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56
056화
* * *
조부가 정면으로 날을 세워온 상황에서 함씨가의 사병들을 데리고 움직이는 것이 마뜩잖기는 했다.
그러나 관병으로 호위를 꾸린다고 시간을 들이면 또 무슨 방해가 들어올지 몰랐다.
당장 쓰려는 마력석도 따지고 보면 조부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어차피 관병이든 다른 집안 사병이든 조부의 입김이 안 닿는 데가 없으니 서둘러 움직이는 쪽이 나았다.
호란이 곁에 있었다면 든든했을 텐데.
보나 마나 밉상을 부리겠지만 단이라도.
저절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시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람을 가리지 않는 것을 법도라 여기고 항시 공평무사를 몸에 새기려 애썼다.
막상 큰일을 맞으니 법도고 무엇이고 제가 그럴 그릇이 못 되었다.
시현은 가장 먼저 윤지관 남쪽을 향했다.
남쪽은 변고가 있던 날에도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흰 거석의 피해도 커 대처가 시급했다.
첫 예정지는 대로에 인접한 토지로 두 개의 커다란 모래 수렁이 맞닿은 곳이었다.
시현은 쪼그려 땅에 손을 대고 잠시 기운을 읽었다.
다행히 땅 깊은 곳에는 지맥도 수맥도 살아 있어 잘만 연결하면 주변 농토의 물과 기운을 빼앗지 않고도 복구가 가능할 것 같았다.
“그 석영이란 자가 하는 것이 교묘하구나. 본디 기운은 물을 끌어당기고 물은 기운을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어 물기가 고루 깃든 땅에서는 거석이 일어나기가 어렵다.
석영은 먼저 물을 땅속 깊이 끌어내리고 제 기운과 땅의 기운을 함께 써 거석을 일으킨 듯하다. 땅에 물을 되돌리되 지맥과 수맥의 기운을 함께 이어 기운과 물이 서로를 토대 삼게 해야 일이 온전할 것이다.”
대길사가 직접 마력석 함을 들고 와 열었다.
시현은 소매를 걷고 개중 굵은 돌을 쥐었다.
전시효과를 겸하여 하는 일, 마력석을 아끼지 않을 셈이었다.
다만 말이 전시효과지, 기운과 물을 되돌리는 것은 눈에 보이는 볼거리는 아니었다.
주위 땅에 피해가 안 가게 조심하려니 시간도 걸렸다.
그래도 땅의 맥이 살아나면서, 갈라지고 꺼졌던 땅이 부풀어 촉촉해지고 갈색 윤기가 돌아오자 지루한 얼굴을 하고 있던 호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땅 주인인지 초조한 얼굴로 지켜보던 하늘인 몇은 소리를 치며 좋아하고 시현에게 절을 올렸다.
다음 장소로 발길을 옮기면서 시현은 살짝 의아함을 느꼈다.
딱히 사람을 금한 바가 없는데도 주위에 들여다보러 모이는 사람이 생각보다 적었다.
별 볼거리야 없다 해도 땅 가진 이들은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터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것도 조부의 뜻이 닿은 일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곧 털어버렸다.
조부와 위세 싸움을 할 마음은 없었다.
관성 주위를 돌며 복구를 계속하다, 다섯 번째 예정지에 이를 즈음 대길사가 조심스럽게 고했다.
“피로하실 텐데 잠시 쉬시지요. 자리를 깔고 냉차를 올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대길사가 가장 지쳐 보였다.
그는 연로한 사람이었고, 때는 초여름이라 햇살이 제법 셌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다.”
자리를 준비하는 사이 미리 지맥을 읽어두자고 생각한 시현은 모래 수렁으로 다가갔다.
길사 몇이 다가와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지기 보하는 법을 설명하던 중, 시현은 발치에서 느껴지는 기색에 흠칫하고 물러섰다.
길사 중에서도 기운 읽기가 예리한 이들은 모두 낯빛이 변해 있었다.
시현은 몸을 돌리며 크게 외쳤다.
“모두 물러나라! 구덩이에서 곧 거석이 설 것이다!”
구덩이 곁에서 벗어나려던 시현은 뒤늦게 이상함을 깨달았다.
제 주위엔 길사 몇뿐 호위 서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함씨가 호위들은 모두 자리 깐 데 근처를 어정거리며 쉬고 있었다.
마력석 상자를 둔 곳도 너무 멀었다.
낭패였으나 상황을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등 뒤에서 마른 흙이 솟고 거석의 기운이 뭉쳐 형태를 갖춘 것을 돌아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시현은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 죽어라 뛰었다.
보람도 없이 거석의 살기 어린 기운이 등 뒤로 바짝 다가왔다.
시현은 제가 공격을 피해 몸을 날린 것인지 그냥 넘어진 것인지도 구분하지 못했다.
제 머리를 흰 거석의 주먹이 아슬아슬 스칠 뻔했다는 것만 알았다.
바닥을 보고 쓰러진 시현의 바로 위에서 흰 거석의 기운이 활활 타올랐다.
몸을 일으키는 것과 이대로 땅에 수그려 있는 것 중 어느 쪽이 일순이라도 더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지나갔다.
끝이라 여긴 순간 머리 위를 힘찬 기세가 뚫고 지나갔다.
바람과 불꽃과 물줄기를 합친 듯한 강렬한 기운이었다.
떵 하는 타격음이 울리고 거석의 기척이 머리 위에서 물러났다.
다시 한번 기운이 약동하며 거석과 크게 충돌했다.
머리를 울리는 충격파가 전해졌다.
“미쳤어? 호위를 어떻게 하는 거야!”
호란의 화난 목소리가 주위를 쩌렁쩌렁 울렸을 때에야 시현은 제가 산 것을 알았다.
구를 때 잘못 짚은 손목에 뒤늦게 째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흰 거석은 이미 모래 무더기로 돌아갔고 그 앞에 호란이 주먹을 부르쥐고 서 있었다.
그제야 호위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다들 서로 미루고 변명할 뿐 시현과 눈을 마주치려는 이가 없었다.
그를 부축하러 오려는 사람도 없었다.
세상 이치를 알려주겠다는 조부의 말이 새삼 귓전을 때렸다.
조부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이 곧 세상이었으니, 그는 자기 마음이 돌아가는 이치를 시현에게 똑똑히 알려준 셈이었다.
그래도 제 피가 이어진 손에게 이렇게 굴 줄은 몰랐다.
시현은 떨지 않으려 노력하며 일어섰다.
마력석이 지척에 여럿 있는데도 아무것도 아닌 거석 하나에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뻔했다.
사람 하나를 잘못 읽은 탓이었다.
“시문 님! 괜찮으세요?”
호란이 달려와 그를 붙들었다.
온기 어린 사람의 기색이 다가오자 시현은 비로소 갇혔던 숨을 내쉬었다.
“괜찮다. 접질렸으나 별것 아니다. 할 일을 마저 할 텐데 호란 네가 곁을 지켜주겠느냐.”
“네!”
시현이 알아서 잘 걷고 있는데도 호란은 그를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시현도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남은 복구를 끝내는 동안 호란과 호란이 이끌던 관병 대열은 주위를 빈틈없이 지켰다.
하지만 거석은 더 나타나지 않았다.
아까 선 거석은 명백하게 시현 한 사람을 노린 것이었다.
석영이 근처에서 동태를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종적을 쫓을 도리가 없었다.
거처로 돌아온 시현은 흙 묻은 옷을 갈아입으려다 신음을 흘렸다.
아까 구를 때 다친 오른 손목의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보니 손목이 퉁퉁 부어 있었다.
시현은 방문을 열고 종을 들여 옷 갈아입는 것을 돕게 했다.
의복의 정제를 마친 후 그가 종에게 일렀다.
“내가 손목을 다쳤다. 시간이 늦었다만 통증이 심하니 의원이나 의법사를 불러다오. 좌상을 잘 보는 이로 해라.”
“예.”
“차도 한 잔 들여라.”
“예.”
종은 공손하게 대답하고 나갔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차도 들어오지 않았고 의원이 언제 온다는 말도 없었다.
조부가 거두어들인 것은 마력석 지원과 호위만이 아니었다.
시현은 쓴웃음을 흘렸다.
고작 차를 안 주는 것이 무어라고.
평소 남의 대우를 받고 사는 사람이란 이렇게 작은 일로도 꼴이 우스워질 수 있었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단이 처소에 돌아와 있을지 모른다 생각한 시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은 평소 호란의 자잘한 부상을 솜씨 좋게 처치해주곤 했다.
염좌도 어떻게 해줄지 모른다.
방문을 여니 제가 아까 명했던 종이 어디 바쁜 척할 생각도 없이 대청 아래에 얌전히 서 있었다.
시현은 말없이 그를 지나쳐 별채가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협문을 넘기가 무섭게 청지기가 쫓아왔다.
시현의 발길이 향한 방향이 제 기대와 달랐던 모양이었다.
청지기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리마님, 황송합니다. 대감께서 이르시길 출타했다 돌아오고도 어찌 아직껏 문안이 없느냐 하십니다. 많이 노하셨습니다.”
조부의 생각을 알 만했다.
시현은 잠자코 사랑채로 발길을 돌렸다.
그가 방에 들자 불퉁해진 원규가 다짜고짜 핀잔부터 던졌다.
“내가 준 마력석을 온강 땅에 펑펑 들이부었더구나. 그리하면 누가 다시 채워줄 것으로 생각했느냐?”
“감히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제가 생각이 짧아 당장의 일밖에 돌보지 못했습니다.”
시현은 공손히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가 더 변명하지 않았으므로 조손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문안 따위는 핑계이고 아무래도 좋음을 둘 다 알았다.
원규가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을 꺼냈다.
“다쳤다더니 멀쩡해 보이는구나. 어디를 다쳤다는 것이냐.”
“손목을 삐었습니다. 큰일은 아닙니다. 곧 나을 것입니다.”
“보자.”
시현은 소매를 걷어 보였다.
붓기는 아까보다 더 커져 있었다.
생각보다 심한 모양에 원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종을 부르더니 대뜸 소리쳤다.
“무엇 하고 섰느냐! 당장 의법사를 불러라! 아니, 배씨 혁예더러 바로 오라 하라!”
격 지닌 의법사를 제집 종 부르듯 해놓고 원규는 시현에게 말했다.
“할 일을 못 한 호위는 모두 벌했으니 그리 알아라. 할아비가 네게 화가 났으나 너는 귀한 내 손이야. 놈들이 소홀히 구는 데도 정도가 있다. 아주 본때를 보여주었다.”
원규는 거석의 습격 따윈 예상치도 못했다.
그저 길사들 중심으로 함씨가에서 시문 대접하는 것이 처음 같지 않더라는 소문이나 좀 퍼뜨릴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커져 모두가 다 난처해졌다.
시현 또한 그를 짐작하기에 그저 가만히 있었다.
손주가 아무 말을 않는데도 의외로 원규는 성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싫지 않은 코웃음을 웃더니 물었다.
“고집이 아주…. 너는 생긴 것도 하는 것도 네 어미를 딱 닮았어. 아느냐?”
“그런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다소곳한 대답에 원규는 만족한 듯 웃음을 머금었다.
“그 고집으로 일이 될 것이라면 진작 되었지. 허나 여기는 온강이다. 이제까지는 할아비가 네 면을 세워준 것이다. 내가 정말로 마음을 먹으면 서격원에서든 관에서든 말 많던 것들이 싹 조용해질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시현은 눈을 내리깐 채 답했다.
그는 결국 온강에서 외부인이었다.
명분과 실익이 모두 그에게 있다 한들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허나, 네가 정녕 일을 네 뜻대로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원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시현은 원규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동안 눈만 빛내던 원규가 결심한 듯 말을 시작했다.
“네가 그렇게 싫으면 격 시험을 당장 취소할 수 있다. 격 시험뿐이냐, 온강의 마력석을 전부 너 뜻하는 곳에 쓸 수 있다.
온강에 사병을 줄이고 관병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 했느냐? 그렇게 할 수 있다. 너는 왜 온강서 노비제를 폐하지 않느냐고, 노비를 많이 둔 이 할아비가 먼저 나서야 한다고 여러 번 서한을 보냈지. 그것도 마음을 먹으면 이룰 수 있다!”
말을 하는 중에 저가 흥분해서 원규의 언성이 올라갔다.
그러나 점점 커지는 이야기의 규모에도 시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할아버지가 하실 수 있는 일이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째서 제게 말씀하십니까.”
“아니! 모두 네게 달린 일이다.”
원규가 힘있게 말했다. 노쇠한 얼굴에서 눈빛만이 등잔불처럼 활활 불탔다.
“네가 내 후계가 되거라. 완씨를 버리고 함씨 가문을 잇거라. 그리하면 모든 게 네 뜻대로 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