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69
069화
* * *
“단아! 단이잖아? 너 살아 있었구나!”
남자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단도 환한 얼굴이었다.
남자는 아예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단에게 달려갔다.
호란은 경계를 풀었다. 단의 아는 사람, 그것도 친한 사람 같았다.
그런데 둘이 하는 게 이상했다.
처음에 반가운 얼굴을 했던 단은 사내가 달려오는 모양을 보더니 막사 뒤로 도망쳐 숨으려 했다.
사내는 무서운 속도로 그 뒤를 쫓아갔다.
막사 뒤에서 단이 비명을 질렀다.
“미친놈아, 하지 마!”
호란은 깜짝 놀라 쫓아갔다가 맥이 빠졌다.
사내가 단을 아이 어르듯 번쩍 들어 올린 채 신이 나서 덩실거리고 있었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단이 성을 내며 주먹으로 사내의 머리를 후려쳤지만 사내는 벙글벙글 웃기만 했다.
호란이 사내를 말리려는데 그가 알아서 단을 내려놓고 와락 끌어안았다.
그가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보고 싶었어. 걱정했어….”
단이 사내의 등을 성의 없이 토닥였다.
“그래. 나도 보고 싶었는데 막상 보니까 꼴 보기 싫다. 봤으니까 너 갈 길 가라.”
“못된 놈.”
둘이 포옹을 풀자 호란이 물었다.
“누구야? 단 친구야?”
단이 인상을 썼다.
“아…. 좀 전까지는 친구였는데 이제 그만둘까 하고요.”
“또, 또 그런 소리 한다.”
남자가 다시 단을 끌어안으려고 했고 단은 질색하며 호란 뒤로 숨었다.
호란은 딱 막아섰다.
상대가 하늘인인지 반민인지 모르겠지만, 더 힘센 사람이 남이 싫어하는 행동을 할 때는 못 하게 해야 했다.
그는 호란을 보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단이 호란의 등 뒤에서 둘을 소개했다.
“자자, 호란 나리, 이 녀석은 최길이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상단 호위 일 하는 녀석이에요. 여기는 호란 나리셔. 나랑 같은 윗전 모시는 호위 분이야.”
길이 의외라는 얼굴을 하고 호란의 머리 위로 단에게 물었다.
“윗전이면 땅님? 땅님 모시고 다녀? 네가?”
“어, 그렇게 됐다. 임시로….”
단이 조금 계면쩍은 듯이 말했다. 호란이 물었다.
“길은 하늘인이야? 반민이야? 생긴 거는 반민인데 기세가 보통이 아닌걸.”
길이 호전적으로 으르렁거렸다.
“왜, 반민이 힘세서 꼽냐? 힘은 니네만 세야 돼?”
“야, 호란 나리한테 시비 털지 마. 그 소리 하고 다니기 질리지 않냐?”
단이 호란 뒤에서 나오며 길의 머리통을 탁 쳤다.
그가 호란에게 설명했다.
“얜 어머니가 하늘인이에요. 아버지는 반민이고. 힘은 웬만한 하늘인 나리들보다 센 거 같은데, 지 입으로 반민이라고 하니까 반민인 거죠, 뭐.”
호란은 좀 놀랐다.
하늘인과 반민이 아이를 갖는 일은 흔치 않았다.
신분 차 때문에 기피되기도 했지만 애초에 하늘인과 반민은 애정관과 생활방식이 맞지 않았다.
반민은 혼인을 해서 아이를 키우며 평생을 같이 산다.
하늘인은 아이가 좀 클 만하면 부모 중 누가 아이를 책임질지 정하고 각자 알아서 산다.
이런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서로 골치였다.
아이가 나도 대개 반쪽짜리가 난다.
웬만한 하늘인들은 평생 몫 못 할 반민 반려와 자식을 떠맡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길은 반쪽짜리기는커녕 서너 몫은 하는 몫꾼 같았다.
최길처럼 외모는 반민인데 힘은 하늘인인 경우는 처음 보았다.
호란이 다시 물었다.
“반민이라도, 어쨌든 몫꾼인 거지?”
“아닌데?”
길이 턱을 내밀었다.
“난 몫꾼이니 뭐니 니네가 하는 타령 하나도 몰라. 상관 안 해. 꼽냐?”
“시비 털지 말래도. 죄송합니다.”
단이 길 대신에 호란에게 미안한 얼굴을 했다.
“이 자식이 처음 보는 하늘인 나리한텐 꼭 이렇게 유세를 부려요. 애가 거칠어서 그렇지 사람은… 착하진 않네요. 그래도 속마음은… 더 별로고. 못된 놈인데 그냥 좀 봐주세요.”
호란은 으쓱했다.
“마음 안 써. 단 친구잖아. 단 친구면 좋은 사람이겠지.”
“호란 나리, 그런 믿음은 갖지 마세요. 그런 식으로 좋은 사람 늘려나가면 세상에 나쁜 사람 하나도 안 남습니다.”
단이 딱한 듯이 말했다.
길은 호란이 상대해 주지 않자 김빠진 얼굴을 했다.
계속 시비조인 것이 호란과 위아래를 재어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호란으로선 딱히 힘겨루기를 할 마음은 없었다.
몫 없는 다툼은 없는 쪽이 낫다. 더구나 친구의 친구라면.
단은 길과 서둘러 안부를 주고받았다.
양곤호와 연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말을 듣고 길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단이 한동안 보화상단과 함께 여행할 거란 이야기에도 신나 했다.
단이 길에게 물었다.
“지금은 여기 호위 일 하는 거야? 너 아직도 류사예하고 같이 다니냐?”
“당연하지! 나하고 사예 님은 내가 죽는 날까지 한 몸 한 쌍이라고!”
길이 으스대는 투로 말했다.
그때 의원 막사에서 시현이 나왔다.
단과 길 사이에서 슬슬 뻘쭘해지기 시작했던 호란은 조르르 시현에게 달려갔다.
“시문 님! 손목은 어떠세요?”
“괜찮다. 거의 다 나은 거 같구나.”
시현이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의원이 괜찮다고 했는지 싸맸던 것도 풀고 있었다.
시문이란 말에 길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그는 큰 키를 수그리고 단에게 뭐라고 열심히 수군거렸다.
시현이 걸어오자 길이 주춤주춤 꿇어 엎드려 예를 올렸다.
길이 단의 친구란 말을 들은 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잘되었구나. 오늘은 일도 더 없으니 둘이서 회포를 풀도록 해라.”
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나리님 쉬실 자리 먼저 만들어 드리죠. 보니까 막사 준비되는 데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거 같고, 수레 안은 더우실 겁니다.”
길이 눈치를 보다가 시현에게 말했다.
“저도 모시는 땅님이 계신뎁쇼…. 단이가 왔다는 걸 알면 보고 싶어 하실 겁니다. 나으리께서 혹시 단이랑 함께 저희 주인어른 막사에서 잠시 쉬시겠습니까.”
“그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하마.”
시현이 허락했다. 길은 자기가 말을 내어놓고 주뼛거렸다.
“많이 누추합니다. 제가 모시는 주인어른도, 문께는 댈 수 없는 신분이옵고….”
“괘념하지 않는다.”
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류사예는 신분이 문제가 아니지…. 괘념을 하셔야 하는데….”
시현이 쳐다보자 단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나리님께서 과연 거기 가셔서 쉬실 수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더 지치시는 게 아닐지.”
“무슨 뜻이냐?”
“차마 설명드릴 수가 없네요. 일단 가시죠. 가보시면 아십니다.”
길이 앞장을 섰다.
그가 모신다는 땅님의 막사는 의원 막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막사가 눈에 들어오자, 시현은 생각 못 한 광경에 조금 당황했다.
짐승을 매려고 박아놓은 말뚝 울타리 위에 개암색 피부에 긴 밤색 머리를 한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풀어헤쳐 걸친 북방식 장포와 분홍 치마가 분방하게 바람에 나부꼈다.
얼굴 윤곽을 보면 이십 대 중반은 된 듯한데 표정과 행동은 천진하여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여자가 이쪽을 보았다.
그는 곧바로 단을 알아보더니 손가락질을 하며 웃었다.
“하하하하! 저기 봐! 자기 노비 문서에 수결한 애 왔다!”
단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진짜….”
여자가 울타리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꽤 높았는데도 땅을 딛는 동작이 서슴없고 경쾌했다.
그가 다가오자 단이 시현에게 말했다.
“소개드립지요. 상단에서 일하시는 땅님 중의 망종 1위 류사예 님이십니다.”
멋대로 흐트러진 밤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사예가 환하게 웃었다.
단이 그에게 시현을 소개했다.
“사예 님, 시문이십니다.”
사예는 깜짝 놀라더니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어머, 세상에. 진짜로요? 문이시라고요? 이런 신기한… 아니, 이런 영광이.”
그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시현이 당황한 내색을 못 숨긴 채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남운관의 완시현 문이오. 그대는….”
시현은 약간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사예라면 예 격이 있는 이일 텐데, 단이 류씨 사예가 아니라 류사예라고 소개한 점이 이상했다.
시현이 헷갈려하는 것을 눈치챈 사예가 쾌활하게 말했다.
“아, 사예는 이름이에요!”
그가 빠른 말로 덧붙였다.
“제가 예 격을 얻었다가 잃었는데요. 죽어라 공부해서 격 땄는데 죄 좀 지었다고 뚝 떼어가는 게 어딨어요. 생각해도 억울하길래 이름을 사예로 고쳤죠.”
“그것은….”
시현은 답할 말조차 잃었다.
격을 칭할 때 쓰는 문, 무, 인, 의, 예, 지는 앞 자로든 뒤 자로든 이름자에 넣지 않는다.
제 이름에 스스로 격을 넣었다는 사람은 만나기는커녕 책에서조차 본 일이 없었다.
단이 막사 휘장을 걷어 올리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시문 나으리. 덥고 목이 타실 텐데 차라도 올려드릴까요?”
“좋다마는…. 왜 그 말을 네가 하느냐?”
시현이 물었다. 정작 막사 주인인 사예는 생각 없는 얼굴로 멀뚱히 서 있었다.
단이 대답했다.
“누군가는 말해야 하는데 사예 님한테는 그런 걸 기대할 수 없거든요. 그리고 나리님, 쉬시려면 사예 님은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무리시겠지만요.”
말하고서 단은 척척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숫제 제집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사예가 그 뒤를 바짝 따라 들어가더니 막사 가운데의 큰 팔각 탁자 앞에 혼자 척 앉았다.
“단아, 나는 차 말고 술! 안주는 육포로! 매운 거 말고 짠 거!”
“사예 님 막사에 안줏거리 어디 있는질 제가 어떻게 압니까?”
단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미 닦아둔 주전자를 찾아내 화로에 올리고 있었다.
길이 함께 서서 다과상 준비인지 주안상 준비인지를 시작했다.
사예는 기대에 찬 얼굴로 탁자를 두드리며 주안상을 기다릴 뿐 시현이나 호란에게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호란이 어벙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서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시현이 대신 말했다.
“그쪽에 앉거라, 호란.”
시현도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탁자에는 자리가 넉넉했고 상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시현은 사람 대하는 예의 근본은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이라 한 성덕론 구절을 떠올렸다.
사예는 해례본에 실어도 좋을 반면교사였다.
그가 올랐던 격이 하필 예라는 것도 격을 잃은 후 그것을 제 이름자로 가져왔다는 것도 대단한 모순이었다.
시현은 고개를 숙이고 웃고 말았다.
평소라면 남 앞에서 하지 못할 행동이었으나 지금 이 막사 안에서 예법을 따지면 자기만 바보가 될 판이었다.
길이 술상을 차려오고 단도 차를 가져왔다.
단은 차를 우려 차례로 올린 후 자기도 자리에 앉았다.
길은 단과 호란이 제 윗전과 같은 상에 앉는 걸 보고 놀라워했으나 빠르게 눈치를 살피더니 자기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사예에 대한 단의 소개말이 내심 신경 쓰였던 호란이 단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망종 1위면 양곤호보다 망종이야?”
“방향성이 다른 망종이십니다. 방향성은 다르지만 선 넘은 정도로 치면 세상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망종이시죠.”
단은 전혀 목소리를 줄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