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75
075화
* * *
보화상단은 북으로 이틀을 더 갔다.
중간에 거석을 한 번 만났지만 호란이 한 방에 때려 부쉈다.
둘째 날 오후 늦은 무렵, 야영지로 점 찍어둔 샘터를 향하던 행렬이 멈춰 섰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호란이 행렬 선두로 가자 채씨와 사예, 다른 사람들이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기가 오르는 걸 보면 샘에 선객이 와 있는 모양인데요. 다른 상단이면 차라리 낫지만….”
채씨는 근심스러운 어조였다. 사예가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상단 아닌 것 같은데. 제대로 된 막사는 몇 개 안 보이고 사람 수는 엄청 많아. 피난민? 방랑족인가?”
“제가 가 보고 올깝쇼?”
길이 말하자 채씨가 정색했다.
“미쳤냐, 너를 보내게! 누구하고 시비를 틀고 올 줄 알고!”
“싫으면 마시고.”
“아, 저쪽도 우리 봤나 봐. 온다. 떼로 오는데? 빠르네. 하늘인들이야.”
사예의 말에 채씨의 안색이 흐려졌다. 채씨가 사예에게 사정했다.
“사예 님, 잠깐만 안쪽에 들어가 계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동 중에 수레에서 술 드셔도 봐드릴 테니까….”
“응? 나 이미 마시고 있는데.”
사예가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그래도 채씨가 가슴을 치며 사정해서 사예는 일단 길과 함께 제 수레로 물러갔다.
사예가 사라지기 무섭게 수십의 하늘인 무리가 도착했다.
호란은 긴장해서 다른 호위들과 함께 채씨 곁에 벌여 섰다.
이렇게 많은 하늘인들이 황야를 돌아다니다니, 방랑족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호란의 생각에 방랑족은 언제든 떼강도로 돌변할 수 있었다.
큰머리인지 색 띠를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짐짓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상단인가? 왜 안 오고 섰어? 샘터 먼저 차지했다고 텃세 안 할 테니 와라. 방랑족 아니니까 걱정 말고.”
“아, 예, 나으리들은….”
채씨가 굽신대며 눈치를 보았다. 큰머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뭘 물어? 뻔한 신세지. 거석 떼가 와서 마을이 깨지는 바람에 피난하는 중이다. 그래도 돈도 있고 식량이랑 물건도 좀 있어. 너희들 천막 다 치고 나면 거래 좀 하자.”
채씨는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금방 마음을 정했다.
그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니요, 저희는 물만 뜨고 갈 겁니다. 필요하신 물자가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고생하시는 중이시니 싸게 팔아드리겠습니다. 혹시 물 뜰 때 나으리들께 방해되면 물값도 내겠습니다.”
큰머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뒤에 섰던 남자가 사납게 말했다.
“이게, 누가 물값 달래? 우리가 뭘 했다고 슬슬 피해? 반민 놈이 어디서 사람을 방랑족 보듯 하고 있어!”
“아이고, 감히 그러겠습니까! 정말 저희가 갈 길이 급해 그럽니다. 이해하세요, 나으리들….”
채씨가 애처롭게 사정했다.
이 자리에 길이 있었으면 벌써 주먹이 날아갔을 것이다.
사예와 함께 길을 들여보내 놓은 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거래를 원한다 하셨지요? 어떤 물품이 필요하십니까?”
채씨가 눈치를 보며 다시 말을 걸었지만 샘터에서 온 무리들은 모두 심사가 잔뜩 뒤틀렸는지 모두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한 여자가 툭 말했다.
“이놈들, 땅인 숨기고 있는 거 아냐?”
“맞다!”
무리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호란은 이제 진절머리가 났다.
술렁임이 더 커지기 전에 앞으로 나서면서 크게 고함을 쳤다.
“닥치지 못해!”
일순 주위가 조용해졌다. 호란이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너희 입으로 방랑족이 아니라며? 그런데 그냥 지나간다는 상단 붙잡고 야료하는 건 어디 버릇이야? 헛싸움이라도 내고 싶어?”
호란의 기세에 무리는 기가 죽은 듯했다.
그러나 큰머리를 위시한 무리의 중심 되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강경하게 눈을 부릅떴다.
여자가 말했다.
“여기 땅인이 있다면 헛싸움이 아니지!”
“뭐라고?”
호란이 말뜻을 깨닫기도 전에 큰머리가 비장하게 외쳤다.
“그렇다. 땅인을 처결하고 천벌의 세를 끝내는 건 신도의 사명이다!”
“사명이다!”
“와아아아!”
하늘인 무리가 일제히 함성을 울렸다.
채씨가 안색이 새파래져 뒷걸음질을 쳤다.
호란은 넋을 놓을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은 말이 안 통하는 걸 넘어서 아예 미친 사람들이었다.
광기가 당장 상단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땅인을 내놔라!”
“땅인을 죽여라!”
무리들이 발을 구르면서 고함쳤다.
호란의 피가 차가워졌다.
싸울 각오는 있었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샘터 무리는 수가 많았고, 제대로 된 대열을 짓지 않고 흩어져 있었다.
이들이 사방에서 다짜고짜 상단을 공격한다면 이 많은 사람과 짐을 다 지킬 수가 없었다.
먼저 쳐서 수를 줄이는 게 낫나?
아니면 저들의 움직임을 보고 움직여야 하나?
그때 무리의 함성을 꿰뚫고 탕 하는 총포 소리가 울렸다.
호란은 눈을 크게 떴다. 앞에 선 큰머리의 목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눈을 부릅뜬 큰머리가 목을 감싸 쥐고 무릎을 꿇었다.
손 아래서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명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었니, 길아? 헛싸움 아니란다. 맘 편히 조져도 되겠어.”
상단주의 큰 수레 지붕 위에서 사예가 가벼운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손에는 나무로 자루를 댄 장총이 들려 연기를 올리고 있었다.
사예의 발치에 쭈그려 앉은 길이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들었냐, 새끼들아? 사예 님이 조져도 된다신다! 다 죽었어.”
“땅인이다!”
무리 가운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샘터 무리들이 와 하고 한꺼번에 수레를 향해 몰려들었다.
정구가 황급히 채씨를 감싸 수레 안에 밀어넣었다.
호란은 수레 정면을 가로막고 서서 몰려드는 무리를 상대했다.
다른 호위들도 수레를 감싸는 형태로 싸우기 시작했다.
흥분한 거인교도들이 뛰어올라 수레 위로 몸을 날렸지만, 수레 위에 내려서기도 전에 바로바로 길의 주먹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어느새 수레 뒤쪽으로 올라온 단이 사예에게 장전된 총을 건네고 빈 총을 받아가 빠르게 장전했다.
사예는 자기에게 덤벼드는 놈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여유롭게 행동했다.
수레로 뛰어오르는 놈들은 모두 길에게 맡기고, 단이 장전한 총을 건넬 때마다 수레 아래 놈들을 느긋하게 조준해서 한 발씩 쏘았다.
총성이 울릴 때마다 누군가의 신음이 들렸다.
총알 한 발 한 발의 위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지만 호란과 다른 호위들을 뚫지 못하고 있는 교도들에겐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채씨가 고용한 다섯 호위는 모두 방랑족을 상대하는 데 이골이 난 이들이었다.
호란은 말할 것도 없었다.
두어 번 발을 뻗고 주먹을 내지르는 것만으로 놈들이 속속 나가떨어졌다.
교도들은 순식간에 숫자가 줄었다. 처음에 기세 올린 것이 허무할 정도였다.
상황이 불리한 것을 깨달은 예닐곱 명이 뺑소니를 치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놈들의 등 뒤에 사예가 한 발을 더 쏘았다.
놈은 어디를 맞았는지 고꾸라졌지만 다시 일어나 절뚝이며 계속 뛰었다.
호란은 바로 후열에 있는 시현의 수레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수레들 사이에서 시현이 걸어 나왔다. 얼굴이 창백했다.
호란이 놀라 달려갔다.
“시문 님! 왜 나오셨어요, 위험한데!”
“단이 안에 있으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소리를 들으니 싸움이 큰 것 같아서….”
행렬 앞에 펼쳐진 수라장을 보고 시현은 낯이 더 어두워졌다.
상단 호위들이 돌아다니며 바닥에 쓰러진 자들의 숨을 끊고 있었다.
채씨가 수레에서 기다시피 하며 나왔다.
그는 벌벌 떨면서도 시현을 보자 안부부터 물었다.
“나으리, 무탈하셨습니까?”
“후열은 아무 일 없었다.”
시현이 대답했다.
길이 사예를 어깨에 앉히고 한 손에는 빈 총들을 낀 채 수레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가 채씨에게 물었다.
“어찌할깝쇼? 쫓아가서 싹 다 쓸어버릴까?”
“놈들 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먼저 알아야지. 놈들이 또 오면 예서 싸우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채씨는 간담이 떨리는 듯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지만 하는 말은 꽤 강단이 있었다.
수레 위에 선 단이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놈들이 샘에서 도망치려는 것 같은데요. 짐을 챙기고 있어요.”
“뭐? 망원경 줘보게!”
채씨가 황급히 말했다.
단이 수레 지붕에서 내려와 채씨에게 망원경을 건넸다.
호란도 샘터 쪽을 보았다.
단의 말이 사실이었다. 점 같은 사람 무리가 허둥지둥 반대편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움직임에 체계라곤 하나도 없었고, 누가 누구를 보살피거나 챙기는 거 같지도 않았다.
“저것들 피난민 아닌 것 같은데. 방랑족 아냐?”
호란이 의심스럽게 말했다. 정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싸울 때 대열도 제대로 안 짓고, 큰머리 죽으니까 지휘하는 놈도 없고….”
다른 호위가 말했다.
“방랑족이라기도 이상한데. 방랑족도 저들끼리 대열도 짓고 합도 맞추고 하잖아. 저거는… 어중이떠중이를 막 모아놓은 무리 같아.”
호란 생각에도 이상한 일이었다.
채씨가 결심한 듯 말했다.
“일단 샘으로 가지요. 가서 물을 길은 다음 바로 이동할지 머물지를 정하겠습니다.”
“그러구려.”
정구가 대답하고 다른 호위들과 함께 행렬의 앞길을 치우기 시작했다.
교도들이 모두 사예를 표적으로 몰려든 덕택에 상단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다.
상단주의 수레가 조금 상하고 말이 몇 마리 다친 정도였다.
행렬은 말을 바꿔 매고 바로 샘터를 향했다.
샘에 도착해 수레를 내린 시현은 주위를 둘러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거인교도 무리가 떠난 샘터는 황폐했다.
못 걷은 막사와 버려둔 짐이 흩어져 있었지만 모두 누더기에 가까웠다.
샘 주변은 사람 발로 잔뜩 짓밟혀 엉망진창이었다.
불 피운 자리도 두서없이 여러 군데였고, 재와 석탄가루가 온통 흘러나와 있었다.
샘터 옆에는 구보읍성에서 본 것 같은 사람 석상이 꽤 크게 세워져 있었다.
채씨가 혀를 찼다.
“허허, 샘을 지들만 쓰나, 이런 고얀 것들!”
단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동 중인 피난민이란 말은 거짓말이 맞았군요. 이건 하루 이틀 머문 자리가 아닌데요. 석상도 작정하고 세운 것 같고요.”
“그럼 놈들이 여기서 진을 치고 살았다고? 그럴 리가. 여기는 채집할 것도 없고 가까운 마을하고도 하루 거리는 되는데, 물이 있어도 먹을 것 없이 어떻게 지내?”
채씨가 의아한 듯 묻자 계순이 말을 받았다.
“자네들한테나 하루 거리지, 하늘인 발로는 그렇게 오래 안 걸려.”
“아니 그래도요. 마을에서 이 많은 사람을 먹여 살려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남쪽으로 내려가지도 않고,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네.”
채씨가 고민하는데 공터 한쪽에서 일꾼들이 소란을 일으켰다.
“사람이다!”
“남은 사람이 있어요!”
호란은 적이 남았나 하고 놀랐다.
그러나 일꾼들에게 손목을 잡혀 온 것은 울어서 눈이 빨개진 반민 소년이었다.
열서넛쯤 되어 보였고 잘 못 먹었는지 말라 있었다.
소년은 호란과 하늘인 호위들을 보더니 경기를 하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
“어이쿠. 괜찮다, 얘야! 진정하렴!”
채씨가 소년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소년은 납작 엎드려 덜덜 떨며 무슨 말로 달래도 고개를 들려 하지 않았다. 머리를 파묻고 중얼대기만 했다.
“일부러 숨은 게 아니에요! 거인 님 잘 모실게요! 제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