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72
072화
* * *
야영지로 몰려온 마을 사람들은 아까 거석과 싸우러 나온 대열보다 더 많았다.
큰머리를 비롯해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끼어 있고 아직 몫이 안 되어 보이는 십대들과 반민들도 섞여 있었다.
아까 호란에게 인사를 했던 남자 머리 필쇠가 무리 속에서 나왔다.
그가 주먹을 대고 호란에게 다시 인사하더니 말했다.
“행패를 부리러 온 것이 아니오. 사실을 확인하러 온 것이오.”
“떼로 몰려와서 반민들 겁박해 놓고, 이게 행패가 아니라고? 창피한 줄을 알아!”
호란이 소리치자 필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가 말했다.
“마을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 어쩔 수가 없소. 그럼 동족인 은인께 묻겠소. 이 상단이 땅인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오?”
호란은 불끈했다. 숨기는 왜 숨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하지만 상행을 하는 상단주의 입장도 생각을 해줘야 했다.
호란도 상단주와 비슷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있든 무슨 상관이야? 설마 너네도 그 엉터리 같은 거 믿어? 땅님이 계시면 거석들이 온다고?”
“거석이 땅인을 노리는 건 사실이오!”
필쇠가 울컥해 했다.
그의 뒤에서 큰머리가 절뚝이며 다가왔다.
큰머리가 호란을 마뜩잖은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자네가 우리 몫꾼들을 도와줬다는 큰몫꾼이오? 그건 감사하지. 하지만 애초에 화를 불러온 게 당신들이라면 그것도 다시 볼 일이구먼.”
“그러니까 거석이 온 게 왜 우리 책임이 되냐고요. 지난달에도 두 번이나 왔다면서요?”
호란이 반박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수긍하려 들지 않았다.
“이제까지 우리 마을에 저물녘 다 돼서 거석이 쳐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렇게 큰 거석이 온 적도, 여섯 놈이 한꺼번에 온 적도 없어! 이게 다 우연이란 말이오?”
당연히 우연이지!
호란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거석이 주로 낮에 활발하게 움직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밤이라고 움직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호란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길의 거구가 어슬렁어슬렁 와서 섰다.
그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전에 여섯 놈이 온 적이 없으니까 니놈들 마을이 아직 꼴을 갖추고 남아 있었지. 이거 다 등신들 아냐? 뭘 물어봐?”
큰머리와 필쇠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필쇠가 길에게 성큼 다가서며 외쳤다.
“이 반민 놈이 주제도 모르고!”
길은 대뜸 필쇠를 쾅 후려쳤다. 눈 깜짝할 틈도 없었다.
“아이고, 길아! 죽이면 안 된다!”
상단주가 대경해서 소리쳤을 때는 이미 필쇠가 바닥에 쫙 뻗어 있었다.
필쇠는 두 몫은 하게 생긴 건장한 몫꾼이었는데, 턱을 정통으로 맞았는지 움찔거릴 뿐 일어서질 못했다.
공터의 분위기가 싹 식었다.
웃고 있는 건 길뿐이었다.
길이 뚝뚝 주먹을 꺾으면서 말했다.
“난 반민이란 말을 욕으로 쓰는 새끼들 만나면 그렇게 반갑더라고. 잘못 패서 죽여버려도 사예 님이 뭐라 안 하시거든.”
그가 턱을 치켜들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골라! 다음에 거석 여섯 놈 올 때 뒤질래, 아니면 지금 나한테 다 뒤질래?”
길의 거구가 화산처럼 기세를 뿜어냈다.
적막은 짧았다. 누군가 움직이거나 뭐라 말하기 전에 상단주 채씨가 부리나케 움직였다.
그는 길의 앞을 가로막듯 자리 잡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넙죽 꿇어 엎드렸다.
“새벽에! 새벽에 떠나겠습니다!”
그가 머리를 땅에 박고 커다란 소리로 애걸했다.
“밤새 짐을 꾸려서 동트자마자 떠나겠습니다! 물값도 더해서 내고, 다치신 몫꾼 어른 치료비도 보상하겠습니다!
밤사이 또 일이 나면 저희 호위와 일꾼들이 몸으로라도 막겠습니다! 부디 밤 동안만 지새우게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아, 채씨 어른 관절 좀 아끼소. 뭐 이런 치들한테 무릎을 꿇어?”
길이 뒤에서 불평했다. 채씨가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길이 이것아! 어딜 큰소리야! 얼른 사죄드리지 못해!”
길은 코웃음을 치며 끄덕도 하지 않았다.
채씨도 진짜로 길이 사과하리라 기대하진 않았는지 다시 앞을 보고 머리를 박았다.
“부탁드립니다, 나리들!”
“부탁드립니다!”
다른 상단 일꾼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이제 상단 쪽에 서 있는 사람은 길과 호란, 하늘인 호위 다섯 명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폭발하기 일보 직전 같았지만, 호란과 길의 존재감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큰머리 역시 소태를 씹은 얼굴을 할 뿐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하필 그는 길이 한 발만 내디디면 주먹이 닿을 자리에 서 있었다.
상단 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머리를 댄 채 상대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호란은 이상한 기시감과 함께 불쾌감을 느꼈다.
떼로 몰려와서 되도 않는 억지를 피운 것은 마을 사람들의 잘못이었다.
필쇠를 때려눕힌 것은 길의 잘못이었다.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모두 싸울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거기 생각이 미친 호란은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갈수와 폭도들이 와서 수레를 빼앗으려고 했을 때,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되자 단이 제일 먼저 한 일이 그것이었다.
단은 폭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저유고 이야기를 하고, 폭도들이 떠난 다음에는 시현 앞에 무릎을 꿇고 저유고가 사실 비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채씨가 지금 하고 있는 것도 단과 마찬가지였다.
설득을 하든, 타협안을 내놓든, 변명을 하든, 반민은 무슨 말을 하려면 먼저 무릎부터 꿇어야 했다.
자기가 상대보다 못한 사람이며 거스를 뜻이 없다는 것부터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상대는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단도, 채씨도, 상단 일꾼들도 다들 그런 삶에 당연한 것처럼 익숙해져 있었다.
호란은 그게 싫었다.
호란은 발을 바꿔 딛으며 마을 사람들을 정면으로 보고 섰다.
사람들이 움찔했다.
호란은 주먹을 쥐지도 싸울 태세를 보이지도 않았지만 편이 어디라는 것만은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결정하는 몫은 큰머리에게 돌아갔다.
큰머리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제 무리를 향해 호통쳤다.
“뭐해? 필쇠 어떤지 좀 봐봐라!”
그제야 사람들이 허둥지둥 움직였다.
필쇠는 의식이 가물가물했지만 숨을 제대로 쉬고 있고 목도 스스로 움직일 수 있었다.
사람들이 필쇠를 안아다 데려갔다. 큰머리도 그 핑계에 길에게서 거리를 떼어 무리로 돌아갔다.
큰머리가 제 무리 앞에 서서 상단주에게 소리쳤다.
“동트면 바로 떠! 알겠어?”
“물론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밤사이 무슨 일이 있기만 해봐! 다 불 싸질러 버릴 테니까!”
“아이고, 자비로운 나리들이시니 복 받으실 겁니다!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채씨가 굽신거렸다.
마을 사람들은 다 한마디씩 불만과 야유를 흘리며 물러났다.
채씨는 하늘인 무리가 모두 떠나고 나서야 부스스 일어났다.
이마와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낸 그가 길의 높다란 어깨를 툭툭 쳤다.
“잘했다! 뭘 얼마나 뜯어내러 왔나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네가 기 제대로 죽여준 덕에 물값만 몇 푼 더 얹어주고 끝나겠어. 네가 술은 좀 처먹어도 이런 맛에 데리고 다니지.”
길이 허리에 손을 얹고 으하하 웃었다.
“항상 말하지 않소! 보면 마을 몫꾼이니 하는 놈들만큼 몸 사리는 놈들이 없다니까.”
“그런데 류사예 님은 주무시냐? 신나서 튀어나오실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어쩐 일로 얼굴을 안 비치셨어?”
“친구 놈이 붙들어 놓고 있을 거요. 왜 그, 시문 나리 따라온.”
채씨가 놀라는 목소리를 냈다.
“아니 붙든다고 류사예 님이 붙들어져? 그런 인재가 세상에 있어?”
“있다고요. 별거 다 하는 놈이니 나중에 소개 한번 받으소. 거, 청주 몇 통 가져갑니다?”
“작작 처먹어. 내일 새벽에 짐 못 싸면 놔두고 갈 거야!”
채씨는 농담하듯 말하고 호란에게 와서 웃으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저놈들이 생각보다 얌전하게 물러간 건 보나 마나 나리 덕일 겁니다.”
“난 그냥 서 있기만 했는데, 뭐.”
호란이 작게 말했다.
채씨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지만 호란은 여전히 마음이 좀 안 좋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내일 예정보다 일찍 출발할 겁니다. 큰나으리께 말씀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가서 고해 올리는 게 도리이겠으나, 천한 놈이 매번 처소에 들락거리기도 오히려 폐가 아닐까 하여….”
“와도 되긴 할 건데, 그냥 내가 말할게.”
“감사합니다.”
채씨는 살갑게 웃어 보이더니 얼른 일꾼들을 추스르러 갔다.
호란은 시현이 기다리는 처소로 돌아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시현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아닐까 하였다. 그래도 네가 거석을 막아주어서 이 정도로 끝난 것이다. 만약 피해가 컸다면 그 후에 서로 탓하고 배척하는 것이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
호란은 시무룩해져서 무릎을 끌어안았다.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 사람들이…. 땅님들 탓이 아니라고 말을 해도 처음부터 들으려고 하질 않아요.”
“한번 굳어진 믿음은 말로 설득해서 바꾸기가 어렵다. 아무리 남 보기에 얼토당토않아 보여도 스스로는 그것을 모르지.”
“그냥 혼자 믿으면 차라리 낫죠, 그걸 다른 사람 괴롭힐 빌미로 삼고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시문 님? 저렇게 굴도록 내버려두고 떠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호란이 분개하자 시현은 괴로운 얼굴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타이르는 말이라도 한번 해보고 싶구나. 하지만 보화상단은 앞으로도 계속 같은 길로 상행을 해야 한다. 우리가 마을 사람들과 불화를 일으키면 사이에서 곤란해지겠지. 더구나….”
시현의 어깨가 처졌다. 그가 기운 없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 미신이니 사교를 믿는 자들은 당장 의지할 바가 없는 약하고 몰린 이들이다. 그런데 같은 믿음으로 무리를 지으면서 남에게 횡포 부릴 힘을 얻게 되었다.
큰 힘이든 작은 힘이든 힘을 갖게 된 자가 그것을 스스로 놓는 일은 여간해서 없다. 말로만 설득해서는 어떤 이치로도 제 믿음을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법으로 유언비어를 엄금하고, 동시에 병력을 일으켜 거석을 토벌하여 주민을 보호해야 한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행하지 않으면 계도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막힘 없이 방도를 내놓으면서도 시현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질 뿐이었다. 그가 한숨을 토했다.
“당장 손 닿는 것이 없구나. 하루하루 무력할 뿐이다.”
“…….”
호란은 입을 열려다가 닫았다.
말을 안 해도 시현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돌 인간을 해치우자.
그러면 거석도 없어지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의문이 찾아왔다.
정말 그걸로 다 될까?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일이 다 거석과 돌 인간만의 책임일까?
설령 그걸로 문제가 해결된다 한들, 돌 인간을 해치우는 데 집중한다는 이유로 다른 문제들을 계속 뒤로 미뤄도 되는 걸까?
“일찍 자죠, 시문 님!”
호란은 지금 생각나는 가장 전향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