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92
0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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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현이 설명했다.
“하유관은 군과 관에 마력석 비축하는 왕조시절 제도를 이제껏 잘 지켜왔다 한다. 덕택에 변고 후의 위기를 총령부가 비축한 마력석만으로도 잘 넘겨온 모양이다.”
“그럼 잘된 것 아니에요? 아직 많이 남았다는 거잖아요?”
“그렇다만. 이제 총령부에서는 총치부 각처와 대의약방이 비축한 마력석을 군에 일부 이양하고, 사가의 마력석도 적극적으로 징발하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총치부 관인들은 말로는 동의하면서도 서로 미루고 눈치를 보고 있고.”
“많다면서 왜요? 지금 마력석이 제일 많이 필요한 건 군이잖아요. 당연히 줘야죠!”
“아마도… 총령부에도 아직 남은 비축이 있고, 다들 여유가 있다니, 이왕이면 자기네 말고 다른 데서 내놓았으면 하는 거겠지.”
시현은 혼자 고개를 저었다.
“치풍관에서는 품에 하나뿐인 마력석도 너나없이 내어주더니마는. 여기 사람들은 손에 쥔 것이 많으니 계산도 많아지는 모양이다. 하기사 스무 개가 아깝다고 생각하면 다섯 개도 아깝고, 두 개도 아깝고, 결국 한 개조차 아까워지는 것 아니겠느냐.”
“그래도, 그래도 돌 인간이 나타나고 나면 다들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요?”
“그러면 좋겠구나.”
시현은 웃었지만 목소리에 씁쓸한 뒤끝이 남았다.
더 해줄 말이 없어진 호란은 다시 식사를 권했다.
“이젠 진짜 저녁상 들이라고 할게요. 이미 너무 늦었어요.”
“그러거라.”
호란이 문 쪽으로 가는데 복도에서 기척이 났다. 문밖에서 시종관이 고했다.
“나리마님, 느닷없지만 혜량하십시오. 총령이 급히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알았다. 들라 하라.”
시현이 놀라 말했다. 그가 서안 위의 문서를 서둘러 치웠다.
단이 곁방 문을 열고 손짓하는 것을 보고 호란은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호란이 단의 방에 들어가자 단이 작게 투덜거렸다.
“네 방 놔두고 왜 이쪽으로 와?”
하지만 이미 총령이 처소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단은 그냥 방문을 닫았다.
하유관 총령 정씨 계인은 중부에 흔한 진한 색 피부에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여성이었다.
나이는 아직 마흔 정도인데도 흰머리가 많아 원래의 적색 머리빛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계인은 무척 다급한 표정이었다. 자택에 있다 급히 달려왔는지 총령의 청단령이 아니라 평복 도포에 주름치마 차림이었다.
그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소리 높여 호소했다.
“문이시여, 큰일입니다. 벽명관이 깨졌다 합니다.”
“벽명관이!”
시현이 경악해서 큰 목소리를 냈다. 문 너머의 호란도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벽명관은 북방 서편에 자리한 관성도시로, 이 땅에 제일가는 마력석 산지였다.
“예. 북쪽 담무읍성에서 급히 파발을 보내왔습니다. 그곳에도 소문으로 흘러들어온 이야기라 확증은 없습니다만, 이야기의 앞뒤를 보니 헛말은 아닌 듯합니다.
징조도 없이 큰 지진이 났고, 곧바로 거석 떼가 사방에서 성을 몰아쳤다 합니다. 이어서 삼서산과 벽명산을 비롯해 일대의 마력석 광산으로 거석들이 몰려갔다 합니다.”
시현이 마른 소리로 물었다.
“언제 일이라던가?”
“그것은 보고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벽명관에서 여기까지 소문이 전해질 시간을 생각하면 거의 달포는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한가….”
시현은 한 손으로 눈을 짚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속이 깨져들어갔다. 그가 거인교도와 씨름하며 황야에서 길을 헛도는 사이에도 돌 인간들은 계속 사방을 습격하고 있었다.
“돌 인간의 이야기는 없었소?”
“목격담이 있기는 하나 여러 말이 다 달라 진실인지 알 수 없다 합니다. 치읍감이 사방에 수소문하고 있다 하니 곧 보고가 더 들어올 것입니다.”
“…….”
시현이 두 눈을 누른 채 더 말을 못 잇고 있자 계인이 목소리를 키워 시중꾼을 불렀다.
“밖에 있느냐. 문께 차를 들여드려라. 치자와 대추로 달여오너라.”
시현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되었네. 하유관도 대비를 더 서둘러야겠소.”
“당연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 홍작새들이 자꾸 말만 늘리고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으니.”
계인이 투덜거렸다.
홍작새는 총령부 법군들이 총치부 문관을 욕할 때 팔관성 공통으로 쓰는 말이었다. 울음소리가 다채로운 것과 담홍색 단령을 빗댄 표현이었다.
시현이 말했다.
“그래도 마력석 문제는 많이 가닥이 잡히지 않았소. 벽명관 일로 징발의 명분도 더 뚜렷해졌고, 내일 중에 다 결론이 날 것이오.”
“예에…. 그렇습니다만.”
계인은 닫힌 문 쪽을 한 번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문이시여. 지금 하유관의 진짜 문제는 마력석이 아닙니다. 외람됩니다만, 휘무 총치께서 군을 도통 믿지를 않으십니다. 사소한 일에도 관의 인가와 감찰을 받도록 해두고 물자도 전부 관이 좌지우지합니다. 그 탓에 일이 닥쳤는데도 무엇을 하기가 이렇게 힘든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엔 불만이 노골적으로 서려 있었다.
시현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했다.
“당장 어려움은 있으나 그 제도에는 사리가 있으니 감수해야 할 일이오. 관이 백성을 돌보니 군은 관의 지향을 따라가야 하오. 일이 자연하려면 총치가 총령을 겸하는 것이 가장 좋고 그러지 않는다면 총치의 명과 법제가 우선이오.”
“그것은 일반론이 아닙니까. 지금은 전시이고요!”
계인이 애가 달아 하소연했다.
“총치께서 무에 달하셨다 하나 현찰하시는 것은 토과, 수과, 금과와 잡과 몇 가지 뿐, 법군의 주력이 되는 뢰과와 화과에는 그리 이해가 없으십니다. 총치부에서 세 부리는 문관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군무에도 공격법술에도 문외한인 자들이 간섭은 간섭대로 하면서 물자는 틀어쥐고 내놓지를 않으니…!
중요한 건 마력석이 아닙니다. 사람의 사기가 중요합니다. 법군은 위축되었고 하늘족 대열에겐 영이 서지 않습니다. 이대로는 큰 싸움을 치러내기 어렵습니다.”
계인이 말하는 문제는 이틀간 시현도 느껴온 것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마력석이었지만 하유관의 군 운영 자체도 원활하지 않았다.
조직이 중복되어 각 권한이 속한 곳이 모호하고 명령 체계에 문제가 있었다.
계인이 말을 이었다.
“애초에 왜 일이 이 지경이 되었겠습니까? 휘무께서는 타고난 조건 때문에 전장에서 무력을 부리기에 적합지 않으셨지요. 해서 법군이라면 다 의심하시고, 사실은 귀가 들리는 사람 모두를 의심하십니다.
거스르는 자를 없이하고자 조씨의 친인척이라면 격이 못해도 중임을 척척 맡기고, 그밖의 사람은 온갖 향응으로 길들입니다. 그러기를 30년, 아니 31년입니다!”
시현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들으니 그것은 휘무가 크게 잘못하는 일이오. 허나 역사를 보면 그것은 세가 오래된 권력자라면 많이들 하던 일이 아닌가. 그에게 허물이 있은들 그를 전부 잔질(殘疾)* 탓으로 돌리는 것은 과연 어떨까 싶소.”
“그… 그것은 그렇습니다….”
계인의 얼굴에 무안한 빛이 돌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강변했다.
“그러니 더더욱 세가 묵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왕조를 폐한 이후 팔대관성 어디서도 한 사람이 30년을 계속 통치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관에도 군에도 총치를 위해 염탐하는 자들과 총치의 눈치 보는 자들로 가득합니다. 하유관 전체가 고여 썩은 물이 다 되었습니다. 어떻게 위기에 제대로 맞서겠습니까!”
계인이 비분강개하는 동안 시현은 생각에 잠겼다.
하유관의 군제에는 문제가 있었고, 계인은 이참에 총령으로서 그것을 바로잡고 싶어 했다.
다만 그것이 좋은 의도라 해도, 그런 의도들이 더해질수록 일은 복잡해지고 반대도 늘어난다.
시현은 그 같은 정치 싸움에 말려들어선 안 되는 입장이었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계인에게 선을 그을 수도 없었다.
총령 계인은 당장 시현의 편을 들고 항전파의 중심이 되어줄 사람이었다.
시현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드러내 보였다.
“그대의 걱정하는 바는 모두 이해하겠소. 내가 도움될 일이 있다면 좋겠으나… 나는 남운관 사람이 아닌가. 하유관의 제도 문제에 섣불리 말을 얹었다가 오히려 탈을 만드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소.”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문께서 일을 이루시려면 하유관의 사정을 아셔야 한다는 뜻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집안 흉을 본 것 같아 부끄럽군요.”
계인이 헛기침을 했다. 마침 시중꾼이 차를 들여왔다.
분위기를 바꾼 두 사람은 한동안 낮에 논의하던 장군석 대응 문제를 이야기했다.
몇 가지 이야기가 정리된 뒤 시현이 말했다.
“그대가 마음속에 하고자 하는 일은 흐트러진 군의 제도를 바로잡는 것이나, 과정과 결과를 놓고 보면 결국은 총치부에 대항하여 총령부의 권력을 키우는 일이 되오. 그에 대해 이해와 각오가 있소?”
“아.”
계인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그가 몸을 세우며 말했다.
“당연히 깊이 생각했으니 꺼낸 말입니다.”
“결국 싸우는 것은 군이오. 자연대로라면, 관성의 명운이 달린 큰 싸움을 이기면 놔두어도 군의 힘이 커지고 여러 문제가 해결될 것이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그 싸움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지금은 양 부의 위아래니 체면은 생각하지 말고, 버릴 것은 다 버린다 여기고, 오직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만 말해보시오. 가능하면 손을 맞추어보겠소.”
“예!”
계인의 눈이 빛났다. 둘은 새로 의논을 시작했다.
계인이 돌아간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그제야 시현은 야참상을 받았다.
방에서 안달을 내고 있던 호란이 나와서 벽명관 일과 시현을 걱정하는 말을 몇 마디 했지만 평소 습관을 못 이기고 금방 자러 갔다.
상을 물린 시현이 다시 서안 앞에 앉아 있는데 곁방에서 단이 나왔다.
그는 소리 없이 처소를 돌며 방을 환기하고, 유등을 번갈아 꺼서 식히고 유리에 낀 그을음을 닦은 다음 기름을 보충해 다시 켰다.
등이 식는 사이에도 시중꾼들이 준비해둔 시현의 의복과 침상을 확인했다.
시현은 붓을 놓고 잠시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하유관 시중꾼들이 시현은 물론 호란과 단의 주변까지 다 돌봐주고 있다.
그간 고생했으니 단 며칠이라도 잔신경을 안 쓰고 쉬어도 될 터다.
그런데 뭐라도 붙잡고 하는 것이 답다면 다웠다.
단은 평소 거의 강박적으로 일을 했다.
눈에 띈 일을 바로 안 하면 죽기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말로는 불퉁대면서도 여행길의 갖은 일은 물론 시현 신변의 잔일까지 빈틈없이 챙겼다.
위기가 오면 더 분주해졌다.
항상 먼저 간파하고 먼저 생각하고 먼저 움직였다.
딱딱 떨어지는 판단이 믿기지 않도록 빨랐다.
되돌아보면 은산에서 상황에 쫓겨 단과 호란 둘만 데리고 길을 나서게 된 것이 자신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지금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지 상상도 안 갔다.
물론 단은 시간이 지나도 곁을 안 주고, 틈틈이 성질을 부리거나 못된 소리를 하기는 한다.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그에게 투정하면 자기가 양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생각을 더듬던 시현은 문득 깨달았다.
요즘 들어 단이 싫은 소리 하는 걸 한 번도 못 들었다.
하유관에 닿기까지 쉴 새 없이 재촉해서 길을 달려왔는데, 단둘이 된 적이 없어선지 단이 저를 욕한 일도 화낸 일도 없었다.
속에 쌓인 게 잔뜩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때마침 단이 침소를 나왔다.
시현은 눈을 마주쳤다가 무슨 핀잔이라도 들을까 봐 서안으로 눈길을 내렸다.
처소를 한 번 더 둘러보고 서안 가까이 다가온 단이 말했다.
“오늘도 늦게까지 안 주무십니까? 피로하실 텐데요. 미리 진을 다 빼셨다가 놈들하고 싸울 때 어쩌시려고요.”
시현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단이 특별한 용무 없이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은 잘 없는 일이었다.
뿐아니라 단둘이 있을 때 걱정하는 말 따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문밖에 머무는 하유관 시중꾼들을 신경 써서인지 말씨까지 공손했다.
잠깐 멍했던 시현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무슨, 나한테 화난 것이 있느냐?”
(계속)
*) 장애의 옛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