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81
081화
* * *
처결이란 말이 함성을 타고 광장 밖으로까지 퍼져나갔다.
아직 예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광장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했다.
길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단은 초조하게 턱을 쓸어내렸다.
“시간 별로 없는 거 같다. 가서 호란 나리랑 수레 끌고 교당 뒤쪽으로 와.”
“교당 뒤로? 놈들이 막으면?”
길이 물었다.
교당 건물 주위에는 교도단인지 험상궂은 하늘인들이 앞뒤로 돌아다니며 망을 보고 있었다.
단이 잠시 머리를 짚었다가 말했다.
“놈들하고 시비 붙지는 말고, 그냥 나 기다린다고 핑계 대고 근처에 와 있어. 어떻게 안으로 들어갈 수를 내볼게.”
단은 성큼성큼 교당 건물 정면을 향해 걸어가며 지형을 살폈다.
교당 뒤가 산이고 근거지 한가운데가 아닌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교당 뒤의 산은 나무와 풀이 거의 없는 돌산이었다.
여차할 때 산으로 도망쳐 올라가기가 그리 여의치는 않아 보였다.
단은 기웃대지 않고 교당 정문을 향해 갔다.
정문에는 보라색 천을 머리에 두르고 버젓한 옷을 입은 하늘인 두 사람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이 험한 얼굴로 단을 막아섰다.
“무슨 용무야? 여기는 아무나 못 들어와!”
단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예전에 벽력상단에 몸담으면서 교단과 작은 인연을 맺었던 사람입니다. 혹시 박원 어르신이 여전히 태보제장님으로 계십니까?”
천 두른 여자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주위 눈치를 보고는 작게 말했다.
“네놈은 누구냐? 우리는 이제 태보제장이란 칭호를 쓰지 않는다. 박원도 여기 없다.”
그새 일천주교 간부가 물갈이된 모양이었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어차피 단도 양곤호의 거래를 도우며 이름이나 주워 들은 정도였다.
단은 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러면 어느 분께 여쭈어야 합니까? 제게 어떤 물건이 있어 교단에 바치고 긴요한 청을 드리려 합니다. 다만 남들 앞에서 떠들썩하게 공양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그러면서 단은 손바닥 밑에 숨겨서 여자에게 금폐 한 장을 슬쩍 건넸다.
여자의 눈빛이 완전히 변했다.
그는 제 동료와 눈빛을 교환하고 단의 이름을 묻더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단은 곧 건물 안으로 안내되었다.
흙과 돌로 쌓은 한 층짜리 교당은 겉보기만 커다랗지 제대로 된 건물이 아니었다.
건축 지식이 없는 자가 지었는지 채광이 좋지 않았고 마무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세간은커녕 문짝조차 안 달린 방이 대부분이었고 안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이러니까 뭐 줄 거 있다는 말에 개나 소나 다 낚이는구만.
단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생각했다.
선동을 해서 사람을 모을 땐 좋았겠지만, 본디가 재정적 기반이 있는 교단이 아니었다.
땅인 신도를 안 받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보시랍시고 빈민 고혈이나 짜낼 줄 알다가 갑자기 규모가 커지니 기우뚱거리고 있을 것이다.
약탈 강도 집단으로 변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다만 단이 안내된 안쪽 방만은 다른 곳과 완전히 달랐다.
깨끗하고 번드르르하게 치장된 방에 있을 세간이 다 있었다.
넓은 방 한가운데서는 흰옷을 입은 남녀 여럿이 부채질을 받으며 다과를 나누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과일에 강정까지 올려진 것이 바깥 신도들 지내는 것하고는 퍽 다른 풍경이었다.
단이 들어가자 한가운데 앉은 사람이 손짓해서 불렀다.
긴 흰 옷 위에 허리와 어깨에 색색깔 장식 띠를 걸치고, 붉은 머리와 수염을 한 흰 피부의 남자였다.
단은 그를 몇 년 전 먼발치서만 보았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한환이었다.
그가 물었다.
“벽력상단은 망했다 들었는데? 이름도 바꿨다가 그나마도 관에 잘못 찍혀서 상단주가 도망다니는 중이라고.”
단은 얼른 허리를 깊이 숙였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허, 요게 나를 알아보네. 나는 모르겠는데. 넌 누구냐?”
환이 굵은 오디를 입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단은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단이라 합니다. 벽력상단서는 장부나 맡아 보던 노비였으니 귀인께서 모르실 것입니다.”
“그래서, 무얼 바치고 무얼 청하겠다고?”
환이 물었다. 단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 다음 환을 똑바로 보았다.
“교주님, 아뢰기 어렵습니다.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단이 곧게 시선을 보내자 환의 표정이 슬쩍 찌그러졌다. 그는 손을 탁자보에 문질러 닦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따라와라!”
그는 다른 교단 간부들을 놓아두고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호위로 남자 두 사람이 따라 들어왔는데, 둘 다 건장하고 드세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반민이었다.
푹신하게 천이 깔린 긴 의자에 턱 앉은 환이 단을 노려보았다.
“제법 협박조로 나오는구나. 박원을 찾았다면서? 네가 박원에게 무얼 듣고 여길 온 거라면 박원이 왜 치워졌는지도 알아야 할 텐데?”
알 게 뭐냐. 나는 사실 박원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 단은 생각했다.
넘겨짚으며 아는 척을 못 할 것은 없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단이 눈을 접으며 은근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교주님을 돕고자 온 것입니다. 기도에 효험이 있는 돌을 가져왔습니다.”
“돌이라고?”
“예.”
알기 쉬운 비유에 곧바로 환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뭐라 더 물으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금방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당장 군침을 흘릴 듯한 그 모습에 단은 속으로 실소했다.
길의 말이 맞았다. 이자는 땅인이었고 마력석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다.
땅인 의법사의 치료를 받기는커녕 평생 땅님 얼굴 볼 일도 없는 밑바닥 계층을 상대로 ‘신통력’을 발휘해 신도를 모았다.
그것을 못 하게 되자 땅인에 대한 적대감을 극단까지 부추겼다.
효과는 좋았지만 그만큼 본인도 신변이 불안한 처지가 되었다.
신위를 보여 교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든, 급할 때 제 호신을 위해서든, 그에게는 마력석이 필요했다.
단은 초면부터 그의 비밀을 쥔 사람이 되었다.
위험했지만 그와 대등하게 이야기하려면 건너야 할 다리였다.
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디 내놓아 봐라.”
단은 옆에 멘 걸낭에서 천에 싼 작은 마력석을 꺼내 환에게 두 손으로 바쳤다.
혹시 사예를 찾았을 때 건넬 수 있을까 해서 지녔던 것이었다.
환은 천 위로 마력석에 손을 대어 진위를 확인해 보았을 뿐 바로 집어가지는 않았다.
그의 눈 속에서 욕심과 의심이 팽팽히 줄다리기하는 것이 보였다.
단이 말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나머지는 밖에 두고 힘 쓰시는 하늘인 분에게 지키게 해두었습니다. 교주님께 청을 드린 다음 가져다드릴까 하고요.”
한동안 단을 노려보던 환이 마력석을 집어 품에 넣고는 목소리를 바꿨다.
“청이란 게 무어냐?”
일단 한 발짝은 전진했다.
단은 교당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머릿속으로 엮어온 구상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저하고 장사 하나 안 하시겠습니까?”
“장사라고?”
“예. 아시겠지만 온강 부근에 거인교 퍼지는 기세가 아주 대단합니다. 교리가 다 땅인을 탓하는 내용이다 보니 피난하던 땅인이 강도를 당하거나 땅인이 있는 상단이 습격을 당하는 일이 늘고 있습니다.”
“그러냐?”
환은 시큰둥한 척 말했지만 표정이 나쁘지는 않았다.
제가 영향을 미친다는 데 싫을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이자들은 정식 거인교도가 아니에요. 그냥 적당히 교리를 읊으면서 약탈을 하고는 빼앗은 건 다 자기들 뱃속에 처넣어버리지요.”
“나도 안다. 교세는 지금도 계속 뻗어나가고 있다. 그런 자들도 결국에는 교단의 품에 거둘 것이다.”
“예. 당연히 그래야지요. 헌데 제가 드리려는 말씀은… 이 무지렁이들이 땅인을 약탈한 건 좋은데 물건을 볼 줄 모르지 않습니까. 평범한 패물에 섞여서 그 동네에 흘러다니는 물건이 꽤 됩니다.”
단은 물건이라고 말할 때마다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때마다 환의 눈빛이 번득였다.
단은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동네마다 다니면서 패물을 비싸게 산다 소문을 내면 평범한 금붙이에 섞여 물건이 하나둘씩 끌려나옵니다. 끈 떨어진 땅인 양반 하나를 엮어다가 반민 보석상으로 꾸며놓고 감정을 시키면서 쏠쏠히 벌었지요.
아 그런데, 이 양반이 일이 익으니까 자꾸 물건 빼돌릴 궁리를 하지 뭡니까. 저는 그 양반이 거짓말을 해도 알아볼 길도 없고.”
환이 피식 웃었다.
“땅인 놈들이 다 그렇지. 점잖고 고고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단은 손을 맞잡으면서 목소리를 조절했다.
적당히 간절해 보이면서, 정말로 얼마나 간절한지는 보이지 않게.
즉석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붙이다 보니 이미 속은 새카맸다.
“여기가 본론입니다. 교주님께서 사방에서 땅인을 잡아들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붙잡으신 땅인 중에 말 통할 만한 한 놈을 제가 데려다가 감정사로 쓰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골라낸 물건들을 적당한 이문만 붙이고 넘겨드리겠습니다.”
“적당한?”
“말 그대로 적당하게지요. 저도 먹고 살아야지 않겠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쇼. 돈 좀 있는 땅인들은 다 관성으로 들어가 버려서 거래할 데도 별로 없어요. 제가 그… 관성에 드나들기에는 하자가 좀 있는 놈이라.”
“하기사, 상단 장부 만지는 노비놈 사연이 다 그렇지.”
환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그는 여전히 단을 떠보려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땅인이면 아무나 되느냐?”
단은 일부러 관심 없는 척 답했다.
“물건 골라내는 거야 아무나 다 하지 않겠습니까? 감정하는 시늉이야 제가 가르치면 됩니다. 쓸 만한 양반인지 한번 보기는 해야겠지만요.”
환은 의자 팔걸이를 만지작거리다가 문간에 선 호위에게 말했다.
“유 제사를 불러와라.”
호위는 나갔다가 곧 하늘인 간부 한 사람을 데려왔다.
환이 유 제사란 사람에게 물었다.
“오늘 처결을 한다고 했지? 땅인이 몇 놈 있느냐?”
“하나뿐입니다.”
“그자는 뭐하는 자야?”
유 제사는 바로 말을 안 하고 우물쭈물거리다 답했다.
“그게… 교도단에서 데려온 자라 저는 잘….”
“심문도 안 했단 말이야? 데려와 봐라.”
“교주님, 이제 금방 정오입니다. 집전 준비를 하셔야지요. 더구나 곧 피 볼 자를 교주님의 내실까지….”
“언제는 또 무슨 준비를 했다고! 데려오라면 데려오지 못해?”
핑계를 대는 유 제사에게 환이 벌컥 화를 냈다.
유 제사는 마지못한 기색으로 내실을 나갔다.
단은 초조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기다렸다.
일부러 환에게 장사 이야기로 말을 붙였지만, 환은 어째선지 잔뜩 불쾌한 얼굴이 되어 단의 말을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포로는 교당 안에 갇혀 있었는지 데려오는 데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고 내실 문이 열렸다.
곧 포박당한 사람 하나가 거칠게 방 안에 떠밀어 넣어졌다.
단의 심장이 쾅 떨어졌다.
끌려온 사람은 남자였다. 사예가 아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