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94
094화
* * *
“…….”
시현은 얼굴을 일그리고 각루 위의 법군 고위직들과 눈을 맞췄다.
몇몇은 눈을 피하고 몇몇은 매달리는 듯한 눈빛을 했다.
회의장에서는 항상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계인조차 질린 안색이 되어 말이 없었다.
시현이 호소하듯 팔을 벌렸다.
“다들 듣지 않았는가. 저들이 하유관을 치지 않겠다 한 것이 아니다. 단지 미루겠다 한 것뿐이다. 저들은 기필코 우리를 멸할 생각이고, 다른 이들이 싸울 때 함께 싸우지 않으면 더 괴로운 처지에 빠질 뿐이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현이 다시 말했다.
“두려운 것을 안다. 희생이 있을 것을 안다. 하지만 이것은 맞서 싸우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무, 문이시여….”
부총관이 주저하며 말했다. 그는 아직도 시현의 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협상에 덧붙여 남운관 주위의 거석을 거둬달라 하면 어떠십니까….”
시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분노로 물들었다.
그가 물러나 소매를 뿌리치며 소리쳤다.
“이것이 출신지 문제인가! 내가 하유관 사람이 아니라서 이 땅을 생각지 않는다 여기는가!”
“하지만 문이시여, 백성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싸움을 피하는 것은 백성의 목숨을 위하는 일이란 말인가! 다른 땅의 백성은 물론이고, 장차 이 땅에 물이 마를 것은 생각하지 않는가!”
“최소한, 최소한 총치께… 총치와 말씀을 나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현이 입술을 물었다.
사실을 말하면 그에게도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이것은 한번 물러나 버리면 돌이킬 수 없어지는 일이었다.
각루 위의 설왕설래를 지켜보고 있던 금강이 말했다.
“당장 결정하기 어려운가? 우리는 기다려줄 수도 있다. 어차피 처음에 말한 날짜까지 아직….”
금강이 멈칫하더니 녹렴에게 물었다.
“얼마 남았지? 일 주일은 안 남았나?”
녹렴은 옆에서 얼굴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꼽아보고 있었지만 곧 포기한 것 같았다.
녹렴이 표정을 고치고 엄중한 얼굴로 말했다.
“고민할 시간을 주지. 지금부터 3일을 기다리겠다! 사흘 뒤 정오까지 결정해라!”
호란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시문 님, 쟤들 날짜 잘못 센 것 같아요….”
시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아까보다 더 복잡했다.
돌 인간들이 시간 감각이 없다고 호란이 말해준 걸 미처 감안하지 못했다.
저들이 삼 주를 안 채우고 다짜고짜 정벌을 시작하거나, 어중간하게 늦게 나타나거나, 석영이 그랬다듯 삼 년 후에 오지 않은 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어떨지 몰랐다.
시현이 다시 금강과 녹렴을 향해 섰다.
“한 가지 물음에 답해줄 수 있는가?”
“동료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금강이 대답했다. 시현이 물었다.
“그대들을 돌의 혼이니, 먼저 살던 사람이니 하고 불렀던 것은 누구인가?”
“너희보다 앞서 살았던 인간들이지. 다른 문명을 일구고, 다른 사회를 이루고, 다른 언어와 문자를 썼던.”
금강이 가볍게 말했다. 각루 위의 사람들이 술렁였다.
시현은 헛웃음을 웃었다.
“숨기려는 생각도 없구나. 그 일을 우리가 어찌 여길지도 모르는구나. 그리 사람의 마음을 모르면서, 어째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가?”
녹렴이 검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턱에 얹었다.
“모르지는 않지. 지난 시대 인간들도 사실을 알고서 좋아하진 않더군. 하지만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너희 수를 줄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시현의 눈에서 분노가 불꽃처럼 튀었다.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가벼운 일처럼 수를 줄인다 말하지 말라! 그대들이 몇 번이나 이 일을 반복했는가? 인간이 늘어나 문명을 일구는 것을 지켜보고, 뜻에 거슬리면 부수어 멸하고, 또다시 지켜보기를…!”
금강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시현의 분노를 흥미로워할 뿐 마음에 감흥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너희가 스스로 멸망한 일을 제외하고 세면 이번이 다섯 번째가 된다. 언젠가 헤아리기를 잊게 되겠지만, 다행히 아직은 아니다.”
“다섯 번째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없을 것이다!”
시현이 주먹을 꽉 쥐고 부르짖었다. 녹렴이 냉연하게 말했다.
“우리야말로, 같은 일이 다시는 없기를 정말 오랫동안 바라왔어.
하지만 언제나 너희는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더군. 마치 자기들이 필멸의 존재인 것이 억울하다는 듯이.”
금강이 고개를 저으며 뒤를 이어 말했다.
“그럼에도 너희를 완전히 멸절시키지 않고 언제나 명맥을 이어가게 두었던 우리 마음을, 죽음 맞는 너희는 영원히 모를 것이다.”
“알고 싶지도 않다!”
시현이 소매를 떨치며 돌아섰다. 호란이 그를 잡아 보호벽 아래로 내려주었다.
시현이 벽 건너로 녹렴과 금강을 노려보며 마지막으로 선언했다.
“사흘의 시간을 준 데 사의를 표한다. 하지만 사흘 후에 우리는 싸우게 될 것이다.”
“문이시여!”
사람들이 허둥허둥했다. 녹렴은 거리끼는 기색 없이 말했다.
“일단은 기다려 볼게. 인간들은 자주 마음이 바뀌니까.”
시현은 대답하지 않고 각루를 내려갔다. 법군들이 제 번조차 버리고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시문이시여! 저건 도저히… 도저히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방도가 날 때까지라도 휴전에 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현은 앞만 보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땅인이자 법군이 아닌가. 백성을 지킬 자신이 없다면 싸우다 죽을 결기라도 갖지 못하겠는가.”
“주, 죽어서 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싸우지 않고서 될 일도 아니다.”
시현이 주위에 다 들리도록 목소리를 크게 했다.
“저들이 수를 줄인다느니 애매한 말을 쓰므로, 가엾은 백성이 저만은 살아남을지 모른다 여기고 사교에 빠지는 모습을 다들 보았을 것이다. 땅인인 그대들이 지금 똑같은 길을 갈 참인가?”
“그래도 일단 협상이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조금이라도 일을 유리하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저들과 무엇을 협상한다는 것인가.”
시현이 계단참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은 어두웠지만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저들이 어떤 자들인지 방금 듣지 않았는가. 문명이 완전히 사라지고, 언어와 문자가 뒤바뀔 때까지 사람을 멸한다는 게… 그게 대체 어떤 일인지,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나는 상상조차 못 하겠다.
그렇게 하고서 저들이 몇을 살려두면 그 사람들이 과연 살아남았다고 할 수는 있는 것인가. 그대들이 하루라도 사람으로 살고자 한다면 도저히 싸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하지만….”
시현의 말에도 주위의 법군들은 동요를 거두지 못했다.
부총관이 다급한 나머지 본심을 내뱉었다.
“그런 상대를, 저희가 어떻게 이깁니까?”
시현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부총관이 황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시현은 몸을 돌려 몇 발짝 뒤에 있는 총령 계인을 향해 말했다.
“그대의 걱정을 깊이 알겠다. 정말로 하유관 법군은 사기가 없구나.”
“부끄럽습니다.”
계인은 어두운 안색으로 그렇게만 말했다.
허둥대고 애걸하던 법군들이 눈치를 보며 시현과 계인의 사이에서 물러났다.
시현이 선언했다.
“싸움은 반드시 있을 것이니 각오를 굳히라. 마력석이든, 병기든, 무엇이든… 하유관의 모든 것을 내어 총력을 다할 준비를 하라.
당장은 저들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니 성문을 열어 피신해온 백성을 맞아들이라. 나는 총치를 보겠다.”
시현은 성벽의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빠른 발걸음에서 다 못 누른 화가 느껴졌다.
보통 지위 있는 법군들은 높은 성벽 꼭대기를 오르내릴 때 작은 남여에 타거나 하늘인 수행의 도움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시현이 제 발로 그 긴 계단을 다 내려가니 다른 고관들도 발길을 무르지도 못하고 괜히 끝까지 따라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밑에는 이미 수레가 와 있었다. 호란은 총치전까지 시현을 따라갔으나 시현이 총치와 독대하게 되어 물러났다.
독대 후에도 바로 당상 회의가 있을 것이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고 해서 호란은 일단 처소에 돌아갔다.
단에게 상황을 알려주고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다.
녹렴이 끌고 온 거석 떼에 질린 건 호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하유관에 마력석이 그렇게 많다니 아예 못 싸울 일은 아니다.
시문 님도 계시고 다른 땅님들도 많다.
문제는 땅님들이 싸우기도 전에 너무 겁을 먹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거석하고 싸우는 건 몰라도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다. 단이 뭔가 좋은 생각을 해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좀 있었다.
성 주위에 나타난 거석이 얼마나 많은지 듣고 단도 심각해졌다.
호란이 이야기를 전부 마치자 단은 팔짱을 끼고 심사숙고에 빠졌다.
조금 후 그가 얼굴을 들고 호란을 보았다.
단은 더없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솔직히 난, 그 제안 완전 꿀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뭐?”
“그찮아. 거석 안 쳐들어오고, 비축한 마력석 좀 있고. 한 쪽에 시문 다른 쪽에 휘무 끼고 지내면 최소 물은 안 마르지 않겠냐? 다른 관성 다 망하는 사이에 여기 짱박혀서 20년 살아남으면 그걸로 이긴 편에 들어가는 거 아닌가.”
호란은 기가 막혀서 말도 잘 안 나왔다.
그는 단을 붙잡아 탈탈 흔들기라도 하고 싶은 걸 꾹 참고 항의했다.
“그게 어떻게 이기는 거야! 누구한테 이기는 건데?”
“나보다 먼저 죽는 놈들을 이길 수 있잖아.”
“그런 거 이겼다고 안 해!”
“너야 모르겠지만, 반민들은 살아남은 걸 이긴 걸로 쳐.”
호란은 단이 농담을 한다고 믿기로 했다.
사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게 믿기로 했다.
호란이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말도 안 돼…. 정말 무슨 생각 없어?”
“생각이야 해보겠는데.”
단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나라도, 저 꽉 막힌 시문 나으리가 그 제안을 받게 만들 방도는 떠오를 거 같지가 않다.”
“그 생각을 하라는 게 아니야!”
호란은 답답해서 섰다 앉았다 했다. 이제 보니 내부에 적이 있었다.
호란이 상심해서 물었다.
“다른 땅님들도 다 단처럼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하유관 바깥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당장 20년만 살면 된다고?”
“상관이 없다기보다.”
단이 불편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항전이라니. 그거 말은 그럴싸한데, 사람이 죽잖아.”
“가만히 있어도 결국은 다 죽어!”
“싸우고 죽으나 안 싸우고 죽으나. 결국 죽을 거면 싸울 필요도 없지.”
“결국 죽을 거면 싸우기라도 해야지!”
호란이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단이 턱을 괴면서 웃었다.
“하하. 이게 나 같은 놈들하고 몫꾼 나리들의 차이지. 근데 한 가지 물어보자. 너나 시문 나리나, 말로는 죽음을 불사하고 싸운다고 하지만 어떻게 잘하면 살아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호란이 눈을 깜박였다.
“당연히 이기려고 싸우는 거지. 싸워서 이기면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고.”
“흠. 그러시겠지.”
단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난 싸움이 나면, 이기든 지든 내가 제일 먼저 죽을 거 같거든. 당연히 확실한 20년 쪽이 더 꿀이지. 20년이 뭐야, 요즘 같아선 5년도 감지덕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