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97
097화
* * *
무형의 충격파가 시현의 등 뒤로 천장과 벽을 때려부쉈다.
밖으로 난 벽에 할퀴어낸 듯한 구멍이 수 갈래로 뚫렸다.
거실 세간은 다 형체도 없어졌다.
윤의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혼비백산했다.
모였던 시중꾼과 병사들이 모두 꿇어엎드리고, 윤의와 젊은 의법사가 허둥지둥 수그리며 사정했다.
“무, 문이시여! 문이시여!”
“고정하십시오, 문이시여!”
서안 위의 마력석 여럿 중 하나가 불타 실그러져 있었다.
시현이 번뜩이는 눈으로 윤의를 노려보았다. 그가 말했다.
“마력석이 그렇게 아까우냐? 나는 하나도 아깝지 않다. 네가 이 돌을 쓰지 않겠다면 내가 다 쓰마.”
그가 손을 뻗어 서안 위에 남은 마력석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다음에는 이것으로 네 오른팔을 치겠다. 그래도 안 쓰면 심장을 치겠다.”
윤의는 덜덜 떨며 소리쳐 항변했다.
“문이시여! 이건 위아래 법도를 범하는 일입니다! 통촉하소서!”
“내가 허언을 하는 것 같으냐.”
시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손끝이 서안 위의 마력석에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윤의가 떨리는 손으로 마력석을 가져갔다.
한 손으로 마력석을 쥐고 다른 한 손을 단의 가슴에 올린 그가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호란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지켜보았다.
천천히 단의 얼굴에서 불그레한 색이 빠져나가고 숨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젊은 의법사가 옆에서 보고 있다가 때에 맞게 침을 뽑아 혈을 틔웠다.
윤의가 세 개째 마력석을 바꿔들 때쯤에는 단의 팔에서 검붉은 흔적이 스러지고 손의 붓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윤의가 호란에게 말했다.
“놓아두고 물러나라. 손발이 쭉 펴지게 바닥에 똑바로 눕혀라.”
호란은 단의 상체를 천천히 눕히고 일어나 팔다리를 정돈했다.
받쳐 주던 손이 빠져나가자 단이 부르르 떨었다.
젊은 의법사가 단의 안경을 벗기고 방석으로 머리를 괴어주며 소곤대는 소리로 달랬다.
“됐어. 됐어. 너 이제 살았어. 팔도 멀쩡해졌어. 잘했다. 잘 버텼다.”
“…….”
단은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호란은 수건을 가져왔다. 얼굴의 진땀을 닦아주자 단이 기운 없이 눈을 마주쳐 왔다.
호란은 격려하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금 후 단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몸이 축 처지는 것이 아예 정신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숨소리는 편안해졌고, 윤의나 젊은 의법사가 뭐라 말하지 않는 걸 보니 괜찮은 모양이었다.
윤의가 완전히 형태를 잃은 마력석을 내려놓고 시현을 향했다.
그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독 기운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상한 혈맥도 다스려두었으니 잘 쉬면 며칠 안에 깨끗하게 회복할 것입니다.”
호란은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윤의가 단의 팔을 자르자느니 말할 때는 때리고 싶을 만큼 미웠는데 지금은 그저 고마웠다.
윤의가 마저 말했다.
“다만 이삼일 간은 두통이 있고 숨이 차거나 까닭 없이 울화가 솟는 등의 증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약을 쓰기보다는 자연에 맡기는 게 낫습니다. 흥분하면 병이 더칠 수 있으니 심정을 가라앉히고 잘 쉬어주어야 합니다.”
“알았다. 수고하였다.”
시현이 눈을 감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이마에 옅게 땀이 어려 있었다.
윤의가 불편한 얼굴로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면, 소생은 이만….”
시현이 앉은 채 낮게 말했다.
“어딜 가느냐. 사법관이 올 때까지 앉아 있거라.”
“예? 아, 증언이라면 서면으로 하겠습니다. 진단도….”
“여기 있으라 하였다.”
시현이 윤의를 보았다. 그가 무감하게 말했다.
“네가 올라왔을 때, 중독된 사람이 내가 아님을 알고 실망한 얼굴 한 것을 다 보았다. 그리 얇은 낯짝을 갖고 잘도 나를 모살하려 했구나.”
윤의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문이시여, 천부당합니다! 제가 잠시 명을 거슬렀다고 누명을 씌우시는 것입니까!”
“네가 문령을 거역한 것은 알고 있구나?”
시현이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윤의는 입을 다물고 얼어붙었다.
워낙 소란이 컸던지라 이미 사람이 잔뜩 모여 있었다.
병사들 사이에서 금대를 띤 관인이 나와 제가 사법관이라 고했다. 시현이 침소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가 내 적삼에 독침을 꽂아두었다. 흉수에 무고한 사람이 큰일을 당했다. 당장 조사하라. 극독이니 침을 거둘 때 주의하라.”
사법관이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적삼이라면 어느 것을 말씀하십니까?”
“침소 바닥에 떨어진 것이 있을 것이다.”
사법관이 주저하며 말했다.
“그것이…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호란이 벌떡 일어났다. 정말이었다.
바닥의 적삼은 물론 침상 옆 협탁에 있던 옷가지들까지 흔적도 없었다.
단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누가 언제 거둬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현이 무릎에 둔 주먹을 꽉 쥐었다. 분노로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 * *
순식간에 말이 퍼져나갔다.
오후에 열린 당상 회의는 항전 논의를 위한 것이었으나 다들 붓을 들기 무섭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
윤의는 조씨와 혼맥으로 겹겹이 맺어진 언씨 가문 사람이라 편드는 이가 많았다.
하필 이날은 전날 독대 때에 시문과 휘무가 크게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오전부터 파다했다.
덕택에 사람들은 더 거리낌이 없었다.
좌에 앉은 총치에게 의견문이 줄줄이 올라갔다.
― 땅인은 허물을 범한들 반천에 관한 일로는 죄를 받지 않는 것이 법도입니다. 하물며 반천의 목숨과 견주어 상격에 달한 이를 죽이겠다 겁박하시다니 위아래가 뒤집힌 일입니다!
― 비상한 시국에 아무 증거 없이 사람을 모살자라 비난하시는데 의도가 의심스럽습니다.
― 당장 포위된 것은 하유관인데 시문께서는 하유관의 안위에는 도통 관심이 없으십니다.
― 시문께서 하유관에 의탁하신 처지로 처소와 기물을 부수며 패악을 하시고, 하유관 관인을 폐격하겠다 하실 수 있습니까? 설령 폐격한들 서격원이 응하지 말아야 합니다!
― 앞뒤를 보면 하유관에 돌 인간을 끌어들인 것이 시문이 아니십니까. 응당 스스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휘무가 의견문을 읽고 다시 아래로 내려보냈다.
다른 관인들이 차례로 의견문을 돌려보며 찬성하는 의미로 표를 찍거나 첨언을 썼다.
평소 회의 때 휘무는 논제에서 벗어난 의견문은 흘긋 보고 구겨버리곤 했다.
관인들에게 글을 돌린다는 것은 휘무 역시 이 일을 심각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회의의 시작이 이랬으니 본론에 들어가서도 분위기가 바뀌지 않았다.
당장 구체적으로 항전을 논하는 이들은 줄어들고, 돌 인간과 협상을 더 해보자, 주어진 사흘의 기한이라도 더 늘려보자는 의견문이 압도적이었다.
시현은 모살 문제를 먼저 조사하자는 핑계로 원래 가기로 되었던 당상 회의에 불리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조사가 제대로 진전된 것도 아니었다.
부서진 처소를 옮기고 시중꾼을 바꾸는 것만으로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갔다.
나중에 계인이 새 처소에 찾아와 회의에서 오간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그간 시현과 말을 맞추어 항전 논의에 앞장서 온 만큼 그도 입장이 난처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시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차라리 나더러, 그대들의 20년인지 5년인지와 바꾸어 죽으라고 솔직하게 말하지를 않고.”
“다,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감히 누가 그런 속을 품겠습니까.”
“누군가는 그런 마음을 품었으니 내 처소에 독이 놓였겠지. 모르고 하는 말인가.”
시현의 목소리엔 뚜렷한 가시가 있었다.
계인이 얼굴을 찌푸리고 고심했다.
“그것이… 저는 일이 영 사리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몇 년이고 간에, 문께서 몸 성히 계셔야 돌 인간들을 억제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대체 누가 무슨 생각으로…. 어쩌면, 이번 일은 그저 협박할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협박이라기엔 수법이 지나치게 흉악하지 않은가. 내가 평소 옷 입는 데 시중 받지 않는 것을 처소 시중꾼들이 다 알고 있소. 자리에 놔두었으면 내가 모르고 입었을 텐데, 자칫 깊이 찔렸으면 협박당하는 걸 알 틈이나 있었겠소. 단이 바지런하여 그냥 두어도 될 일을 한 번 더 살피다가 자기가 변을 당한 것이오.”
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좋은 종자를 두셨습니다. 아끼시는 마음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위를 대신하여 위험을 입는 것도 아래의 일입니다. 이번 일은 조금 과하셨던 게….”
“그리 말하지 마시오. 위험 입히려고 사람을 곁에 둔 것이 아니오. 더구나 내가 아끼는 이가 아니라면 상해도 된다는 말인가.”
“하하….”
계인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말씀은 지당하십니다만, 이번 일로 문께서 위엄을 크게 잃으신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위로서 항전을 이끄시려면 좀 더 체통을 지키고 공평무사를 보이셔야 합니다.”
시현은 침묵했다. 계인이 짐짓 위로하듯이 웃어보였다.
“괜찮습니다. 저는 그러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께선 아직 어리시지 않습니까. 머리로는 대소사 구분을 해도 넘치는 혈기가 자제가 안 되지요. 그 나이엔 다들 그렇습니다. 흉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차차 현실을 배워가시면 됩니다.”
시현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다섯 발짝 뒤에 호위로 선 호란은 터지는 화를 참으려고 몇 번이나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제껏 어디 가서도 시문 님이 이렇게 어리고 철없는 사람 취급을 받은 적이 없었다.
반민을 감쌌다는 게 이렇게까지 흉을 보일 일인가?
그럼 단이 죽든 팔을 잘리든 내버려 두는 게 현실을 아는 어른의 행동이란 말인가?
단이 잠들어 이야기를 못 듣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의법사님이 며칠간은 화내면 안 된다고 했는데, 자기가 단이라면 도저히 분을 못 견딜 것 같았다.
계인이 떠날 때 시현은 인사를 반쯤 건성으로 받았다.
나간 후에도 그냥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호란이 옆에 와서 붙어 앉았다.
“시문 님.”
호란은 분에 찬 목소리로 시현을 한 번 불렀을 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말하지 않아도 시현은 그가 하고픈 말을 알 터였다.
시현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위아래의 법도고 무엇이고 다 지긋지긋하다. 내가 대체 무얼 위해서….”
그때 곁방의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호란도 시현도 똑같이 고개를 들었다.
홑저고리 차림의 단이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단!”
호란이 와당탕 소리를 내며 그에게 달려갔다.
그가 단을 와락 끌어안으며 물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야, 붙지 마. 붙지 마.”
단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호란을 뿌리치려 하지 않았다.
저를 붙들고 후들후들 떨고 있는 소녀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을 뿐이었다.
그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아주 가뿐해.”
“진짜로?”
“응. 오히려 평소보다 기운찰 정도야. 의법술 효과가 굉장한데.”
호란은 팔을 풀고 떨어져 단을 샅샅이 살폈다.
정말이었다. 안색도 선 모습도 평소와 다를 게 없고, 눈빛에도 힘이 있었다.
겨우 안심이 된 호란은 다시 단을 끌어안으러 갔지만 이번에는 단호하게 뿌리쳐졌다.
시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단에게 몇 발짝 가까이 오지도 못했다.
그가 떨어져 선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안하다, 단….”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