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64
06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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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난을 치러낸 직후다.
온강에 얼마만 한 위기가 지나갔는지, 시현과 수험자들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원래 법도에 따르면 가주는 다른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싸운 이의 안부를 묻고 염려하는 말을 하며, 공이 있으면 치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원규는 처음부터 심사가 뒤틀려 있어 말이 곧이곧대로 나오지 않았다.
원규가 크게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네가 난국에 큰일을 하였다 들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지운이 도와 무사합니다.”
“내가 싸움이 있을 줄을 몰라 미리 마력석을 챙겨주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일을 잘 치러냈구나.”
“할아버지께서 이미 넘치게 베풀어주셨는데, 무슨 염치로 더 손을 벌리겠습니까.”
시현이 빙그레 웃었다.
그가 래연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허리를 굽혀 절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보살펴주신 덕분에 손자가 목숨을 구하고 대업을 그르치지 않았습니다.”
원규의 눈이 커졌다.
그가 떨어져 선 래연을 돌아보았다.
“당신이?”
래연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게 되었소. 시이가 요전 날에도 다쳤고, 일이 커질 것 같아 걱정이 되어….”
“아니, 아이를 챙길 것이면 내게 말을 해야지! 어디에서 꺼내 썼소?”
원규의 목소리가 곧바로 들쭉날쭉해졌다.
래연은 부르르 떨더니 눈을 꽉 감았다 떴다.
래연이 어깨를 딱 세우고 말했다.
“걱정 마시오. 이 집안 곳간에는 손끝 하나 안 댔으니까!”
원규가 더 말하기 전에 래연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시이에게 마력석 구해주는 데 쓴 것은 당신이 늘상 서 푼도 안 된다 말하던 내 혼수요. 있어 봐야 도움도 안 되는 재물인데 다 준들 무슨 표가 나겠소.”
원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래연이 시현을 향하고는 격식을 갖추어 말했다.
“이번 난에 시문이 계셨던 것은 온강의 큰 복이오. 정말 큰일을 해내셨소. 온강 백성으로서 참으로 감사하오.”
“말씀을 낮추십시오, 할머니. 손자가 한 것이 없어 부끄럽습니다.”
래연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시현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았다.
“할 일을 다 하였으니 곧 떠나시겠지. 가기 전에 할미에게 들르시오. 옷도 지어 놓았고, 여행길에 쓸 물건도 챙겨놓은 것이 있으니.
또, 난시에 사사로운 일로 축하하는 것이 법도가 아닌 것은 알지만…. 그래도 할미 맘에 못내 아쉬워서 작은 탄일 축하도 마련하였어. 꼭, 꼭 들러야 하오.”
“뵈러 가다 뿐이겠습니까. 어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시현이 말하자 래연은 기쁜 듯 웃고는 손을 놓았다.
래연은 원규를 쳐다보지도 않고 들어가 버렸다.
원규의 얼굴은 볼만했다.
그 역시 흐지부지하게 예 차리는 말을 하더니 자리를 파하고 들어갔다.
시현은 그날 조모와 점심을 같이했다.
온강에서 정리할 일들이 생각보다 적어 남은 나절은 여유롭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을 물린 후 래연이 말했다.
“내 혼수를 너 다 준다 한 것은 그저 원규 들으라 한 말은 아니다. 패물은 짐에 싸고 부피 큰 것은 금폐로 바꾸어 놓았으니 모두 가져가거라. 수레를 끌 말도 힘찬 놈들로 골라놓았다.”
시현이 면구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이미 도와주신 것만도 제가 갚을 길이 없으온데….”
“어제 네게 얻어준 마력석은 반절 넘게 온강에 썼는데 왜 네가 갚아, 우리가 네게 신세를 갚아야지. 더구나 내가 빚이라도 질 각오로 일을 벌였다만 막상 돈이 거의 안 들었다. 남겨서 무엇 하느냐.”
“감사합니다. 크게 힘이 되겠습니다.”
손자가 솔직하게 답례의 말을 하자 래연은 기꺼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시국에 마력석이란 돈이 있다 하여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래연이 한 일은 온강 땅인들 중 함원규 하는 일에 속으로 불만 가진 이들과 시현을 연결해준 것이었다.
젊어서부터의 친구이자 시현의 스승인 임태희 무를 반 이상 설득해준 것도 래연이었다.
“그렇지. 시간이 있으면 태희를 한 번 더 만나고 가거라. 그이가 지금은 성난 척하여도 평소 너를 많이 생각하였다. 만날 때마다 네가 수학할 적 이야기를 꺼내는데 할미인 내가 다 귀찮을 정도였느니.”
“물론입니다. 오후에 문안드리러 가겠다 전갈을 드려놓았습니다.”
“잘했다. 그이가 좋아하는 차를 내줄 테니 문안 선물로 가져가거라.”
래연은 마음이 좋아져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변고 후로 심장이 안 좋아 집에서 요양만 했는데, 시현이 온 후 손주가 걱정되어 이것저것 알아보고 사람을 만나고 다녔더니 오히려 활기가 돌았다.
래연도 수과의 인으로 한때는 온강의 치수에 공이 쩌렁쩌렁했던 이였다.
집안이 한미하였으나 젊어서는 조금도 그것을 흠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때는 매사에 자신이 넘치고 마음먹으면 못 할 일이 없다 여겼는데 언젠가부터 만사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 자란 손주를 보니 용기가 솟았다.
저 아이가 세상을 지킨다 애를 쓰는데 자기도 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딸의 출산을 돌보러 남운관에 갔을 때는 오늘 같은 날을 상상도 못 했다.
뱃속에선 듣도 보도 못한 입덧으로 제 어미를 죽기 직전까지 고생시키고, 나와서는 강보에서 열을 끓이고 울기만 하던 조그만 아기였다.
래연은 온강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손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올까 봐 밤낮으로 전전긍긍했다.
뜻밖으로 열둘에 문이 되었다며 건강한 모습으로 온강을 찾았으나 이 애가 그 애가 맞는가, 어디서 바꿔치기 된 것은 아닌가 어리둥절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아이가 그 아이였다.
그 조그마했던 것이 병을 떨치고 다 자라서 세상을 짊어진다 하고 있었다.
자기도 늙고 병들었다고 누워만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내일 오전에 온강을 뜬다 했지.”
“예. 합격자를 격려하는 행사가 있어 거기서 인사를 하고 그대로 성을 나설까 합니다. 아침에 다시 인사를 드릴 것입니다.”
래연은 설핏 안색을 흐렸다.
“헌데 정말 사람을 더 데려가지 않아도 되겠느냐. 일행이 너무 적으니 걱정이 되어서…. 그러지 말고 며칠만 기다려 보거라. 내가 믿을만한 호위 몇 정도는 구해줄 수 있다.”
“아닙니다. 이미 많이 지체하였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더 있을지 모르는데 온강에서 사람을 빼어가기도 꺼려집니다.”
시현이 사양했다.
원래 원규는 돌 인간에 맞설 군대를 모아 함께 보내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윤지관 총령부도 비교적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원규와 시현의 사이에 틈이 생기면서 논의가 늘어졌다.
이번에 피해가 컸고 장군석의 공격까지 있었으니 온강에서는 더욱 사람과 재화를 아까워하게 될 것이다.
시현으로선 일이 성사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래연은 걱정을 그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시종은 둘째 치고 호위가 하나여서야.”
“호위도 길잡이도, 열 명 스무 명을 데려온다 해도 바꾸지 못할 인재입니다. 둘이서도 충분히 역할을 하니 심려 마십시오.”
“그 호위가 둘도 없이 대단하다는 말은 나도 들었다. 한 주먹에 거석을 깨부순다지. 시종도 기민한 이인 것 같고. 다만 사람을 쓸 때는 역량만이 아니라 행실도 봐야 하는 것이야. 그들의 몸가짐이 가지런하지 못하니 어찌 마음을 놓겠느냐? 둘이 뜻을 맞추어 도망쳐버리기라도 하면 어찌하고?”
“예?”
시현은 눈을 깜박였다.
호란이 예법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행실 나쁘다 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니었다.
더구나 단이야 어련히 알아서 처신했을까.
둘이 싸잡아 책을 잡힐 일이 무엇이 있었을까 싶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몸가짐이 가지런하지 못하다니? 둘이 도망을 친다니?
대체 할머니는 왜 그런 생각을…. 아.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둘의 거처가 같았다.
여행 중에도 셋이 한 데서 잔 적이 있어 크게 의식하지 않았는데 여기는 함씨 저택이다.
온 세상에 손꼽히도록 방이 많은 집이었다.
그렇구나. 시현은 동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그게….
정심서 삼례편 주해본에 이른다.
아래가 죄 될 일 하는 게 아니라면 위는 아래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 알고도 모른 척하기보다 애초부터 모르는 것이 최선이다.
일을 처분할 권한을 가진 이가 사실을 안다는 것이 일종의 위협이자 침범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즉… 호란과 단이….
음. 그럴 수 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둘이 알리길 원하지 않았다면 모른 채로 있은 것이 맞는 것이다.
평소 노력은 하였으나 자신이 위의 도리를 이 정도로 잘해왔는지는 몰랐다.
시현은 늦지 않게 태연함을 보이며 조모를 달랬다.
“제가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지 않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신의가 있는 이들이니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시현도 이제 자신의 사람 보는 눈에 자신이 없었다.
호란과 단을 믿고는 있으나 상황이 바뀌었다면 뜻을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수행을 그만두고 싶어 한다면 놓아 보내야 했다.
시현은 두 번 다시 사람을 물건 다루듯 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시현은 처소로 돌아와 단과 호란에게 지도를 가지고 오라 했다.
여행길에 대한 이야기도 제대로 하고, 오전에 호란에게 의법사를 보냈는데 치료가 잘 되었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호란은 팔팔해져 있었다.
여기저기 멍 자국은 검게 남았으나 겉보기만 그렇지 속은 다 나았고, 금 갔던 다리뼈도 깨끗이 붙었다고 했다.
호란이 미안한 듯 말했다.
“감사하지만… 어떡해요. 시문 님도 다치셨는데, 저한테만 마력석을 써주시고.”
“이것은 좌상에 불과하니 보통 치료로도 잘 나을 것이다. 이미 많이 좋아졌다.”
시현은 붕대 감긴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더구나 한쪽만 치료할 수 있다면 당연히 너를 치료해야지. 내 손목과 네 다리 중 어느 쪽이 쓸데가 더 많겠느냐.”
시현은 반농 반진으로 말한 것이었으나 호란은 진담으로만 들었는지 정색을 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리 그래도 시문 님 손목이 쓸데없지는 않죠!”
쓸데없다고는 안 하였단다. 더구나 아무리 그래도는 무엇이냐….
시현은 속으로 생각하였으나 말하지는 않았다.
“짐은 거의 다 꾸려져 갑니다. 내일 출발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방향은 어떻게 잡으시겠습니까?”
단의 물음에 시현이 말했다.
“윤지관에서도 그간 기운의 흐름을 조사해왔다 한다. 지기는 북서와 정북의 사이로 향하고 깊은 곳에서는 물이 수맥을 따라 빠져나가는데 맥의 방향을 따르나 역시 북방을 향한다 한다.
하유관과 교환한 자료를 맞추어보니 지기가 향하는 곳이 가장 가깝게 잡아도 다천관 이북, 십중팔구는 대운관 이북이리라 하는구나. 먼 길이 될 것이다.”
시현은 먼 길이란 말에 힘을 주며 두 사람을 보았다.
기분 탓인지 단의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시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너희가 앞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있거든 꺼리지 말고 말하여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