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73
073화
* * *
“그래야겠구나. 내일 해 뜨기 전에 행장을 꾸려야 한다고 했지. 단은 어디에 있느냐?”
“들어보니까 단은 길이랑 사예 님한테 붙들린 것 같아요. 길이 술동이 여러 개 가져가는 걸 봤어요.”
“그러면 놀게 두는 게 좋겠다.”
두 사람은 잘 준비를 시작했다.
건너 막사 어디에서 목청 좋은 여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 * *
“말했지, 내가 끝까지 부를 수 있다고!”
사예가 젓가락으로 잔을 챙챙 두드리며 까르르 웃었다.
옆에서 길이 감격한 얼굴로 눈물 닦는 시늉을 했다.
“사예 님, 사예 님은 노래 못 하실 때도 어쩌면 그렇게 멋이 넘쳐흐르시고….”
“좀 감탄스럽긴 하네요. 중간부터 가사가 다 즉석 창작인데 그게 또 말이 되네.”
단이 잔을 내려놓으며 손으로 얼굴을 부쳤다.
떠드느라 막사 휘장을 내려놓아 밤인데도 더웠다.
길이 단의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뭘 벌써 얼굴이 벌게져? 술 줄어든 거 같다?”
“줄지 그럼. 애 둘 끌고 다니는데 마실 일이 없다.”
“애는 무슨! 도련님도 호위도 다 컸던데. 너는 그 나이 때 안 마신 것처럼 말한다?”
사예가 말하자 단이 웃었다.
“저하고 같나요. 저야 상단에서 구르던 놈팽이고, 저쪽은 예의도리 따지는 대부 나으리에다 할 몫 하는 큰몫꾼이시고.”
“아, 그렇지. 봐도 봐도 희한한 조합이야. 세상에 우리 단이가, 땅인을…. 그것도 완씨 시문을 상전, 풉, 상전으로… 모시고 다니….”
사예는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큭큭큭 웃으며 엎드러졌다. 길도 웃기 시작했다.
길이 단을 꾹꾹 찌르며 물었다.
“야, 지금 그 나으리 너 죽일 사람 명단 몇 위쯤에 있냐? 꽤 위에 있겠다?”
사예가 끅끅거리며 끼어들었다.
“아니야, 의외로 아직 아래쪽에 있을지도 몰라. 얘 명단에 사람 너무 많아서 순위 올리기 쉽지 않아.”
“그래도 격 높고 돈 많으면 순위 더 빨리 올라가잖아요. 미친, 세상에 하나뿐인 문인데 화살에 달고 쏜 것처럼 솟아 올라가겠네. 게다가 너무 점잖으셔서 재수 없어. 저는요, 벌써 10위 안에 들어갔다에 세 냥 겁니다.”
“그럼 난 20위 바깥에 세 냥. 왜냐면 내 눈에 귀여우니까.”
단이 눈을 감싸고 기나긴 한숨을 쉬었다.
“하…. 이 인간들을 다 죽여버릴 수도 없고….”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길과 사예는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예가 눈물을 닦으며 단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알았어 그만 놀릴게. 그래서, 말해봐. 언제까지 완씨 시문 길잡이 할 건데?”
“언제까진 뭐 언제까지예요. 그냥 되는 데까지 인연 닿는 데까지 하는 거지.”
단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사예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게 뭐야. 그럼 이대로 기약도 없이 계속 갈 거야? 더구나 세상이 망하니 마니 하는 큰일이라면서?”
“어떡합니까. 제 팔자가 그따위인걸요. 저야 길잡이나 하는 건데, 시문 양반이 큰일을 하러 가든 유람을 가든 알 바 아니기도 하고요.”
단은 사예의 시선을 피한 채 잔을 홀짝였다.
입술을 삐죽하게 하고 단을 바라보던 사예가 입을 열었다.
“이러면 어때? 이 상단이 태래읍성 도착하면 우리 계약 기간 끝나거든. 거기서부터 길이랑 나는 둘이 서쪽으로 갈 거야.”
“그런데요?”
“너도 우리랑 같이 가자. 시문이랑은 털어 버리고. 셋이서 조용한 광산촌 한 군데 들어가서 시끄러운 거 지나갈 때까지 짱박혀 있는 거야. 어때?”
단은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그건 좀… 돈 받아놓은 것도 있고요.”
“왜? 돈이야 떼어먹으면 되지?”
길이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단은 짜증 내는 얼굴을 했다.
“야. 너는 이해를 못 하겠지만 나는 남은 생을 계속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거든? 제발 사람의 상식 안에서 이야기를 하자.”
“상식 같은 소리 하네. 누가 보면 넌 어디서 돈 한 번 안 떼인 사람인 줄 알겠다? 어리바리하면 까이는 거지 무슨.”
길이 코웃음을 쳤다. 사예가 말을 받았다.
“그건 길이 말이 맞네. 주는 놈은 툭하면 값 후려치고 떼어먹고 준다던 돈 깎아서 주고 하는데, 왜 받는 쪽은 항상 제값만큼 일해야 돼?
그리고 시문 좀 어리바리해 보이는 것도 맞아. 왠지 작은 일이면 뒤통수 좀 쳐도 봐줄 관상이야.”
단은 이미 물리적으로 뒤통수를 쳐봤는데 봐주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예가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제값만큼 일한다는 말도 이상하지. 애초에 단이 네가 사람값을 매겨 받은 일이 있기는 하니? 길잡이 값으로 얼마를 쳐줬는지 모르지만 보나 마나 헐값을 매겼겠지. 너는 쓸데없이 열심히 일해서 한 여덟 사람 몫 했을 거고. 안 봐도 선하네.
이제까진 그렇다 쳐. 일이 그렇게 위험해졌다며, 목적지도 안 정해놓고 언제까지 끌려다니려고? 호구가 그렇게 체질에 맞냐?”
단은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따질 건 따져요. 양곤호 일로 신세 진 것도 있고, 빚 탕감도 받았고…. 적당히 계산해 봐서 정말 아니다 싶으면 발 뺄 건데, 아직은 괜찮으니까 그만합시다.”
사예와 길이 동시에 입을 딱 벌렸다.
길이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단아, 너 방금 그 말은 진짜 호구 같았어…. 아직은 괜찮은 게 대체 뭐야….”
사예가 혀를 찼다. 길이 생각난 듯이 물었다.
“혹시 그거야? 세상 구하기? 그 호위란 애는 지가 시문이랑 세상을 구한다고 허세를 빵빵 놓는다며. 너도 거기 한몫 끼려고?”
단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그런 거야 임마, 세상 망하는 게 아쉬운 사람끼리 알아서 할 일이지.”
“잘 아네. 그러니까 함께 가자는 거야. 우리 같은 밑바닥은 이럴 땐 몸 사리는 게 다라고. 열에 아홉은 소모품 노릇이나 하다가 등골 터지고, 기적이 일어나서 만사가 잘 풀려도 결국 우리 남겨 먹을 건 없단 말씀이야.”
길이 은근하게 말하며 단의 잔을 채워주었다.
단은 잔을 들어 올렸지만 손안에서 돌리고 있을 뿐 입으로 가져가지는 않았다.
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예가 물었다.
“너, 설마 길잡이 한답시고 북방까지 올라가려는 건 아니지?”
“그건 뭐, 내가 정하는 게 아니고요….”
단은 시선을 피하며 애매하게 답했다.
사예의 얼굴이 딱 굳어졌다.
길도 갑자기 안절부절을 못하며 가까이 당겨 앉았다.
“단아, 그건 진짜 아니야….”
“미쳤어? 니가 거길 왜 가? 가지 마!”
사예가 강하게 말했다.
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예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이제 보니까… 너 그러려고 완씨 시문 옆에 붙은 거야? 고작 그 동네 도로 기어들어갈려고? 너 저번에 뭐랬어, 이젠 그 생각 완전히 접었다고 했잖아!”
“누가 가겠다고 했습니까? 나도 부러 거기 얼굴 들이밀 생각 없어요.”
단이 짜증을 부렸다. 사예가 다그쳤다.
“정말로?”
“네.”
“그럼 넌 뭘 어쩌고 싶은데?”
“어쩌긴요. 아무 생각 없어요….”
단은 말하면서 자기도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잔을 비우고 다시 채웠다.
하지만 사예는 단을 놓아주지 않았다.
“어딜 갈 것도 아니고, 뭘 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우리랑 서쪽으로 가도 되겠네? 우리랑 가자.”
“아 지금은 좀 그렇다니까요. 앞가림 알아서 할 테니까 내버려 두시라고요. 남이야 어떻게 구르든. 사예 님이 언제부터 다른 사람 걱정했다고.”
“이 새끼가? 내가 막 산다고 남 걱정도 하면 안 되냐?”
사예가 들고 있던 고추 꼬다리를 단에게 던졌다.
단은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면서 털어버렸다.
사예가 살짝 꼬이기 시작한 혀로 언성을 높였다.
“내가 길이 인생이나 말아먹었지, 언제 너한테 해 되는 소리 한 적 있어? 니가 하나도 안 들어 처먹었잖아!
지금도 그래. 노비 문서도 털었겠다, 재주도 있겠다, 넌 이제 맘만 먹으면 어딜 가든 남들처럼 살 수 있잖니! 근데 또 망할 길로 찾아 들어가고 있잖아!”
“허…. 남들처럼요.”
단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남들처럼 사는 게 뭔데요. 남들은 어떻게 살길래?”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마셔버리고 슬슬 웃음을 흘렸다.
“제가 어쩔까요? 빚만 갚다 병 걸려서 버려진 율이처럼 살까요? 남의 싸움판에서 맞아 죽은 생이처럼 살까요? 아니면 뭐, 죽어라 일해서 관에 직 얻고, 공방 차리고, 결혼해서 애 낳고, 애 키워서 기술 가르치고, 그렇게 살까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처럼?”
단의 목소리가 비틀어졌다.
아까부터 눈치만 보고 있던 길이 사예의 소매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사예 님, 그, 오늘은 이 얘기 그만하지요….”
“길아,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지 말거라. 내가 뭐 잘못 말한 거 있니?”
사예가 불퉁하니 말했다. 길이 재빨리 말했다.
“감자조림 가져다드릴까요? 간 고기 넣은 거.”
“그건 좋아.”
길이 사예의 주의를 끄는 사이 단은 부스스 일어나서 막사 밖으로 나가 버렸다.
길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지만 잡지는 않았다.
취했어도 야영지를 나가 돌아다닐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는 걸 알 것이다.
사예의 막사에서 야영지 끄트머리까지 몇 발짝 되지도 않았다.
단은 그 자리에 서서 황야를 보았다.
땅과 하늘뿐이었다.
마르고 미지근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예와 주고받은 대화가 속을 푹푹 찔렀다.
어딜 갈 것도 아니고. 뭘 할 것도 아니고. 아무 생각도 없고.
웃기지만 다 사실이었다.
스스로가 너무 등신 같았다.
사예가 더 다그쳤어도 할 말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처음 은산을 떠날 때만 해도 때를 봐서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것도 알 수가 없었다.
여행을 하며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볼수록 고향서 꼴 같은 꼴을 볼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이젠 가고 싶은지 아닌지도 모르게 된 채로 어영부영 반을 와 버렸다.
떠난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단이 남운관을 나서고 싶어서 나선 것도 아니었다.
항상 이 모양이었다.
남에게 떠밀려서 처지가 뒤바뀌고, 안 될 일을 될 거라 저 혼자 믿고, 뭘 한다고 애를 쓰다가,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와서야 자기가 처음부터 생각을 잘못했다는 걸 알게 된다.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단은 고개를 들었다.
여름밤의 하늘은 미치도록 맑고 미치도록 넓었다.
먹지에 모래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별들이 머리 위를 채우고 있었다.
단은 그 하늘 아래 세상이 어떻게 펼쳐져 있는지 전부 알았다.
이맘때면 어느 별 아래 어느 관성이 있고 어느 읍성이 있는지 머릿속에 그려놓은 듯 펼쳐졌다.
하지만 그중에 자신이 갈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어딜 간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소원만 많았다.
죽지 말아야 할 이유야 넘치지만 살아야 할 이유 하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제기랄.”
단은 기운 없이 내뱉었다.
“시발… 빌어먹을.”
어딜 가나 할 말이 막힌 적이 없는 그였지만 자기 인생을 두고 나오는 건 욕뿐이었다.
언변이 하등 쓸데가 없었다.
단은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시야 한쪽 끝에 어둠과 고요에 싸인 막사 하나가 걸렸다.
안에는 세상을 구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두 사람이 내일을 위해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단은 휘휘 고개를 젓고는 불 켜진 사예의 막사 쪽으로 걸어갔다.
최소한 거기는 술이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