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65
065화
* * *
단이 천천히 말했다.
“음… 일단은 다천관을 향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아야 되겠군요.”
그가 지도를 펼쳤다.
“북북서로 가면 경로는 단축되지만 산지가 계속되니 보급이 힘들어질 겁니다. 서북서로 꺾어서 가다가 하유관 못 미쳐서 정북으로 향하는 방법이 있고요….”
시현은 자신이 너무 모호하게 말한 것을 깨달았다. 그가 다시 말했다.
“경로도 중요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너희 둘 다 먼 길을 끝까지 갈 결심을 굳혔느냐? 이제까지 경험했겠지만 위험하고, 힘겹고, 남이 알아주지 않는 고생이 많다.”
“결심이고 뭐고 당연히 가야죠! 같이 세상 끝나는 걸 막기로 했잖아요!”
호란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단이 피식 웃었다.
“대뜸 끌고 나올 땐 언제고, 왜 갑자기 자신감이 없어지셨습니까? 이미 돌아오는 길까지 모신다 말씀을 드렸는데요.”
시현은 난처했다. 둘에게 직접 들은 것도 없는데 자기가 먼저 말을 꺼내기가 영 그랬다.
하지만 이대로는 이야기가 계속 빙빙 돌 것 같았다.
시현은 할 수 없이 에두른 표현을 했다.
“상황도 사람 마음도 계속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따로 둘의 미래를 생각해본 것이 있을 것이고.”
“예?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단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시현이 황급히 변명했다.
“내가 알려고 한 것이 아니라, 말이 흘러들어와 버렸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책하지 않으니 걱정 말아라. 사람 사이가 순리대로 간 것이고, 서로 좋은 감정으로 지내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니냐. 숨겨야 할 일이 아니다.”
시현이 퍽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말뜻을 깨닫고 호란이 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단은 호흡을 하며 심장을 다스렸다.
그간 온강서 시현을 별로 못 봤는데, 내일부터 저걸 하루 종일 달고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죽이고 싶었다.
단이 누굴 물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무슨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절대로, 결단코, 완전히 아니거든요! 오햅니다!”
시현이 긴가민가한 얼굴로 물었다.
“오해하였다고? 그럼 둘이 같은 채에 든 건….”
“그쪽이 편해서입니다! 밥 먹고 잠만 잤지 아무 일도 없었어요!”
시현이 호란을 보았다. 호란이 기가 죽어서 말했다.
“네, 아닌 건 맞는데요….”
호란은 단하고 연애를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괜히 시무룩해졌다.
저렇게 싫어할 건 또 뭐가 있담. 내가 그래도 빠지는 데 없는 몫꾼인데….
몫하고 상관없지만….
이렇게 되니 민망해진 건 시현이었다.
“허튼 소문을 믿고 경거망동했구나. 미안하다.”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호란이 사과하자 단이 툴툴거렸다.
“왜 네가 사과해? 오해한 사람 잘못이지!”
“아니, 그게. 어. 이거는 시문 님보다 단한테 사과해야 하는데. 오해받은 거, 나 때문이거든….”
호란이 쪼그라들었다. 단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네가 뭘?”
“내가, 사람들 앞에서 단한테 너무 치대서….”
호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단을 보고 설명했다.
“그게. 원래 하늘인은 웬만한 사이에는 신체 접촉을 별로 안 해. 시비 털 때나 부축할 때 말고는 팔 같은 델 잡지도 않고, 설 때도 거리를 두고 서고.”
반민들 사이에는 ‘몸이 가까우면 마음도 가까워진다’는 속담이 있다.
하늘인들 사이에도 같은 속담이 있는데 한 줄이 더 있었다.
‘마음이 가까우면 주먹도 가까워진다.’
몸과 마음 양쪽에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충돌을 피하기 위한 하늘인의 문화였다.
호란만 거리감이 달랐다.
“근데 나는 조금만 친해지면 붙어 서고, 괜히 한 번 더 잡고, 누가 쓰다듬어주는 것도 좋아하고. 사실은 끌어안는 것도 좋아하고…. 전부터 이상하단 말 되게 많이 들었어. 근데 그게 연애감정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니라….”
호란은 바닥을 보았다.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어 모기만 해졌다.
“사부랑… 같이 있으면서 붙은 습관이거든….”
단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시현의 눈빛도 가라앉았다.
사부는 원래 아무거나 다 쓰다듬는 사람이었다.
고라니도 쓰다듬고 새도 쓰다듬고 나무줄기도 쓰다듬고 호란도 쓰다듬고, 돌멩이가 둥글면 둥글다고 만지작거리고 뾰족하면 뾰족하다고 만졌다.
앉을 때도 설 때도 거리가 가까웠다. 만날 때 매번 포옹을 해주었다.
호란은 사부를 좋아해서 사부가 하는 행동도 다 좋았다. 깨닫고 나니 닮아 있었다.
앞으로도 호란은 사부를 닮은 채일 것이다.
사부가 없어졌어도 사부가 호란에게 남긴 영향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싸우는 법, 사람 대하는 법, 생각하는 법, 사랑하는 법까지.
언젠가 호란이 누구를 사랑하면 그 사람도 호란을 닮고 호란 안의 사부를 닮을 것이다.
혼으로 이어지는 유전이라 해도 좋았다.
호란이 말을 못 잇고 있자 단이 툭 쳤다.
“됐어. 난 신경 안 쓰니까 울상 하지 마. 오해 받는 건 별로니까 남들 앞에서만 좀 조심하든가.”
호란은 단을 올려다보고는 겸연쩍게 한 번 더 사과했다.
“미안.”
“괜찮다니까. 아, 그래도 끌어안진 마라. …뭔데? 서운한 얼굴 하지 마, 실망하지 마!”
단과 호란이 격의 없이 재깔이는 것을 보며 시현은 그간 사람을 대하느라 내내 긴장해 있던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어째선지 내일 출발할 것이 기다려졌다.
* * *
다음 날 오전, 윤지관 북문 앞 광장에서 새로 격 얻은 이들에 대한 격려 행사가 열렸다.
본디 이 격려식은 서격원 건물 안에서 합격자만 모아놓고 간소하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승전 축하와 공훈의 치하, 길 떠나는 문의 전송을 한꺼번에 겸하여 광장에서 하자는 말이 나왔다.
원규의 눈치가 보여 시현의 전송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었던 서격원 사람들이 반색하며 찬성했다.
싸움 전날 안면을 몰수했다가 이제 와 승전식에 시현을 초청하기 애매했던 총령부에서도 손발을 맞추어 행사의 규모가 커졌다.
광장에 섰던 시전이 철거되고 높고 넓은 대가 섰다.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총치부가 곳간을 열어 백성에게 음식을 나눠주었다.
식에 참례하는 땅인은 물론 하늘인 반민을 안 가리고 사람이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단은 인파에 묻히지 않을 자리를 골라 성문 바로 가까운 곳에 수레를 대어놓았다.
호란은 뜻이 통한다 싶었던 하늘인 관병 몇을 청해다 호위조를 짜고 대 아래서 기다렸다.
시현은 격려식이 끝나고 승전식이 시작되기 전에 온강을 뜨기로 되어 있었다.
평소보다 격식을 갖추고 절차를 늘린 격려식이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옥색 난삼을 걸친 시현이 대 위에 올라 연설을 했다.
그는 먼저 난국에 공을 세운 합격자들을 격려하고 칭찬한 다음 화제를 바꾸었다.
이번 싸움에서 법군과 하늘인 대열이 싸워 이긴 공을 두루두루 치하했다.
아직 난국이 끝나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위아래가 합심하여 윤지관을 지킬 것도 당부했다.
듣고 있던 총령부 관료들의 얼굴이 희희낙락해졌다.
이만하면 문이 승전식 축사를 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현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렸다.
“세상에 거석이 일어나고 물과 기운이 마른 것이 모두 돌 인간이 부린 조홧속임을 이제 모두가 알 것이다. 그들은 인간 모두를 적대하며 사방의 관성을 위협하고 있다.”
돌 인간 이야기가 나오자 군중의 주의가 몰렸다.
돌 인간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공표되기는 하였으나 구체적인 내용이 적어 소문만 분분했다.
“내가 남운관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세 명의 돌 인간과 대적하였다. 그런데 돌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이 경악스러웠다.
인간이 세상의 기운을 지나치게 소모하여 온 땅이 멸망의 위기에 이르렀으며, 그들이 온갖 무도한 일을 벌이며 인간을 치는 것은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한 것이라 했다.”
느닷없는 폭로에 단상 위에 벌여 선 관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군중의 동요는 더 컸다.
경악과 불안에 찬 술렁거림이 퍼져나갔다.
벌 받을 각오를 하고 무슨 뜻이냐 고함쳐 묻는 이도 있었다.
시현은 흔들림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의 말이 막연하여 멸망이란 것의 실체를 알 수가 없고, 무도하게 행동하는 적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하물며 백성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어찌 그들이 뜻하는 대로 죽어주겠느냐?
나는 이제 그들을 추적하러 북을 향한다. 잔학무도를 일삼는 돌 인간을 남김없이 멸하며, 세상에 물과 기운을 되돌리고, 일의 진상을 철저하게 밝혀 정말 위기가 있다면 힘써 막을 것이다.
모든 백성은 일의 중대함을 알고 쉬이 두려워하지도 쉬이 안심하지도 말라. 서로 보살피고 보호하며 위기에 대비하라. 우리가 너희를 지킬 것이다.”
시현이 말을 끝내고 물러났다.
대 아래의 소란은 폭발할 듯 커졌다.
시현이 대에서 내려서자 호란과 호위들이 곧바로 서슬 퍼렇게 소리치며 길을 텄다.
그 가운데로 걸어가는 시현에게 관료들이 따라붙었다.
“문이시여…. 시문이시여! 어찌 이리 큰일을 쉬이 말씀하십니까! 몽매한 백성의 혼란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총치부 태보가 울 듯이 사정했다. 시현은 빠른 걸음으로 계속 걸으며 말했다.
“그대들도 모두 알던 일이 아닌가. 땅 위 모두의 운명이 걸린 일인데 다 같이 뜻과 지혜를 모아 앞으로를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하지만 원의 대감 말씀으론 분명….”
이미 덮어두기로 말이 된 것 아니었느냐.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태보가 울상만 했다.
석영이 죽은 날, 시현은 말의 출처가 석영임을 밝히지 않고 온강 관료들과 이 일을 논의했다.
의외였던 것은 그들이 이미 돌 인간의 의도와 동기를 알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그동안 시현에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돌 인간은 여러 명이 있었고 그들 모두에게 입이 있었다.
알고 보니 전부터 북쪽에서 소문이 내려오고 있었다.
다천관 아래 다석읍성은 최남단의 마력석 산지였는데, 금강이라 이름 댄 돌 인간이 아예 선전 포고를 하고 때려 부숴 광산은 허물어지고 성곽은 돌멩이 하나 남지 않았다 했다.
피난민의 입을 통해서 돌 인간이 한 말이 이리저리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온강의 땅인들은 당장 사태를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총치와 총령도 관료들도 일을 덮기를 고집했다.
적이 한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고, 근거도 없는 일로 민심이 동요한다는 게 이유였다.
시현은 굳이 그들을 설득하려 들지 않고 물러났다.
그런데도 무엇이 불안했는지, 어젯밤에도 조부가 시현을 불러 다시 한번 말을 퍼뜨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시현은 태보를 흘긋 보며 어제 조부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내가 분명 회의 중에도, 조부께도 이리 밝혔네. 모두가 걱정하는 바를 알고 있고, 필요한 때에 필요한 이들에게 말하겠다고.”
“방금 모두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