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91
091화
* * *
사주문을 지나니 커다란 3층 전각이 있고 그 반대편에서 금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호란이 전각 뒤편으로 다가가자 지켜선 경비대 머리가 호란에게 알은척을 했다.
“위를 모시러 오셨소? 아직 회의 중이시오.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오만.”
“아, 응. 주위를 살피는 중이었어.”
호란은 어영부영 말하고 기단의 층계를 올랐다.
다들 더운 날에 땡볕을 받으며 호위를 서고 있는데 혼자 어정어정 산책을 하다 들킨 것이 좀 부끄러웠다.
밖으로 둘러쳐진 회랑퇴를 따라 건물을 빙 돌자 회의장 입구와 붙은 넓은 누마루가 나왔다.
더위 때문인지 회의장은 정문을 반쯤 열고 발을 드리워 놓았다. 어차피 말로 회의하지 않으니 내용이 새어나갈 염려도 없을 것이다.
호위들과 시종관들이 입구 좌우에 서 있고, 누마루 한쪽에 금 타는 사람과 장구 반주하는 사람이 앉아 연주를 하고 있었다.
금을 타고 있는 것은 첫날 밤 처소에 찾아왔던 엷은 적금발의 남자였다.
호란은 반가운 마음에 몇 발짝 다가갔다.
발소리를 들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호란을 보고 미소를 짓더니, 현에서 현으로 손을 옮기는 짧은 사이 왼손 손가락을 입가에 스치며 소리내지 말라는 모양을 해보였다.
호란은 발소리를 죽이며 얌전히 한쪽에 섰다.
금 소리가 물처럼 마음에 밀려들어왔다.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게 곡이 끝났다.
한 곡 더 타주지 않으려나 기다리고 있는데 회의장의 큰 문이 완전히 열리고 시종관이 발을 걷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현도 나오지 않았다.
담홍색 단령을 입은 관인 두셋이 누마루로 나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호란이 문간에서 기웃대고 있자 금을 타던 남자가 일어서서 다가왔다.
그가 살짝 호란에게 귀띔했다.
“아직 회의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두 각 동안 쉬는 시간입니다.”
“아아, 그래….”
호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청 반대편에 남녀 악공이 다른 악기를 들고 올라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장구 반주를 하던 사람도 그쪽으로 옮겨갔다.
호란은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남자에게 물었다.
“너는 더 타지 않아?”
“제 차례는 끝났습니다. 연주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렇구나….”
호란이 섭섭한 속을 숨기지 않자 남자가 부드럽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오늘 회의는 예정보다 길어질 듯합니다. 위를 기다리시는 동안 다른 곳에서 한 곡 더 들으시겠습니까?”
“그래도 돼? 네가 힘들지 않아?”
반색하는 호란에게 남자가 다시 웃었다.
“오시지요. 전악원으로 모시겠습니다.”
남자는 자리에 가서 금을 세워 들고 옆으로 난 계단을 내려갔다.
호란은 다른 호위들과 시종관들의 눈치를 살폈지만 다들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호란은 얼른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전각에서 거리가 벌어지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제 잠시 뵈었습니다. 위를 근위하는 분이시지요.”
“응. 호란이야. 너는 이름이 열이라고 했지.”
“기억해 주셨습니까.”
“금 소리가 정말 좋았거든. 난 음악을 잘 모르지만….”
호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칭찬하는 말을 하고 싶은데 뭐라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전악원은 문을 두 개 넘고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이었다.
규모가 꽤 컸다. 악공이며 딸린 사람도 여럿 드나들고 있었다.
열은 호란을 한쪽의 작은 별채로 이끌었다. 시종이 따라와 차를 들여주고 갔다.
정식으로 대접을 받는 느낌에 호란은 괜히 긴장했다.
열은 물을 한 잔 마신 후 무릎에 금을 올렸다.
“회의 때는 흘러드는 금 소리가 크면 좋지 않아 밖으로 트인 데서 연주합니다만, 저는 소리가 고이는 실내에서 타고 듣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김옥류 산조를 타겠습니다. 월침삼경이라고도 불리는 곡입니다. 반주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시작된 연주는 회의 때 들었던 가볍고 맑은 느낌의 곡과는 사뭇 달랐다.
묵직하고 고적한 음률이 속으로 속으로 파고들었다.
듣고 있으면 쓸쓸하고 서글픈 마음이 차오르는데 그게 싫지가 않았다.
아무 상관도 없는데 사부 생각이 마음을 스쳤다.
곡이 끝났을 때에야 눈물이 흐른 것을 알았다.
호란은 눈물을 닦고 말했다.
“고마워. 뭉클했어….”
열은 말없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호란이 말했다.
“놀랐어. 이런 세상이 있구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던 거 같아.”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열이 금을 옆으로 내려놓고 말했다.
“호란 님은 위를 모시고 어려운 길을 가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중하고 힘든 일 하시는 분께 작은 위안이라도 드렸다면 오히려 기쁜 일입니다.”
“아니, 나는 별로….”
호란은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이유도 없이 또 눈물이 솟을 것 같았다.
호란이 천천히 말했다.
“그랬나 봐. 사실 좀 힘들었나 봐…. 별 생각 안 했는데 네가 말해주니까 그런 생각이 드네.”
“지금 이곳에서는 마음을 편하게 놓아두셔도 좋습니다.”
열이 다정하게 말하며 호란에게 새로 차를 따라주었다.
호란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울컥했던 속이 내려가고 어깨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열이 물었다.
“곧 거석이 떼로 쳐들어온다는 게 사실입니까. 소문의 돌 인간이 이곳에 나타날 거라고요.”
“아…. 응. 정말이야. 돌 인간이 하는 말을 내가 직접 들었어.”
호란의 대답에 열이 눈꼬리를 내려뜨렸다.
“요사이 성 주변에 거석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덕택에 시장에 물자가 좀 돌기 시작했지요. 나쁜 소문이니 사교도 수그러드는 추세고요. 계속 이러면 좋을 텐데…. 역시 어려운 것이겠지요.”
“응. 그놈들은 사람 많은 큰 성은 전부 공격할 생각이야. 남운관도 치풍관도 아주 큰일이 됐었어. 윤지관은… 그나마 피해가 커지기 전에 막았지만.”
“그렇습니까….”
열의 얼굴이 흐려졌다. 호란은 자신과 열을 함께 위안할 겸 말했다.
“그래도 여기는 괜찮을 거야. 시문 님도 계시고, 미리 준비해서 다 같이 힘을 합치면 돌 인간들을 이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열은 어려운 얼굴을 했다.
“오며가며 들으니 준비가 순조롭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말이 분분하여 위께서도 많이 고단하시겠습니다.”
“어? 왜?”
호란은 놀랐다. 도시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 당연히 다들 협조해줄 줄 알았는데 뭐가 문제일까?
열이 물었다.
“위께서 별 말씀이 없으십니까?”
“시문 님은….”
호란은 어제 오늘을 되돌아보았다.
시현은 하유관에 와서 내내 정신없이 보내고 있었다.
군과 관의 사람들을 돌아가며 만나고, 처소에 돌아와도 무언가 서신 같은 것을 읽고 쓰느라 짬이 없었다.
단에게 듣기론 어제나 그제나 밤늦도록 서안 앞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얼굴이 밝지 않았고 지쳐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회의를 많이 하고 글씨를 많이 써서 당연히 피곤하시겠거니 생각했다.
바쁘시니 방해하지 말자고만 생각했을 뿐 괜찮으시냐고 먼저 말을 걸어볼 생각은 못 했다.
“뭐라고 말씀하신 건 없는데. 표정이 좋진 않으셨어.”
호란은 머뭇머뭇 말했다. 호위도 열심히 안 서고 시문 님 신경도 안 쓰다니, 자기는 뭐하는 사람인가 싶었다.
열이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사실을 말하면… 큰 난이 될 거란 이야기를 아직 반신반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위께서 허언을 하실 리야 없겠습니다만, 말씀 한마디에 총력전을 준비하기가 부담스러운 듯합니다.”
호란이 펄쩍 뛰었다.
“안 믿을 게 따로 있지! 진짜야! 녹렴이 내 눈앞에서 그랬어, 삼 주 안에 시문 님이 안 오시면 하유관 사람을 하나도 안 남기겠다고 한걸!”
“헌데 그자가 뭔가 제안을 하겠다고 했다면서요? 몇몇은 그걸 듣고, 제안의 내용에 따라서는 싸움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하나 봅니다.”
호란은 눈썹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가망 없어. 뭘 제안할진 몰라도, 응할 수 없는 얘길 할 게 뻔해. 결국은 싸워야 해.”
이제껏 본 돌 인간 중에 인간에 대한 호의가 가장 컸던 것이 사부 석영이었다.
그런 그가 호란에게 한 최선의 제안이 다른 사람 다 죽는 동안 어디 숨어 있으라는 거였다.
거리낌도 없이 수천 명을 죽여버리려고 했던 녹렴이 그거보다 나은 제안을 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어쨌든 열은 돌아가는 사정에 꽤 자세한 것 같았다. 호란이 물었다.
“열은 회의에서 땅님들이 무슨 이야기 하는지 다 알아?”
“어찌 다 알겠습니까. 다만 사이사이 쉬는 시간에 윗분들게서 나와서 말씀 나누시는 것이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회의장에서보다 더 솔직하게 의중을 보이시지요.”
“그래서 하유관 땅님들의 솔직한 생각이란 게, 싸울 준비 하기 싫다는 거야?”
호란의 얼굴이 험해지자 열이 곤란한 듯 웃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일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닥쳐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미리 대비하게 만들기란 쉽지가 않지요.”
“그래….”
호란은 남은 차를 마셔버리고 잔을 놓았다.
회의가 언제 끝날지는 몰라도 밖에서 기다렸다가 시현에게 얼굴이라도 보이고 싶었다.
“나 이제 회의장에 가볼게. 연주는 어떻게 사례하면 돼?”
“아닙니다. 저는 손님들을 모시라고 전악원에서 봉급을 받는 것입니다. 더구나 위께서 하유관을 염려하여 여기까지 걸음해주시지 않았습니까. 호란 님은 위로부터 믿음 받는 분이시니 마찬가지로 하유관의 중한 손님입니다. 더 해드릴 일이 없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열이 성의를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위께서나, 호란 님이나, 적적하시거나 귀가 심심하시면 밤이나 낮이나 언제라도 불러주십시오. 저는 그런 데 쓰이라고 있는 사람입니다.”
“응…. 고마워.”
고맙기는 한데 좀 멋쩍었다. 일어나려던 호란은 문득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다.
“열은 여기서 살아?”
“아니요. 민가에서 출퇴근합니다. 오늘도 곧 정리하고 돌아갈 생각입니다. 하여도 말씀 한 마디면 사람이 바로 부르러 올 테니까요. 호란 님이 찾으시면 언제든지 오지요.”
열이 곱게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호란은 왠지 부끄러워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으, 응. 아니야.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 또 봐!”
“예. 다시 뵙겠습니다.”
열은 호란을 전악원 입구까지 배웅해주었다.
호란은 한결 달라진 기분으로 회의장을 향했다. 허했던 속에서 기운이 솟았다.
* * *
그날 시현은 어제보다 일찍 처소에 들어왔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자마자 쉴 생각도 않고 바로 서안 앞에 앉았다.
책과 두터운 문서들을 쌓아놓고 연거푸 읽으며 한참을 고심하다가 무엇을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저녁상마저 미루고 받지 않았다.
그가 너무 집중하고 있어 호란은 기웃대기만 하고 말을 못 걸었다.
하지만 해가 떨어지고 창밖이 새카매지자 결국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시문 님, 저녁밥 드세요. 늦었어요.”
“아. 그래야지.”
시현이 서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지쳐 보이긴 했으나 눈이 빛났다. 표정에도 어제보다 활기가 있어 호란은 조금 안심했다.
“잘 되어 가세요? 이젠 회의가 좀 풀리나요?”
“음…. 그것은.”
회의 이야기가 나오자 시현의 눈에서 빛이 줄어들었다.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쉽지는 않다. 사람 움직이는 일이 어찌 쉽게 이루어지겠느냐. 심지어 도시 하나를 움직이는 일이다.”
“자기들 목숨 걸린 일인데도요?”
“심각성을 아직 못 느끼는 것이겠지.”
시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결국 문제는 마력석이다. 지금 하유관의 각처에 마력석이 조금….”
“없대요?”
“넉넉한 것이 문제 같다.”
“네?”
호란은 자기가 잘못 들었나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