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60
060화
* * *
권기는 중견 무가 천씨 집안의 둘째로 나이는 서른넷이었다.
이미 두 번 시험을 쳤지만 지 격에를 못 이르고 떨어져 집안 후계에서도 괜찮은 벼슬자리에서도 한참 멀어진 입장이었다.
마력석까지 쓰며 삼수를 했는데 또 떨어지면 앞으로 얼굴을 들고 다닐 길이 없을 것이다.
흰 심의를 입은 시현이 권기를 맞아 해야 할 일을 일러주었다.
거의 답안지를 읊어 주는 수준의 친절한 설명에 뒤에 선 다른 수험자들은 표정이 밝아졌으나 권기는 더 긴장하기 시작했다.
문이 직접 시험관을 하다니 그래도 되는 걸까.
문의 눈에 내 법술 따윈 아주 쓰레기로 보이겠지.
시현의 설명이 끝났을 때 권기의 머릿속은 새하얘져 있었다.
마력석을 들어 올리는 손이 덜덜 떨렸다.
시험이 시작되었다. 권기는 주문을 외워 지맥의 기운을 끌어올렸으나 막판에 집중이 끊기고 말았다.
표층을 한 치 못 남기고 기운이 방향을 잃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거의 다 됐는데! 아쉬움과 당혹에 빠진 권기의 입에서 순간적으로 질문이 튀어나왔다.
“다, 다시 해도 됩니까?”
권기는 곧바로 자신의 멍청함을 자책했다. 될 리가 없지!
비웃음과 핀잔을 기다리는데 시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뜻대로 하라.”
권기는 정신이 번쩍 들어 새 마력석을 꺼냈다.
갑작스럽게 서격 기준이 바뀐 대신 적용을 너그럽게 하겠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재도전도 되는 거였어?
허둥지둥 주문을 외운 권기는 놓쳤던 기운의 자락을 다시 붙잡아 표토까지 이르는 길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마력석 두 개를 동원한 덕택에 처음 하려던 것보다 더 왕성한 맥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맥을 다 잇자마자 권기는 또 일을 그르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험이니까 실수 없이 지맥을 완성하는 걸 보여줘야 했다.
처음부터 새 지맥을 만들었어도 붙을까 말까 한데, 이미 망친 걸 마저 했다고 인정될 리가 없었다.
그는 죽을상이 되어 시험관의 눈치를 보았다.
시현은 여전히 속을 조금도 알 수 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마쳤으면 물러나라는 말도 없었다.
이판사판이다 싶어진 권기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또… 해도 됩니까?”
“뜻대로 하라.”
시현은 이번에도 변화 없는 얼굴로 답했다.
뒤에 선 수험생들이 크게 술렁였다.
가뜩이나 이번 시험은 권위를 인정받기 어려운데 쉬워지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권기야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집중해서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맥을 만들어냈다.
조금이나마 붙을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
이제 결과는 시험관에게 달려 있었다.
그는 사형대에 선 심경으로 시현 앞에 섰다.
수험자의 이름자가 쓰인 종이패를 세워 든 시현이 큰 소리로 말했다.
“위가 되어 먼저 할 바는 무엇이 도리인지 아는 것이니 이것이 지(知)다.
수험자 천권기는 땅의 기운을 읽고 다루는 술기를 행하여 앎이 있음을 보였다. 달하였다.”
됐다! 권기는 기뻐서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세 번을 해서 겨우 달했다고 웃음거리가 되겠지만 된 건 된 거였다.
그런데 시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시현이 이어 선언했다.
“앎에 달하였으면 안 바를 몸에 갖추고 항시 도리에 따라 행해야 하니 이것이 예(禮)*다.
수험자 천권기는 능력을 드러내는 것보다 일을 이루는 것을 우선하였고 그르침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아 일을 행하는 도리를 보였다. 달하였다.”
권기는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시현은 얇은 붓을 받아 권기의 이름패와 서격표에 나란히 표를 하여 서격원관에게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서격표를 받으십시오.”
안경 쓰고 키 큰 남자 서리가 친절하게 불러주었을 때에야 권기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체통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입을 틀어막고 비틀거리며 서격원관을 따라갔다.
꿈이 아니었다. 받아든 서격표에는 휘갈긴 붓글씨로 예 자가 적혀 있고 그 아래 금가루 섞인 적색 물감으로 인가하는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정말로 예에 올랐다.
패와 표를 들고 수험자 무리로 돌아온 권기를 다른 수험자들이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았다.
지 격과 예 격 사이에는 십 년 공부로도 넘기 어려운 벽이 있었다.
안 되는 사람은 평생을 해도 안 되었다.
그 위 격으로 가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벽을 이렇게 넘다니 평소라면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이번 시험은 확실히 기준 자체가 달랐다.
응시한 것 이상의 격에 오를 수 있다는 것도 획기적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슬금슬금 한쪽을 향했다.
함씨 집안의 함혜주가 도도하고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은 다 이번 시험이 함혜주를 위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함혜주는 이번 시험에 예 격으로 응시했다.
시문이 사촌누이의 격을 올려주려고 판을 바꿔 짰나?
함씨 집안과 척졌다는 소문도 그걸 위한 그림이었나?
다들 머릿속이 바빠졌다.
이게 다 함혜주를 위한 판이라면, 기준이 좀 날림이라도 권위에 시비 걸 이는 없을 거였다.
끼어서 득을 못 보면 바보였다.
자기말고 줄이 닿은 수험자는 이미 숨은 기준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사이 두 번째 수험자의 차례가 끝났다.
두 번째 수험자 이란정은 스물두 살의 여성이었다.
그는 권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광범위한 영역에서 실수 없이 맥을 복구해냈고 응시한 대로 예 격을 받았다.
하지만 란정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애초에 예 격에 응시한 거라 딱히 손해는 없었지만 바로 앞에 횡재한 사람을 봤으니 마음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는 차마 문에게 직접 대들지는 못하고 옆에 선 서격원관에게 따졌다.
“무슨 시험이 이렇습니까? 천… 저 서툰 술사하고 나하고 같은 격이란 말입니까?”
시종 무표정하던 시현의 얼굴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달래듯 말했다.
“그대는 이번 시험의 기준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무엇 때문에 시험을 본다 생각하는가?”
“당연히 능력 있는 이를 가려 뽑기 위해서이지요!”
“왜 하필 능력 있는 이인가?”
“그야, 그야 능력 있는 이가 인정을 받고 좋은 자리에 올라야 맡은 일을 잘하지 않겠습니까!”
시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 일을 잘할 자를 찾기 위함이다. 크고 작은 모든 시험은 모두 일을 시키려고 보는 것이다.”
시현은 수험자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그가 소리를 높여 말했다.
“위에 선 이가 일을 잘하려면 백성을 위하는 바른 뜻과 일을 하는 능력, 자리에 맞는 적성 세 가지가 필요하다.
시험에 과목을 나누어 적성을 보고 급을 나누어 능력을 보나, 기존에 바른 뜻을 보지 못한 것은 그것이 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감히 헤아리기 어려워서다.
헌데 지금처럼 많은 백성이 어려움에 처한 때에는, 바른 뜻을 가지고 행동하는 이가 숨으려 해도 송곳 같이 드러나는 법이다. 볼 기회가 있다면 어찌 보지 않겠는가. 분명히 새 규정을 전달할 때에 공훈과 함께 백성을 위하는 뜻을 중하게 보겠다 전하였을 것이다.”
란정의 얼굴에 억울한 빛이 더 깊어졌다. 그가 하소연하듯 말했다.
“제가 저이보다 바른 뜻이 모자란다는 말씀입니까?”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뜻이 누구만 못하다 하지 않았다. 본디 서격 시험은 어디에 달하였는지 볼 뿐 수험자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또한 수험자가 드러내 보이지 않은 것을 평하지도 않는다.”
시현은 더 말하지 않고 다음 수험자의 이름패를 받아들었다.
단이 란정을 한쪽으로 이끌었다.
서격표를 받아들려던 란정이 불현듯 물었다.
“저도 다시 시험을 보아도 됩니까?”
시현이 답했다.
“뜻대로 하라.”
란정은 권기만큼이나 멍한 얼굴로 이름패와 서격표를 받아들고 물러났다.
일단 예에는 달했다.
한 번 더 시험을 보아서 의에 달할 수 있나?
시험관은 자기에게 바른 뜻이 없다고 하지 않았다.
단지 방금 시험에서는 의에 달할 만한 뜻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거였다.
천권기가 행한 것에는 예에 달하는 뜻이 드러났다는 거였고.
도리를 아는 것이 지, 아는 대로 행실을 갖추는 것이 예. 의는?
“한 몸의 행실을 바로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밖으로 의로움을 펼쳐야 하니 이것이 의(義)다.”
다른 수험자가 골똘히 뇌까렸다.
서격론을 읽고 시험을 준비하는 자라면 누구나 외우고 있는 문장이었다.
예 격에 응시한 이들은 다들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란정은 필사적으로 자기가 무엇을 못 보여주었나를 생각했다.
공훈으로 격을 얻는다는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격이 의 격이니 방법이 있을 터였다.
메마른 땅을 살리는 것은 밖으로 의로움을 펼치는 일이 아닌가? 의로운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한 란정에게 번개 치는 듯한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토 과와 수 과의 시험장으로 정해진 땅은 모두 서격원에 속한 것이거나 서격원관의 소유지였다.
서툰 수험자가 주변 땅의 지력을 손상시킬지 모른다는 이유로 이렇게 정해진 것이었는데, 결국 이 땅의 지기를 살리는 것은 자기 한 몸이 시험을 치르기 위한 것이지 밖으로 의로움을 펼쳐 세상의 백성을 위하는 일이 아니었다!
제 직관에 살짝 흥분한 채 란정은 앞으로 나섰다.
마침 다음 수험자의 시험이 끝난 참이었다.
이번 수험자는 수 과목에 예 격으로 응시했고 훌륭한 술기를 보여 땅의 수맥을 되살려 놓았으나 여전히 예 격에 머물렀다.
란정이 손을 들고 큰 소리로 물었다.
“다른 장소… 시험장이 아닌 장소에서 시험을 보아도 됩니까?”
시현의 얼굴에 일순 미소가 스친 것 같았다. 그가 답했다.
“뜻대로 하라.”
그놈의 뜻대로! 이제 보니 처음부터 답지를 눈앞에 흔들고 있었다.
이번 시험관은 겉보기만 점잖았지 속셈이 고약했다.
란정은 분을 참으며 집에 보낼 서한을 휘갈겨 썼다.
주변에 대갓집 땅 말고 백성 땅 상한 곳이 어딘지 얼른 알아다 주고, 마력석도 더 챙겨달라는 부탁이었다.
다른 사람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서한을 쥔 종과 호위들이 일제히 각 집안으로 뛰었다.
다른 장소에서 공격 법술로 시험을 치는 친지에게 귀띔을 해주려고 사람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그다음에 이루어진 일들은 사실 시험이라 부르기는 민망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확실했다.
수험생들의 ‘의를 위한’ 봉사와 헌신으로 온강의 마르고 상한 땅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기존에 있었던 거석의 피해마저 복구되었다.
단은 속으로 꽤 탄복하고 있었다.
시험관이란 작자가 집에 가서 마력석 가져오면 격하고 바꿔준다는 말을 아주 고상하게 돌려서 했다.
다들 거기 신나게 놀아나고 있었다. 볼거리라면 볼거리였다.
수험자들이 온강 곳곳으로 흩어졌는지라 시현이 하나하나 과정을 볼 수가 없었다.
서격원관들이 따라가 복구 전후 상황과 결과를 기록했다.
시현은 단과 호란을 양옆에 달고 여유롭게 사방을 돌아다니며 가불가만 판정했다.
사람들 기대만큼 평가가 후하지는 않아서 주변 땅의 지력에 피해를 끼치면 지에조차 못 이르기도 했다.
그러면 수험자들은 대개가 보상을 맹세하며 마력석을 더 꺼내들었다.
시현이 한 곳에서 심사를 마치고 이동하려다 발을 멈췄다.
흰 거석이 땅에서 솟을 때 발하는 특유의 기척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곧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신호탄이 솟았다.
“슬슬 석영이 움직일 때라 생각했….”
시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지관 성벽으로부터 불과 벼락이 쏟아졌다.
공격 법술로 시험을 치는 뢰과와 화과의 수험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계속)
* * *
*) 작중의 인의예지 개념은 세계관에 맞게 재해석한 것으로 유가의 인의예지와는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