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76
076화
* * *
일꾼들이 소년을 억지로 일으키려 하는데 시현이 손을 들어 말렸다.
시간이 지나도 저를 잡아끄는 사람도 제게 뭐라 하는 사람도 없자 소년은 두려움이 조금 삭은 것 같았다.
그가 여전히 떨면서, 하지만 반쯤은 어리둥절해서 느릿느릿 고개를 들었다.
시현이 크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진정하였느냐?”
시현을 본 소년은 놀란 눈을 깜박였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귀한 사람이 입는 좋은 옷을 입고 차분한 말씨를 썼다. 얼굴도 손도 깨끗했다.
퍽 예전, 마을에 땅인 관리가 왔다 갔던 때를 빼고는 소년은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시현이 차근하게 설명했다.
“나는 여행하는 사람이고, 내 일행은 상인 무리다. 하늘족들도 모두 상단의 호위다. 사람을 해칠 이는 아무도 없으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 일어나거라.”
소년은 주위를 살피며 주춤주춤 일어섰다.
그제야 주위에 선 사람들의 분위기가 제 예전 무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소년은 긴장이 풀렸는지 다시 떨기 시작했다.
호란은 괜히 잘못한 기분이 되어서 단의 뒤로 숨어버렸다.
다른 호위들도 눈치를 보더니 주춤주춤 물러났다.
채씨가 소년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왜 여기 있었어?”
“저는… 다울마을 사는 김현이라고 해요. 몫꾼 나리들 밥 하고 잔심부름 하려고 와 있었어요.”
소년의 대답에 채씨가 얼굴을 찌푸렸다.
“다울마을? 다울마을 큰머리 나리는 내가 아는데! 여기 있던 사람들은 다울마을 사람들이 아니었잖느냐. 안 그러냐?”
“네….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위에서 온 신도들이에요….”
현이라는 소년은 울먹이며 사정을 털어놓았다.
얼마 전부터 북방에서 피난민 무리가 자꾸자꾸 내려왔는데 그들은 다 거인교의 신도라고 했다.
그간 거석의 습격으로 몫꾼을 많이 잃은 소년의 마을과 주변 지역에서는 좋은 마음으로 피난민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종교가 퍼져나가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다울마을을 비롯해 근방 몇 개 마을과 소읍에 교도단이라는 하늘인 무리가 활개를 치며 돌아다녔다.
거인 님께 바쳐야 한다는 이유로 식량을 거두어갔다.
어느새 근방의 평야에 커다란 야영지가 생겼고, 교주라는 사람이 와서 정착했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계속 늘어났다.
커지고 세를 늘린 거인교 무리는 지역의 소읍을 습격했다.
교도단에서는 땅인들을 처결하고 재산을 몰수했다고 선전했지만 흉흉한 소문이 뒤를 따랐다.
땅인 말고도 재산 있는 반민들이 땅인으로 오인당해 많이 죽고 재산을 빼앗겼다는데, 정말 오인당한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신도들이 계속 늘었어요. 어디서 오는지는 몰라요. 결국 마을에 물도 자리도 모자라게 돼서, 새로 온 무리들이 여기로 오면서 저를 끌고 왔어요.
여기서 일 주일 정도 있었는데, 그동안 상인이나 여행자가 지나가면 땅인 아니냐고 하면서…. 제가 보기에는 다 반민들이었는데….”
현은 차마 말을 제대로 못 했지만 못 이은 말이 어떤 내용이었을지는 뻔했다.
현은 시현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으리, 혹시 땅인이셔요?”
“그렇단다.”
시현이 침통한 얼굴로 답했다. 현의 눈이 두려움으로 흔들렸다.
그가 급하게 말했다.
“도망가셔야 돼요. 놈들이 땅인을 보면 다 잡아가서 교주란 사람에게 죽이게 한대요. 땅인을 못 찾으면 반민한테 좋은 옷 입혀다가 같은 짓을 한대요.
저랑 우리 아빠 엄마도 처음에는 거인교 믿었는데. 식량 거둬갈 때는 반민들도 다 잘 살게 해준다고 하고선, 그래놓고선….”
현이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채씨가 물었다.
“습격당했다는 읍이 연지읍이냐?”
현이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채씨가 끌끌끌 혀를 찼다.
그가 돌아서더니 일꾼들에게 명령했다.
“얼른 물을 길어라! 여기 못 머문다! 물만 채우고 바로 이동할 거니 빨리빨리 움직여!”
그리고 그는 시현에게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나으리. 상황이 이러니 북으로 도저히 못 올라가겠습니다. 계약을 못 지키게 되었습니다만 나으리께서도 저희와 함께 발길을 돌리시지요.”
시현은 단을 바라보았다.
“어찌 생각하느냐?”
“예? 제 생각 말입니까?”
단이 약간 당황하며 되물었다. 시현이 말했다.
“내 생각에 이대로 상단과 떨어져서 북으로 길을 돌파할 수가 있고, 일단 물러나서 네가 처음 말한 대로 치안이 살아 있는 지역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다.
내 마음 같아서야 강행이 되더라도 북으로 길을 서두르고 싶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게 돌아가는데 내 바람만으로 일을 정해서 그 판단이 온전하겠느냐. 네 생각을 듣고 싶다.”
단이 이마를 긁적였다.
“반쯤은 운에 달린 일이라 보장은 못 드리지만요, 지금은 오히려 우리끼리만 북쪽으로 강행 돌파를 하는 게 더 안전할 수 있습니다.”
채씨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반박하는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시현이 제 아랫사람과 말하는 데 끼어들지는 못하고 양쪽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단이 말을 계속했다.
“멀지 않은 곳에 거인교 놈들의 군집이 있다니 놈들이 곧 사람을 잔뜩 모아서 여기로 몰려올 겁니다. 우리가 떠난 걸 알면 수레바퀴 자국을 따라 추격을 하려고 하겠죠.
하지만 놈들이 쫓으려는 건 상단 행렬이니까요. 나리님께서 수레 하나만으로 북으로 가시고, 호란 호위가 자취를 없애면서 뒤따라 달리면 놈들이 잘 못 따라올 겁니다.”
“그러면 상단 쪽은 어떻게 되겠느냐?”
시현이 묻자 단이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
“상단 행렬이야, 수레가 많은 데다 짐 때문에 바퀴 자국이 깊게 남으니 흔적 없앤다고 없애도 쉽지 않죠. 어떻게 해도 꼬리를 잡힐 겁니다.
뭐 헤어진 다음에야 상관이 있겠습니까? 보화상단이 미끼가 되게 놓아두고, 그동안 우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샘만 따라서 동쪽으로 빙 돌면 됩니다.
운이 좋으면 어찌저찌 소석읍성까진 다다를 것도 같은데요. 그 동네라고 거인교 패거리들한테서 무사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단이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사이 채씨의 얼굴은 점점 질려 흙빛이 되었다.
둘러선 일꾼들도 안달을 하기 시작했다.
시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미끼라니, 이제껏 함께 여행한 이들을 어찌 그리 여기겠느냐. 단, 마음속에 뜻하는 바가 있으면 좀 더 제대로 말을 하거라. 친구가 걱정되니 상단과 함께 길을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아주 이상한 식으로 하는구나.”
“저는 그런 말씀 드린 적이 없습니다만.”
단이 뚱하게 말했다. 시현이 채씨를 보고 말했다.
“함께 길을 돌아가도록 하겠다. 사람 수가 하나라도 더 있는 것이 막아내기가 낫겠지. 적도가 몰려오기 전에 한시바삐 이곳을 뜨도록 하자.”
“아아, 예, 나으리. 감사합니다!”
채씨가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곧 일꾼들을 소리쳐 불렀다.
“물은 그만하면 됐다. 꽉 채우지 마! 소금하고 술, 잡화 짐을 전부 내려라. 아예 빈 수레는 버리고 말은 풀어서 남은 수레에 나눠 매라. 속도 내서 갈 수 있게 최대한 가볍게 해라!”
다들 상황을 이해하고 곧바로 움직였다.
시현이 단을 올려다보았다.
“되었느냐? 당장은 놈들의 세력권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겠지. 차후에 상황을 보면서, 어디서 상단과 갈라져 길을 돌면 좋을지 여정을 짜 보도록 해라.”
“아니 제가 뭘 어쨌다고…. 나리님야말로 말을 정말 이상하게 해석하시네요. 상단살이는 각자도생이에요. 친구야 목숨 붙은 놈들끼리 친구지.”
단은 툴툴거리더니 곧 상단 짐 부리는 걸 도우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채씨는 사방을 뛰어다니며 일꾼들을 지휘하고 채근했다.
“물건 고르지 말고 빨리빨리 내려라! 어차피 손해 볼 것 목숨이라도 건져야지!”
“내린 짐은 한 데 놓지 말고 풀어서 헤쳐 놔라. 욕심 부리고 약탈하는 놈들이니 조금이라도 발이 묶일 거야!”
채씨 자신도 무겁고 큰 상단주 수레를 버리고 돈궤와 전표, 장부만 챙겨 다른 상인의 수레로 옮겨탔다.
보화상단은 원래 작은 상단이었기에, 짐과 수레를 줄이자 행렬의 규모가 훨씬 작아졌다.
호위하기 좀 나아 보여 호란은 그나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버린 술동이들에서 눈을 못 떼는 사예를 수레에 밀어 넣고, 행렬은 온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채씨는 말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빨리 움직일 것을 주문했다.
호위들이 번갈아 흔적을 지우면서 뒤를 따랐다.
금방 해가 저물었다.
호란은 수레 위에 선 채 줄곧 후방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구릉 건너편에서 거인교 무리들이 나타날지 몰랐다.
짐을 줄여 속도가 빨라졌다 해도 하늘인의 발걸음만큼은 아니었다.
흔적을 없앤다고 없앴지만 크게 소용은 없을 것 같았다.
거인교가 그렇게 세를 불렸다니 방랑족도 섞여 있을 것이다.
방랑족 중에는 여행자 약탈을 업 삼는 놈들이 있어 흔적 추적을 아주 잘했다.
단이 수레 위쪽을 툭툭 두드리며 호란을 소리쳐 불렀다.
“나리! 너무 신경 곤두세우지 마시고 쉴 수 있을 때 쉬세요. 이따 불침번 서셔야 할지도 모르는데.”
“으응.”
호란은 단의 옆자리로 내려가 앉았다.
상단 안에서 단은 조금만 목소리를 키우게 되어도 존대를 했기 때문에 평소처럼 대화하려면 곁에 가서 붙어야 했다.
하지만 호란이 딱 붙어 앉자 단은 곧바로 싫은 얼굴을 했다.
“좀 떨어져 앉을래? 치대는 사람 길이 하나로도 죽겠거든?”
“너어무 하네…. 최길은 막, 끌어안아도 내버려두면서….”
“눈이 어디 붙어 있으면 그게 내버려둔 걸로 보이냐? 나는 항상 최선을 다해 도망치고 있거든! 사람 좀 살려라 진짜.”
단이 투덜거렸다. 호란은 어중간한 위치로 떨어져 앉고서 물었다.
“사예 님 총포도 단이 만든 거야? 그 가늘게 생긴 거.”
“음. 한 2년 전쯤에 만들어드렸어. 용케 안 망가뜨리고 쓰고 계시네.”
호란은 탄복했다.
“단은 그때부터 그렇게 대단한 걸 만들었구나.”
“별로 대단할 거 없어. 거석 쏠 거가 어렵지, 사람 쏠 거는 만들기 쉬워.”
단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호란은 저도 모르게 눈치를 보며 물었다.
“달라?”
“많이 다르지. 장약 양이 다르고, 탄자 모양도 다르고. 총신 두께랑 강도도 다르고. 사예 님이 쓰는 총 같은 건 거석한테 쏘면 탄이 그냥 튕겨나가. 하늘인 상대로도 잘 안 통해. 웬만하게 쏴선 피해버리고, 맞혀도 작은 부상밖에 못 입혀. 사예 님이니까 급소만 골라서 저만큼 쏘는 거야.”
“사예 님이 잘 쏘는 거야? 단보다 더 잘 쏴?”
“나하곤 비교가 안 되지. 원래부터 불꽃 수십 발 쏴서 하늘에 그림도 그리던 사람인데. 눈으로는 못 봐도 총알 날아갈 때 공기압이나 경로 같은 게 다 읽힌대. 총이건 포건 화기에 손대는 관점 자체가 달라.”
이런 것도 마법 능력하고 관계가 있구나. 호란은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럼 시문 님도 잘 쏘지 않을까?”
“그건 또 다른 문제가 아닐까 싶다. 사예 님은 원래 총이나 뭐 쏘는 걸 취미 삼았던 데다, 타고나길 파괴 행위 전반에 재능이 있으시거든.”
단이 무심한 투로 말했다.
사실 호란도 시현이 무기를 들고 사람을 죽이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살인에 대한 저항감 같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시현은, 여차할 때 너무 강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