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85
085화
* * *
그는 돌을 높이 들며 외쳤다.
“이것은 죽음과 해침을 면함을 약속하신 징표다!”
다음에는 잔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이것은 풍요와 안심을 약속하신 징표다!”
신도들은 일제히 따르겠다 외치며 절을 해댔다.
교주는 그 예식만을 마치고 강단에서 물러났다.
대신에 교주 못지않게 화려한 집전복을 차려입은 유 제사가 강단에 올라왔다.
“오늘은 애통하고도 또 영광된 소식이 있습니다.”
유 제사는 두 손을 가슴에 겹쳐 이들 방식의 기도하는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다시 말했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간밤에 큰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단을 노리는 관군과 땅인 무리를 처결하기 위하여 백오십의 신군이 처결단으로 나섰습니다.”
날조가 가득하긴 했지만 보나 마나 어젯밤의 싸움 이야기였다.
실질은 손바닥만 한 상단을 약탈하러 떼 지어 몰려간 데 불과했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포장이 필요할 것이다.
따져보면 꼭 과장만도 아닌 것이, 어제 왔던 놈들은 관군하고 싸우는 쪽이 팔자가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 쪼그만 상단에 무슨 공권력의 화신 같은 인간이 도사리고 있다가, 온강 최상류층 인맥이 쟁여준 마력석으로 냅다 벼락을 꽂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알량한 약탈도 못 했고, 사예를 사로잡았을 무리는 종적이 묘연하다.
얻은 것이라곤 없이 하늘인 싸움꾼만 백 명 넘게 잃었으니 교단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무마하는 소리를 해야 했다.
유 제사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교악한 땅인 무리는 수백의 강군을 내세워 우리를 공격해왔습니다. 천벌의 세가 이르렀는데도 죄를 모르고 마력석까지 불태우며 사특한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처결대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목숨을 사르며 놈들을 척살하고 무수한 땅인들을 처결하였습니다! 그들의 고귀한 순교가 우리를 새 세상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유 제사는 분한 듯 주먹을 쥐어 보이며 열정적으로 연설하고 있었다.
신도들이 함성을 올렸다.
분노의 소리인지 환호인지 구분되지 않는 함성이었다.
유 제사가 과장스럽게 손을 들어 제 뒤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 자가! 사로잡은 놈들의 수장입니다!”
머리에 보라색 천을 두른 하늘인들이 우르르 단상으로 올라왔다.
그 가운데로 아까 교주의 내실에서 보았던 남자가 휘청이며 끌려나왔다.
신도들이 광기 어린 야유를 터뜨렸다.
유 제사는 뭐라 선동하는 말을 계속했지만 함성에 파묻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죽여라!”
“땅인을 죽여라!”
“천벌의 세를 끝내라!”
남자는 더 이상 묶여 있지도 재갈이 물려 있지도 않았다.
대신에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이 축 늘어져 있고, 눈에는 아무 희망이 없었다.
단의 목이 꽉 막혔다.
그는 뒷걸음질을 쳤다가 뒤에 선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다.
군중의 함성과 죽이라는 고함 소리가 귀를 윙윙 울렸다.
단은 이런 광경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관성의 땅인이 펼쳐놓은 처형장이 이거랑 다를 것도 없는 꼴이었다.
악한데 무능하기까지 해서 자기 발밑을 까먹는 자들이, 그 자리에 반항 못 할 사람의 시체를 쌓아 권세를 지키려 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자 단은 그 자리에서 죽어 사라지고 싶어졌다.
어째서 한순간이라도 내가 이걸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제까지 억울하게 죽는 사람을 수도 없이 봤다.
되지도 않는 대역죄로 끌려가서 죽고, 윗전 기분 거슬러서 맞아 죽고, 빚 잘못 썼다가 스스로 목매 죽고.
그동안 단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시현이나 호란이 아니었다. 나선다고 무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의 목숨이나 일의 옳고 그른 거까지 따져들고서 살아남을 수 있는 팔자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목숨을 던져 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했다.
나중에는 제 목숨이 먼저라서 아무것도 못 했다.
매번 억울해하고 분해하는 것도 사는 데 독이 되길래 무뎌지길 택했다.
그러다가 어디까지 왔는가.
지금 그는 남의 희생에 편승해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정보를 사려 들고 있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고 싶었다.
사제 하나가 큰 징을 세 번 쳤다.
군중의 소란이 가라앉고 대신 기대에 찬 긴장이 찾아들었다.
유 제사가 엄숙하게 소리쳤다.
“새 하늘의 도리를 받들어 처결이 이루어질 것이다. 모두 정숙하라!”
단은 눈 둘 곳을 못 찾다가 무심코 군중 쪽을 보았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와중이지만, 어디에 끼워 놔도 남보다 머리 하나 두 개는 큰 길이 금방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파고들었는지 맨 앞줄에 낑겨 서 있었는데, 단과 눈이 마주치자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 옆에 호란이 서서 단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단은 막막한 와중에도 기가 탁 막혔다.
아니, 댁은 왜 여기 있어. 분명 방에 잘 있으랬는데.
그럼 댁이 지킬 사람은 어디 가 있고? 하여간에 말 안 듣지.
단은 인상을 쓰려 했지만 어째선지 헛웃음이 나와 버렸다.
호란이 의미도 모르면서 단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바라보는 눈빛이 그저 곧았다.
단은 일이 제 생각만큼 늦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성큼성큼 단상 앞쪽으로 걸어 나갔다.
무슨 점괘통 같은 것을 들어 흔들고 있던 유 제사가 당황하는 얼굴을 했다.
준비한 수작을 부리지 않았는데도 단이 알아서 나와서인지, 아니면 저들의 의식이 남아서였는지 모르지만 알 바가 아니었다.
유 제사는 임기응변으로 대응하기로 했는지 엄숙한 목소리를 흐트리지 않고 단에게 말했다.
“입교자 대표는 무릎을 꿇으시오!”
단은 잠깐 유 제사에게 허리를 숙였지만 바로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전에 여러분께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 제사가 반응하기 전에 군중을 향해 외쳤다.
“이중에 땅인에게 원한이 사무치지 않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이미 광기에 차 있던 군중이 곧바로 호응했다. 성난 함성이 공터를 뒤덮었다.
단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일한 것을 빼앗기고, 살 곳을 빼앗기고, 가족의 목숨을 빼앗기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다시 한 번 함성이 쓸고 가기를 기다린 후, 단은 큰 동작으로 하늘인 사제들에게 붙들려 있는 희생양을 가리켰다.
“처결을 하더라도 짚을 것은 짚어야지요. 저는 이 자에게 사죄를 들어야겠습니다! 사람들 앞에 무릎 꿇고 죄를 비는 꼴을 봐야겠습니다!”
군중이 미친 듯이 호응하며 동의의 말을 외쳤다.
죽이라는 함성이 꿇리라는 함성으로 바뀌었다.
하늘인 사제들은 당황해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단은 그들의 손에서 거칠게 남자를 떼어내서 단상 앞쪽의 넓게 빈 공간으로 끌어냈다.
단이 남자를 앞으로 내세우며 소리쳤다.
“엎드려!”
이미 반항할 기력을 잃은 남자는 부들부들 떨며 무릎을 꿇었다.
“더 숙여! 땅에 머리를 대!”
단은 남자의 목덜미를 쥐는 척하다가 자기도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눈을 꽉 감고 쭉 엎드리면서 제 몸으로 남자의 몸을 덮었다.
그 순간 강단 위에 벼락이 휘몰아쳤다.
빛과 우레가 머리 위를 뒤흔들었다.
단은 눈을 감은 채 연막탄을 꺼내 힘껏 강단 바닥에 내리쳤다.
손바닥이 화끈하면서 짙은 연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연기 속에서 누가 저를 휙 나꿔챘다. 곧바로 몸이 떴다.
단과 남자를 데리고 강단을 넘은 호란과 길은 그대로 교당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얼른 엎드려 몸을 숨긴 단이 옆을 보고 말했다.
“방에 계시라 했는데 말씀 안 들으시죠.”
“그래도 교당 건물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너도 돌아오겠다는 말을 안 지키지 않았느냐.”
여전히 착실하게 담요를 뒤집어쓰고서 지붕에 납작 엎드린 시현이 대답했다. 약간 골이 난 어조였다.
강단에서 데려온 남자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도 못 하고 벌벌 떨기만 하고 있었다.
길이 그를 끌어당겨 지붕에 엎드리게 했다. 제법 친절하게 뚜덕여주기까지 했다.
“쉿, 괜찮수다. 이제 살았으니까 잘 숨으쇼. 소리 내지 말고!”
그리고서 그는 단을 향해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 내가….”
“아 꺼져. 숙이기나 해.”
단은 작게 불퉁대고 광장의 상황을 살폈다.
아래쪽은 아수라장이었다. 신도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천벌이 내렸다느니 하는 소리도 들렸다.
연기가 흩어지자 단상에 이리저리 쓰러진 사제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지만 치명타는 되지 않아 다들 숨이 있었다.
벼락이 강단 가운데에 주로 집중되었는지 단상 끄트머리에 있던 입교자들과 하급 사제들도 무사했다.
대부분 허겁지겁 강단을 내려가 달아나기 바빴다.
교주 한환이 구석에서 엉금엉금 기어 일어나는 꼴을 보고 단은 분에 차 떨었다.
시문 이 양반 마력석 아꼈구나! 하기사 안 아끼고 어찌하겠냐마는.
환은 강단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금장된 관은 어디로 날아가고 머리가 엉망이었다.
그가 분노로 부들부들 떨며 강단을 짚고 섰다.
“천벌이 아니다! 모두 정신 차려라!”
교주의 일갈에 공황에 빠진 신도들의 아우성이 조금 잦아들었다.
환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방금 것은 마법이야! 땅인이 숨어서 마법을 쓴 게다! 그놈을 잡아라!”
신도들이 혼란과 분노로 술렁거렸다. 환이 계속 소리쳤다.
“감히 성스러운 제례를 마법으로 더럽힌 자를 잡아 없애라! 금강 님이 천 년의 삶과 또 천 년의 지복을 약속하실 것이다!”
군중이 노성을 질렀다. 하늘인들이 사방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란이 난처한 듯 중얼거렸다.
“어떡하지? 여기 금방 들킬 것 같은….”
“잠깐만.”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광장 전체를 덮어서 호란은 깜짝 놀라 말을 멈췄다.
마치 시현이 큰 마법을 쓸 때처럼, 목청을 높이지 않았는데도 귀에 와서 울리는 소리였다.
목소리가 난 곳은 강단 위였다.
입교자 무리들이 도망치고 빈 단상에 낡은 두루마기를 걸친 사람이 둘 서 있었다.
하나는 아까 단에게 말을 걸었던 여자였고, 하나는 검푸른 머리칼에 창백하도록 새하얀 얼굴을 한 남자였다.
남자가 성큼성큼 환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사실 관계를 좀 바로 하고 싶어서.”
어떤 예감이나 위협 같은 것을 느꼈는지 환이 한 발 뒷걸음질치며 소리쳤다.
“넌 뭐냐? 썩 물러나라!”
남자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너를 기억 못 해도 너는 나를 기억해야지?”
그리고 그는 군중을 향해 바로 섰다.
우렁우렁하고 선명한 목소리가 땅과 하늘을 채웠다.
“실망시켜서 미안한데. 나는 너희에게 죽음을 면해주거나 복을 줄 권능이 없고, 있다 해도 해줄 마음이 없고, 애초에 너희와 약속한 것이 하나도 없다.”
돌을 쌓아 만든 강단이 쿵 기울었다.
환이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도망쳤다.
강단을 구성하는 바위들에 푸른 광채가 돌았다.
푸른 빛은 땅바닥까지 뻗어나가며 흙과 돌을 모아올렸다.
빛이 나는 돌덩이들이 불쑥 솟아오르며 형상을 갖추었다.
강단이 있던 자리에는 곧 높고 커다란 대장석이 섰다.
벽돌을 쌓아올린 듯 단단하면서도 잘 다듬어진 모양새를 하고 있었고, 몸 전체에 푸른 빛이 돌았다.
대장석의 한쪽 어깨에 선 남자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싱긋이 웃었다.
“내가 금강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