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86
086화
* * *
남자는 이어서 거석의 발치에 선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녹렴이고.”
“멋대로 사람들한테 내 이름 말하지 말랬지! 나는 너처럼 사철 관심에 목마른 자아가 아니라고!”
여자가 짜증을 냈다.
남자는 느슨하게 웃으면서 걸치고 있던 낡은 두루마기를 벗어 떨어뜨렸다.
안에서 본 적 없는 연푸른 색 의상이 드러났다.
곧게 세운 옷깃이 목을 둘러싸고, 여밈을 옆으로 둔 긴 옷이 남성적인 체형을 드러내며 몸에 붙어 내려왔다.
허리 아래는 옆트임이 있어 폭 있는 바지가 내보였다.
소매 끝과 몸통 밑단에는 왕조 시대에나 쓰이던 용 문양이 은사로 화려하게 수놓여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푸른 빛을 내는 거석 위에 서 있는 금강에게서는 확실히 인간이 아닌 풍모가 느껴졌다.
군중 사이에 두려움과 긴장감이 흘러넘쳤다.
거대한 거석을 보면 도망치는 것이 본능이다.
하지만 말로만 들어오던 기도의 대상이 눈앞에 있었다.
더구나 신도들은 ‘거인 님’을 섬기는 동시에 거석마저 신의 뜻을 대행하는 도구라 교육받아 왔다.
먼저 판단하고 움직인 것은 한환이었다.
거석의 발치에 나동그라진 처지라 도망치기엔 늦었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환이 엉거주춤 엎드려 금강에게 절을 했다.
“거인 님을 뵙사옵니다!”
교주의 행동이 집단의 심리를 떠밀었다.
주위의 사제들, 공터를 꽉 채운 신도들이 모두 허겁지겁 꿇어 엎드렸다.
다들 통곡하는 듯한 소리로 금강의 이름을 외쳤다.
시현이 안타깝게 주먹을 쥐었다.
“다들 무얼 하는 거냐, 도망치지 않고!”
관심받는 걸 좋아한다던 금강은 제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다지 감흥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거석의 머리통에 팔을 기대고 삐딱한 눈으로 환과 군중을 내려다보았다.
금강은 한탄하는 어조로 말했다.
“우릴 섬기는 종교가 생겼다길래, 이게 이번 시대 인류의 마지막 종교가 될까 해서 보러 왔더니… 이건 수준이 너무 참담하잖아.”
금강은 딱히 환을 상대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환은 허둥지둥 머리를 조아렸다.
“어, 어떤 점이 언짢으셨습니까!”
“다 꼽을 수도 없지. 교리는 체계가 없고, 일관된 도덕률도 없고, 경전도 없고, 제례니 송가는 다 다른 종교에서 따왔고, 희생 제례는 집단 광기에 불과하고, 심지어….”
금강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제 눈을 가리며 한환을 손가락질했다.
“사제복이 구려! 이딴 종교가 존재할 가치가 있어?”
“그… 그… 면목 없습니다….”
환은 대답할 말을 못 찾고 고개만 처박았다.
그도 신도들도 당혹해하고만 있었다.
느닷없이 숭배의 대상이 강림해서 교리를 전면 부정하고 예식을 혹평하고 있으면 무슨 종교의 어느 교인이든지 그럴 것이다.
당황스럽기는 호란과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금강이라면 분명 다석읍성에 나타나 선전 포고를 하고 읍성을 철저히 파괴했다던 돌 인간이었다.
거석까지 일으켜 세운 만큼 뭔가 공격적인 행동에 나설 줄 알았더니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호란이 약간 얼떨떨해져서 물었다.
“돌 인간이… 맞는 거죠, 저 사람들?”
“거석을 세운 것을 보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시현이 곤혹스러운 듯 대답을 망설였다.
“이제까지 본 이들과는 기색이 다르다. 기결을 읽기 어렵다.”
모습만 봐도 금강과 녹렴은 전에 만난 돌 인간과는 사뭇 달랐다.
모들, 암장, 석영은 모두 피부에 은은한 회색기가 돌아 남과 다른 느낌이 뚜렷했다.
용모나 체형, 목소리 어느 쪽으로도 성별을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두 사람에겐 그런 특징이 없었다.
모르고 말까지 섞은 단은 등골이 서늘했다.
이런 살벌한 교단에 친구 따라 입교까지 하는 어리바리가 누군가 했더니.
어리바리해도 죽을 걱정이 없어서 그렇게 팔자가 좋으셨구나.
녹렴이 금강에게 핀잔을 던졌다.
“급조된 종교에 뭘 바랐어, 그럼?”
금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사제복은 양보는 못 해도 이해는 하지. 제일 실망스러운 건 따로 있어.”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들, 대체 왜 사후세계 얘기를 안 하는 거야? 믿으면 안 죽을 거라느니 헛소리만 하고 말이야.
죽을 운명인 너희에게서 죽음의 두려움을 덜어주는 것, 그게 종교의 존재 가치잖아. 인간의 절멸이 눈앞에 온 이 때야말로, 너희가 진지하게 사후세계에 매달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신도들이 크게 술렁였다.
군중 대부분은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있었지만, 말에 담긴 무참한 함의를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듣고 있었다.
“금강 님! 금강 님!”
사제 무리에서 유 제사가 헐레벌떡 달려나와 엎드렸다.
그는 사제모를 벗어던져 하늘인의 검은 머리칼을 드러내고 호소했다.
“접니다! 제가 다석읍성에서 먼발치로 금강 님을 뵈었던 사람입니다!
저희는 금강 님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다! 삿된 마법으로 세상의 기운을 마구 써버리는 땅인을 처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뜻을 따를 테니 저희만은 살려주십시오!”
금강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헛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인가? 마법은 확실히 문제지만, 마법사가 없어진다고 해서 너희를 살려준다고 한 적은 없어. 네가 더 잘 알 텐데.”
유 제사는 공포에 질려 허둥허둥했다.
“그렇지만 저희를 중하게 쓰실 수 있을 겁니다! 저희가 앞장 서서…. 아, 아아….”
돌연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유 제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에서 슬금슬금 꽁지를 빼고 있던 한환에게 달려들었다.
한환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 했지만 유 제사에게 꼼짝없이 뒷목을 틀어잡혔다.
유 제사가 소리 높여 외쳤다.
“금강 님께서는 이미 굽어보셨겠지요! 교주는 사실 땅인입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한환은 사색이 되어 발버둥쳤다.
“무무무, 무슨 소리야! 금강 님, 이놈이 미쳐서 헛소리를…. 억!”
“저희의 위선을 벌하러 오셨다면 속죄하겠습니다! 당장 이 자를 죽여서….”
유 제사는 당장이라도 한환의 목을 꺾을 태세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푸른 거석이 움직였다.
유 제사와 한환 위로 거대한 주먹이 내리쳐졌다.
거석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유 제사는 한환을 놓고 몸을 빼려 했으나 한발 늦었다.
푸른 거석의 주먹은 한환을 한 번에 절명시키고 유 제사의 다리까지 함께 깔아뭉갰다.
“으아아아악!”
유 제사가 다리를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으나 그 음성은 곧 신도들의 비명에 덮여 들리지 않게 되었다.
교주가 참살당하는 것을 본 신도들이 다 같이 아우성쳤다.
그제야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금강이 냉랭하게 말했다.
“우린 단 한 번도 너희에게 누굴 죽이라고 한 적이 없다니까. 너희가 서로 죽이는 걸 보고 싶어 할 만큼 우리 심사가 뒤틀린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더구나 살려주리란 기대를 갖고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그건 우리가 뒷맛이 너무 나쁘잖아. 어차피 너희는 다 죽어야 하는데.”
유 제사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저희는 하늘인입니다! 마법 따위 쓴 적도 없고 쓸 줄도 모릅니다!”
“땅인이든, 하늘인이든, 인간은 수가 늘고 무리를 지으면 결국은 똑같아. 무리 지은 하늘인들이 마법보다 더한 사고를 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하지? 이미 우리는 이 시대를 끝내기로 결정했어….”
“그만, 금강.”
녹렴이 한 손을 들어 금강의 말을 멈추었다.
“죽을 이들에게 죽을 이유를 설명하는 게 자비라고 생각해? 그냥 끝을 내.”
녹렴의 말이 떨어진 순간 시현이 헉 소리를 내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시현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압력이 공간을 짓눌렀다.
땅이 사정없이 쩍쩍 갈라지고 조잡하게 지은 교당 건물이 무너져내렸다.
일행이 구해온 남자가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를 내며 길에게 매달렸다.
길은 남자를 어깨에 떠메고 단을 감싸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호란도 시현을 안아 올려 몸을 피했다.
근거지 곳곳에서, 그리고 교단 근거지를 둘러싸는 형태로 거석들이 줄줄이 생겨나고 있었다.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군중은 사방으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어디로 도망쳐도 같았다.
비명이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단은 땅바닥에 발을 붙이자마자 시현의 위치를 찾았다.
시현은 이미 대련에서 마력석을 꺼내 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교당 벽에서 몸을 뗄 생각도 못 한 채였다.
단은 정신없이 달려가서 그 손을 붙들었다.
“나리님, 안 됩니다!”
단이 시현의 손에서 마력석을 빼앗아들었다.
“주목을 끌면 제일 먼저 죽습니다. 이젠 마력석 얼마 없으시잖아요. 이번만은 정말 역부족입니다! 도망쳐요!”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죽게 두란 말이냐!”
시현은 아직 빼앗기지 않은 대련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길이 달려와서 단의 편을 들었다.
“거석 섬긴다고 지 발로 모인 미친놈들 아닙니까! 죽어도 쌉니다!”
단은 시현한테 그런 말이 안 통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다시 사정했다.
“한 번만 제 말 들으세요. 어차피 아무것도 못 합니다!”
“그렇지 않다! 무어든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이다!”
시현이 악쓰듯이 반박했다.
단은 가슴에서부터 욱했다.
자기라고 남이 죽게 내버려두고픈 것이 아니었다.
그야 이들은 세상에 어리석고 비겁한 무리였다.
약탈 강도질을 일삼는 무리야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신도라는 것들도 그 짝이 그 짝이었다.
저 마음 놓자고 빤한 사기꾼을 의심 없이 따르며 힘을 보탰다.
자신이 힘드니 남부터 희생시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 쓰레기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놈들 중에도 먹을 것이 생기면 제일 먼저 애들을 주러 가는 인간이 있었다.
병든 부모가 나을 것만 기대하며 남을 현혹하는 선전 문구를 외우는 아이가 있었다.
밭을 일구고 노래를 부르며 힘든 시기가 지나갈 거라고 서로를 위안했다.
모두 쓰레기였지만 복잡한 쓰레기였다.
살릴 수 있다면 살리고 싶다.
산 다음에 계속 쓰레기처럼 살든 말든. 어쨌든 다들 사람이니까.
시현이 생각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라고 해서 이들을 곧 개과천선할 불쌍한 양떼처럼 여겨 살리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상황을 보는 눈은 비슷해도 결론은 달랐다.
시현은 언제나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고 단은 언제나 무엇을 못 하는가만 생각했다.
당연했다. 시현에게는 힘이 있었고 단에게는 없었으니까.
억울했다. 무얼 할 힘이 없는 것도 억울한데 마음까지 비굴해진 것은 더 억울했다.
쿠웅 땅이 흔들렸다.
금강이 딛고 선 푸른 거석이 사람들을 짓밟으며 인파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교당 뒤의 산에서도 거석들이 내려왔다.
호란이 단과 시현을 붙잡으며 외쳤다.
“싸우든, 도망치든, 지금이 아니면 늦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