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98
098화
* * *
“아니 왜 나리님께서 미안하십니까. 제가 지금 몸 성한 게 누구 덕인데요.”
단은 넉살 좋게 말했다. 시현의 얼굴이 더 흐려졌다.
“애초에, 그 독은 나를 노리고 심어진 것인데….”
“이렇게 무사했으니까 되지 않았습니까.”
단이 반쯤 팔을 벌려 보였다.
“제 팔자에 격 달한 의법술사님 치료도 받아보고. 전부터 뒷목 뻣뻣하던 것까지 덤으로 풀린 것 같은데요. 이득 본 셈 치지요.”
“…….”
시현이 대답을 못 하고 있자 단이 화제를 바꾸었다.
“범인은 가닥이 잡혔습니까?”
“아직이다.”
“음….”
단이 조금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 적삼은 나으리 것이 아니었습니다. 옷 둔 자리도 평소하고 달랐고요. 그런데 옷의 치수하고 재질은 입으시던 것하고 똑같았어요. 저도 보고서 하유관 침방에서 옷을 새로 지어다 올린 줄 알았거든요.
그러니까, 범인은 처소 시중꾼들은 아니지만 처소 시중꾼이나 그 주위에서 꽤 세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자라 보면 됩니다. 거기서부터 좁혀가 보시죠.”
“알았다. 사법관들에게 그리 이르마.”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서안 앞에 가서 단이 말한 것을 적기 시작했다.
단이 앞에 앉아서 더 세세하게 몇 마디를 덧붙였다.
시현이 다 적어갈 때쯤 단이 다시 말을 꺼냈다.
“꼬리를 찾는 것보다도. 배후를 생각하는 게 더 중요한데요….”
“아니다. 너는 복잡한 생각 말고 가서 쉬거라. 의법사가 네게 며칠간 잘 쉬라 했다. 의법사가 그리 말하는 것은 대체로 자리에서 꼼짝 말라는 뜻이다. 더는 아무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단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새 처소를 둘러보고 인상을 썼다.
“저도 그러고는 싶은데, 처소 꼬라지가….”
호란은 이 방도 아주 좋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단을 말렸다.
“내가 정리할게! 단은 쉬어!”
“이전 방이 부서져서 급히 옮기느라 그런 것이다. 당장 불편은 없으니 걱정 말고. 신변도 내가 알아서 하마.”
시현도 말했다.
단은 미소를 짓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가 탄복한 듯이 말했다.
“세상에 이렇게 신용이 안 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차라리 뭐 하지 말고 놔두세요. 놔두면 보다 못해 누가 돌봐주러 오겠죠.”
“그래. 그러마.”
시현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멈칫했다. 그가 눈을 꽉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호란이 바로 그를 붙잡았다.
“머리 아파? 의법사님이 머리 아플 거라고 그랬어.”
“조금…. 갑자기 일어나서 그런가.”
시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의법사가 말하길, 이삼 일 동안은 두통이 있고 숨이 차거나 까닭 없이 울화가 솟는 일이 있을 것인데, 화를 내면 기혈이 상할 수 있으니 주의하라 하였다.
걱정이 크다. 너는 그러잖아도 버럭버럭 화내는 일이 잦은데.”
단이 호란에게 의지한 채 눈을 가늘게 하고 시현을 보았다.
“아, 뭔지 알 것 같은데요. 근데 제 생각엔, 지금 이게 꼭 까닭 없는 울화는 아닌 거 같은데.”
“쉬거라. 어서.”
시현이 황급하게 말했다.
호란은 단을 부축해 곁방으로 데려가 요 위에 앉혔다.
단이 기운 없이 말했다.
“나 부탁 좀…. 주전자에 물 좀 채워줄래.”
“응!”
호란은 바로 대답했다. 물을 채워 가지고 돌아온 호란이 물었다.
“쉬어. 뭐 더 필요한 거 있어? 맞다. 밥은?”
“몰라. 다 싫어….”
단이 벽에 등을 기대며 투덜댔다.
“20년 살아남는 상상만 좀 할랬더니 하루 만에 뒤질 뻔한 사람 마음을 니가 알겠냐. 이 인생은 꿈조차 못 꿔. 뭐 되는 게 없어.”
호란은 단의 곁에 무릎을 붙이고 앉으며 말했다.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나랑 시문 님이 반드시 지켜줄 거야.”
“됐어. 여기서 뭘 더 해달라고. 안 그래도 저 양반이, 내 팔뚝 하나 건사할랬다가 오만 데서 포화 맞고 있다면서.”
“…총령님 얘기, 다 들었어?”
호란이 속상해하며 물었다.
단이 안경 밑으로 눈을 문질렀다. 그가 이를 꽉 악물었다가 억눌린 소리로 말했다.
“내 일이고, 길이 일이고, 그동안 신세 입은 것도 모자라서…. 이젠 내가 아예 저 나리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아냐. 그런 거 아니야.”
호란이 단의 어깨를 잡았다.
“이건 누가 누구 신세를 지고 그런 게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면, 단이 옷을 미리 확인 안 했으면 시문 님이 찔렸어. 단이 시문 님을 구해준 것도 되는 거야.
그리고 시문 님이 지켜봤으니까 뭐가 됐지. 만약에 중독된 게 시문 님이었으면… 나쁜 맘 먹은 의법사가 치료하는 척 죽게 내버려 뒀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거야….”
호란은 하고 싶지 않은 상상에 울컥했다가 덧붙였다.
“그렇다고 단이 찔린 게 더 낫단 얘기가 아니고!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
“알아. 그렇게까지 꼬아서 안 들어.”
단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호란을 보지 않았다.
호란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단. 한번 같은 무리가 됐으면, 각자 자기 몫을 하면서 서로 보호하는 거야. 누가 누구 신세 지고 이런 거 너무 따지는 거 아니야.”
단은 헛웃음을 흘렸다.
“같은 무리…. 그 양반하고 나하고? 너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구나.”
그는 호란이 더 말하기 전에 덧붙였다.
“가봐. 지금 네가 나리님 혼자 두면 안 돼.”
“하지만 단도 아프잖아.”
단이 짜증 내는 표정을 했다.
“나보다 나리님이 우선이지.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되냐?”
“우선 같은 게 어딨어….”
사실 있었다. 호란도 알았다. 그는 시현의 호위였고 시현이 우선이었다.
큰몫꾼은 무리 전부를 지킨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단을 못 지켰다.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유관은 호란의 몫도 단의 몫도 영 소용이 없는 곳 같았다. 지금 이곳에서 중요한 사람은 시현뿐이었다.
그 시현조차도, 어떤 이들에겐 5년의 보신과 맞바꾸면 그만인 대상이었다.
호란은 스스로가 이토록 작게 느껴진 것이 처음이었다.
15. 정산
시현은 그날 더 회의에 가지 않고 서안 앞에만 있었다.
전갈꾼 두엇이 왔다 간 것 말고는 그를 찾는 사람도 없었다.
녹렴과 금강이 준 사흘 중 하루를 이렇게 끝내도 되는 건가 싶어져 호란은 초조했다.
일이 진전되기는커녕 뒷걸음질친 것 같이 느껴졌다.
밤이 깊어갈 때쯤에 하늘인 호위 다섯 사람이 찾아왔다.
“총치께서 보내셨습니다. 야간을 틈타려는 자가 있을지 모르니 곁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이마에 흰 띠를 두른 머리가 문간에 서서 고했다.
시현은 그들에게 방문 밖을 지키라 명했다.
호란은 복도로 나가서 몫꾼들과 통성명을 했다.
여차할 때 함께 싸울 사람들이니 서로를 눈에 익혀두어야 했다.
몫꾼들은 버젓한 옷을 걸쳤고 허리에 칼도 찼지만 기세는 그저 그랬다.
그다지 몫이 큰 꾼들 같지가 않았다.
시문 님 호위에 이런 사람들밖에 못 보내주나.
은근히 골이 난 호란은 곁방에서 쉬는 단에게 불평하러 갔다.
단은 등을 켜둔 채 깜박 잠들었던 것 같았는데, 사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호위가 새로 와? 이 시간에?”
이야기를 들은 단은 얼굴을 굳혔다.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진남색 소창의를 꺼내 걸치고 옷태를 추슬렀다.
호란은 조금 놀랐다.
그 옷은 이제까지 단이 입기는커녕 쳐다보기도 싫어했던 물건이었다.
윤지관을 떠날 때 시현의 할머니 래연은 호란과 단의 옷도 여러 벌 챙겨주었다.
모양도 옷감도 바느질도 모두 훌륭했고 아래의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돈을 쓴 표가 뚜렷했다.
문의 수행에 걸맞는 태를 갖추라는 무언의 요구가 느껴졌다.
호란은 하유관에서 시현을 호위할 때 매번 그 옷들을 입었다.
하지만 단은 이제껏 한 번도 걸치지 않았다.
팔아치우지 않는 것이 자기의 최대 성의이며, 이 성의는 기간 한정이라고 했다.
뒀다가 먼 동네 가면 팔아치울 거란 뜻이었다.
그러던 걸 단이 입은 데다 장식 달린 세조대까지 두르는 걸 보며 호란은 눈만 깜박거렸다.
옷태를 다 추스른 단이 거울을 보고 머리칼을 정리했다.
짧아서 뭐 만질 것도 없어 보였는데 그는 심각했다.
그가 내실로 나가자 시현이 모습을 보고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단은 시현이 뭐라 말하기 전에 처소 문을 열고 문간에 섰다.
밖에 있던 호위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호위들은 하늘인이었지만 단은 웃지도 인사하지도 않았다.
그는 노골적인 눈빛으로 호위들을 위아래로 훑더니 딱딱하게 말했다.
“금표를 두겠습니다. 복도 밖까지 물러나십시오.”
호위들은 발끈했다.
“우리는 호위다. 그렇게 떨어지면 무슨 몫을 하느냐?”
“문께서는 기운에 민감하셔서 하늘족이 주위에 많으면 불편해 하십니다. 일이 있으면 소리 내어 부를 테니 문에서 열다섯 걸음 밖으로 멀어지십시오. 이것은 정식 시위 아닌 하늘족 모두에게 적용되는 법도입니다.”
단의 목소리에선 오만한 기색마저 느껴졌다.
방 안에 잘 있는 호란이 불편해질 정도였다.
호위들은 얼굴을 잔뜩 일그렸지만 더 말을 못 하고 복도 끝까지 물러났다.
문을 닫은 단은 빠른 걸음으로 내실로 돌아왔다.
시현이 영문을 몰라 하며 그를 불렀다.
“단?”
단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시발, 감이 더러운데. 나리님, 겉옷 걸치세요. 여기 안 되겠어요. 튑시다.”
그가 침소로 들어가서 시현의 옷가지와 흑혜를 꺼내왔다.
시현은 사태 파악을 못 한 얼굴이었지만 일단 도포를 걸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단은 곁방에서 제 걸낭과 천으로 감싼 총통을 가져오고 서탁에서 마력석 함을 내렸다.
규탄받는 걸 내버려 두긴 했어도 하유관에서는 시현의 마력석 함을 다시 채워주었다. 단은 대련을 열어 그 마력석을 전부 담았다.
호란은 아직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뭐야? 뭔데?”
호란이 묻자 단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밖에 선 호위가 칼 찼잖아. 그 새끼들이 진짜 호위하러 온 거 맞을까? 너네 니들끼리 싸울 때 칼이니 창 같은 거 안 쓰잖아. 길이가 팔뚝으로 날붙이 막는 걸 내가 몇 번을 봤는데.”
그건 사실이었다. 무기는 손발보다 다루기 어렵다.
공격 방향을 읽히기 쉽고 헛점도 많다. 놓치기도 쉽다.
제대로 된 몫꾼이 몸에 기세를 담으면 어설프게 찌른 날붙이는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
하늘인끼리 싸움에선 아무도 무기를 안 썼다.
호란은 그래도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추선은 호위인데 칼 차잖아….”
“그거 추선이 어디다 쓰디? 온강 출신 하늘인들이 칼 차는 건 윗전한테서 아랫것들 벌할 권한을 받았다는 표시 같은 거라고. 요새는 허세로 아무나 다 차더라마는, 그것도 온강 놈들이나 그러지.”
단은 말하는 동안에도 손을 움직여 제 짐을 다 챙기고 마력석 대련을 시현에게 메어주었다.
시현도 의복을 다 갖추고 서안에 있던 문서를 추리고 있었다.
호란은 얼굴을 굳혔다.
확실히 하유관에선 칼 찬 몫꾼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이 방엔 칼 맞으면 죽을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고 단에게 물었다.
“저 자식들, 내가 나가서 다 패버릴까?”
단이 신을 신으며 고개를 저었다.
“복도… 복도는 안 좋아. 네 몸은 하나고, 어디서 몇 놈이 튀어나올지.”
그가 내실의 큰 창문을 열어젖혔다.
3층 창 아래 펼쳐진 아래층 지붕 위로 하늘인 대여섯 명이 슬금슬금 기어서 접근하다가 단과 눈이 마주쳤다.
“젠장 이쪽도 안 좋네. 그래도 트인 쪽으로 튑시다. 나으리!”
시현은 이미 하늘인들의 기운을 느끼고 마력석을 손에 들고 있었다.
“몰아쳐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