져서가 아니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한번 꺾이면 땅보다 되살리기 어려웠다.
조부라고 모를 리가 없다.
그는 먼저 시현의 뜻을 꺾어놓고 나중에 손을 써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사람 마음 움직이는 것은 그런 계산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조부는 마음이 아니라 돈을 움직여서 일을 하는 사람이라 그를 잊은 것이었다.
시현은 감았던 눈을 떴다.
몇 간 건너 사랑채에 도사리고 앉아 자신이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조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방 한쪽에 쌓인 마력석 상자들을 보았다.
이후의 여행에 쓰라고 조부가 건넨 것이었다.
시현은 길사를 보았다.
“여기 올 때 함께 데려온 길사와 관인이 있겠지. 모두 몇인가?”
“소길사와 잡관까지 하면 아홉 명은 됩니다.”
“다들 믿을 만한 사람들인가.”
“그렇습니다만….”
시현은 마력석 상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와서 저것들을 날라 가게 하라. 모두 마력석이다.”
대길사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시현은 방문을 열고 밖에 선 호위를 불러 명했다.
“바로 호위 대열을 꾸려라. 성 밖에 지기를 복구하러 가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