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82
082화
* * *
단은 실망하거나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굴을 굳혔다.
남자는 물려진 재갈 밑으로 무언가를 호소하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서슬에 발에 맞지 않는 태사혜 한 짝이 벗겨지고 맨발이 드러났다.
단은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버선조차 신지 않은 그 발은 맨발로 다녀 버릇하여 발가락이 벌어지고 거칠었다.
끌려온 사람은 반민이었다.
피부가 비교적 뽀얀 것은 나이가 어려서였고, 몸에 걸친 옷은 언뜻 화려해 보였지만 싸구려였다. 격식에도 하나도 맞지 않았다.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은 앳된 얼굴이 눈물로 뒤덮여 있었다.
사예 외엔 누가 무슨 일을 당하든 신경 안 쓰겠다고 말한 건 단 본인이었다.
그러나…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환은 끌려온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무얼 묻지도 않고 도로 끌어가게 했다.
그는 유 제사와 단, 반민 호위 둘만 남기고 방에서 사람을 물렸다.
문이 닫히자 환이 낮지만 거친 소리로 유 제사를 다그쳤다.
“유 제사, 내가 이런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했지?”
유 제사는 힐끔 단의 눈치를 보았을 뿐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가 냉정한 투로 답했다.
“배급이 충분치 않아서 교인들의 불만이 많습니다. 더구나 어젯밤 보낸 처결단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 않습니까. 곧 소문이 돌고 신도들이 동요할 겁니다. 이렇게라도 무마를 해야 합니다.”
단은 속으로 흠칫했다.
간밤의 처결단이라면 보화상단을 쫓아온 하늘인 무리일 터였다.
이 오합지졸 교단이 하룻밤에 두 무리나 거병을 할 역량은 없었을 테니.
상황을 아는 걸 보면 도망친 패잔병 일부가 이미 교단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유 제사의 입에서 사예 이야기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환이 욕설을 뱉었다.
“옘병. 피 보면 뭐가 나아지냐!”
“나아지지는 않아도, 아무것도 안 하면 나빠질 뿐이지요. 이미 신도들에게 처결을 한다 알렸으니 예정대로 집전을 하셔야 합니다. 저도 예배 준비를 하러 가보겠습니다.”
유 제사는 허리를 까닥 숙이더니 교주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등을 돌렸다.
그가 나가기 전 말했다.
“아시겠지만, 오늘의 처결은 다른 제사들도 다 동의한 일이니까요.”
다시 문이 닫히자 방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단은 일이 된통 꼬였다는 생각에 피가 다 말랐다.
당장 예배에서 처형당할 사람이 사예가 아니란 건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여전히 사예의 행방에 대해선 알게 된 게 하나도 없었다.
거기다가, 기껏 교주의 약점을 잡고 말을 섞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반쯤 허수아비 신세였다.
교단 돌아가는 일을 다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왜 처음 본 자신에게 그런 상황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는지 속셈을 알 수 없었다.
환이 침울하게 말했다.
“방금 녀석은 네 일에 못 쓴다.”
“그, 그렇습니까…. 어째서인지요?”
“뭘 의뭉을 떨어? 너도 내막을 눈치채지 않았느냐. 애 발바닥 쳐다보는 거 다 봤다.”
환은 피식 웃더니 긴의자 한쪽으로 비켜 앉으며 단에게 반대쪽을 가리켜보였다.
“앉아봐라. 이렇게 된 거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자꾸나.”
“아이고, 저 같은 놈이 어찌 감히 교주님과 같은 좌에….”
“앉으라니까는.”
단이 사양했지만 환은 반쯤 윽박지르듯 말했다.
단은 할 수 없이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환이 낮은 소리로 한탄을 늘어놓았다.
“교단 돌아가는 꼴이 개판이야. 돈도 없고, 믿을 사람도 없고, 신도랍시고 어디서 거지떼만 우글우글 몰려오고.
오늘은 웬 처음 보는 놈이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나 물어오기는 했는데. 이게 복인지 함정인지를 모르겠단 말씀이야.”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단을 보았다.
단은 한층 어조를 공손히 하며 둘러대려 했다.
“교주님, 심려가 크시겠습니다만 저는 오로지….”
환이 툭 단의 말을 끊고 물었다.
“네 전주가 누구냐?”
단은 당황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전주는 따로 없습니다. 큰돈은 아닙니다만 소인의 자금입니다. 이것저것 있는데, 금폐만 하면 대략….”
“돈 얘기로 말 돌릴 생각 하지 말아라. 너는 장사치 관상이 아니야.”
“예에? 억울한 말씀입니다. 제가 이래 봬도 상단 물을 얼마를 먹었는데요. 혹시 교주님 보시기에 제 금전운이 별로 좋지 않습니까? 그것은 큰일인데….”
단은 너스레로 넘어가려고 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환이 히죽이 웃었다.
“장사하는 놈들이 대체로 어떤지 아느냐? 잘 버는 놈이나 못 버는 놈이나 과대망상 있기는 똑같아. 같은 시장에 비슷비슷한 물건으로 좌판을 벌이고서 남의 것은 안 팔리고 제 것은 팔린다고 굳게 믿는 놈들이 장사꾼들이지. 그런 기질 타고난 놈이 아니면 처음부터 장사판에 뛰어들지를 않는단다.”
환이 자리를 옮겨 단에게 바싹 붙어 앉았다.
단은 저도 모르게 굳었다.
환이 가까이서 단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눈을 봐도 알고, 상을 봐도 알지. 너는 그런 낙천가가 아니야. 낙천은커녕, 죽을 날 받아놓은 놈처럼 겁을 잔뜩 먹었구나.”
단은 억지로 웃었다.
“그것은… 처음 뵙는 교주님의 위용에 제 간담이 오그라붙은 것이지요.”
“말도 참 잘해. 전주 따로 두고 장사를 시켜놓으면 잘하기는 하겠구나.”
환이 허허 웃었다.
얼굴은 사람 좋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눈은 먹이를 노리는 뱀 같았다.
그가 싱글거리면서 말했다.
“내기해도 좋아. 너는 돈 벌 꿈에 부풀어서 온 놈이 아니야. 일을 그르칠까 봐 덜덜 떨면서 온 놈이다. 그러니 네게 임무 맡긴 전주가 있거나, 뱃속에 딴 속셈이 있는 게지.
어떠냐, 내가 딴에는 교주랍시고 사람을 잘 보지?”
단은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급한 마음에 일을 서두른 대가를 되게 치를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직 일을 다 그르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애써 속을 가다듬었다.
“교주님, 제가 말씀을 다 못 드린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아아! 됐다. 말로 하는 이야기는 이제 됐어. 네가 속이고 내가 의심하면 서로 의만 상하지.”
환은 손을 가로저으며 말을 막더니 곰살스러운 목소리로 단에게 말했다.
“대신에 내가 나름대로 너를 읽어보겠다. 어디 손을 한 번 줘봐라. 내가 손금을 봐주지.”
단은 조금 당혹해서 되물었다.
“손금을 말입니까?”
“아무렴! 운 좋은 줄 알거라. 이것 아무나 봐주는 게 아니란다. 손을 이리 다오. 두 손 다.”
환은 으스대며 말했다.
단은 대놓고 하는 개수작에 뒷목이 뻐근해졌지만 도리 없이 두 손을 내밀었다.
“아이고, 아이고. 손금 다 닳은 것 봐라. 젊은데 무슨 고생을 이렇게 했누. 수상 볼 줄 모르는 놈도 너 고생한 거는 십 리 밖에서부터 알겠다.”
환은 호들갑을 떨면서 단의 양손을 펼쳐서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그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선천살은 그리 없어 뵈는데 후천살이 너무 많이 들어서 사주명운을 같이 봐야 쓰겠다. 간략하게만 보는 거니 연월일은 됐고, 태어난 시가 몇시냐?”
“술시입니다.”
환은 단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진지하게 운수를 읊었다.
“날 적에 부모 운은 나쁘지 않았으나 육해살이 들어 보람을 못 보았구나. 쯔쯔. 초년부터 이별수는 왜 이리 많았느냐, 보는 사람 간장이 끊어지네그려.
너는 타고나기는 성정과 자질이 좋고 크게 될 야심도 가진 녀석인데 딱 하나 인연이 나빠서 난 대로 살지를 못한다. 동기가 있어도 믿을 수가 없고 정 준 사람일수록 망신에 끌려 들어가기 쉽다.
더 억울한 것은 원도 은도 없이 영 상관없는 사람한테서까지 큰 탈이 비롯한다는 것이야. 부린 재주만큼 보상을 얻지를 못하고 좋은 운이 있어도 흘려보내며 평생을 남의 악운에를 휘말릴 게다.”
단은 숯덩이 씹은 얼굴을 하며 잡힌 손을 빼냈다.
“하하…. 천한 놈 팔자가 다 그렇지요. 그래도 교주님 너무 악담을 하시네요. 좀 좋은 이야기는 없습니까? 돈 버는 이야기나.”
“허술허게 들어넘기지 말아라! 사람 팔자엔 나쁠 때가 있으면 좋은 날도 오기 마련인데 너는 초년에 횡액악사를 크게 맞아서 온전한 제 팔자라는 것이 없어졌어. 그러니까 자꾸 남한테 휩쓸리는 거야, 휩쓸리기를! 이대로는 영영 빛 볼 날이 안 오느니라!”
환이 근엄하게 호통을 쳤다.
단은 억지 미소를 띠며 속을 다스렸다.
뻔한 헛소리에 감정이 흔들리고 마는 것이 더 열 받았다.
이 돌무지에 파묻어 죽일 사기꾼 새끼가. 뭘 바라서 남의 속을 이렇게 뒤집지.
생년월일이 필요 없다기에 무심코 생시를 말해 준 데서 벌써 한 수를 뺏겼다.
제 출생을 안다니 고아나 내놓은 자식이 아닌 걸 눈치챘을 것이고 상단서 노비살이 한 놈이라니 이별수가 없으면 이상하다.
그다음은 다 닳아빠진 소리였다.
네가 이 꼴로 사는 건 전부 남의 탓이다.
타고난 운이 나쁜 게 아닌데 남의 악운에 휘말렸다.
그딴 건 고생 좀 한 사람은 무조건 솔깃하는 소리다.
반민 중에 남한테 안 휩쓸리고 가진 야심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다 아는 수작인데도 두 손을 쥐고 제법 뜨겁게 말해오는 것에 저절로 속이 울컥해졌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지나간 기억을 헤집어내고, 꼭꼭 숨겨둔 저를 알아봐준 기분이 들었다.
단은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서 손이 다 떨렸다.
시발, 두 번 점 봤다간 울면서 굿값도 내겠네.
이 개망종의 새끼가 이걸로 속없는 놈들 등 쳐서 교단 세울 돈과 사람을 모았구나.
죽어라 진짜. 숨 쉬지 말고 당장 죽어.
단의 착잡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환이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쯔쯔. 안된 것 같으니. 좋아! 더 묻지 않으마. 공덕 쌓는 셈 치고 내가 한 번 네놈의 악운에 같이 휩쓸려 주마.”
“네?”
“그 물건 장사란 거, 속는 셈 어울려주겠단 말이다. 수상 관상 다 봐도 너는 나 잡으러 온 관군 밀정은 아니더구나. 난 그거면 됐어. 네 꿍꿍이속은 차차 알아가면 되지. 네가 좋은 선물도 가져오지 않았느냐.”
환이 품에서 마력석을 슬쩍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단은 당황하고 말았다.
잔뜩 감정을 휘저어 놓았으니 이어서 공격이 들어올 거라 각오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전개였다.
환이 기분 좋은 듯 말했다.
“너 이름이 단이라고 하였지. 내가 돌 감정사만 구해 주면 되는 것이냐? 아니면 며칠 있다 슬슬 밑천 보태달란 이야기를 꺼낼 것이냐? 하고픈 대로 해라. 어디 수작하는 거 구경 한번 해보자.”
“아! 정말입니까?”
단은 밝은 얼굴을 해 보였다.
한환의 속셈을 알 수 없어 불안했지만 사예의 행방을 알 때까지는 교단에 줄이 필요했다.
말을 꺼낸 게 단인 이상 선택지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믿음에 꼭 보답해드리겠습니다.”
단이 사례의 말을 하자 환은 재미있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었다.
“이 녀석 눙치기는. 내가 이름자만 아는 너를 어떻게 믿어? 나도 조건이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