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0)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0화(100/1105)
100회
24. 공작님과 성검의 주인 (4)
선택의 날로부터 일주일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요즘 세르펜스의 주 업무는 편지의 답장이다. 웬만하면 근무 시간에 그런 걸 들고 오는 녀석이 아닌데, 매일같이 청혼서가 밀려오는 탓에 거절하느라 바빴다.
“이미 제국의 귀족 가문에게는 다 날아오고도 남은 숫자 같은데···.”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미혼의 딸이 있는. 없으면 조카까지 동원한 귀족 가문들에게서 청혼서가 날아들었다.
“그건 모두 처리했고, 지금 쓰는 건 외국에서 도착한 것들의 답신이다.”
왜 이딴 것에 시간 낭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세르펜스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척 봐도 귀찮은 일이지만, 똑같은 글을 반복해서 쓰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골머리를 앓는 모습이다.
의아한 마음이 들어 다가가서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 세계에서는 청혼에 대한 거절서가 오면, 까인 자들끼리 돌려 읽는 문화라도 있는 겁니까?”
해당 가문에 관한 관심이 담긴 인사말로 시작하여, 다른 답변들과 최대한 문장이 겹치지 않도록 표현 등을 바꿔가며 쓰고 있었다.
참으로 지극정성이 따로 없다.
그래도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현재는 대륙의 정세(情勢)가 불안정하니, 혼인은 그 이후로 미루고 싶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하지만 다 핑계겠지.’
휴마누스만 해도 성검의 선택이 끝나자마자 결혼할 생각에 들떠있지 않았던가.
제국의 둘 뿐인 공작이 후계도 없이 미혼이라는 건 말도 안 되었다.
단지, 세르펜스가 사랑 없는 부모 밑에서 온갖 학대를 받으며 자라왔기에.
자신이 누군가의 남편이 된다는 것과 누군가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극심한 거부감과 공포심 때문에 밀어내고 있는 걸 테다.
“대놓고 그러한 것은 아니나, 은연중에 그 내용을 비교하며 성의를 트집 잡고 깎아내리는 경우가 간혹 있다. 조심해서 나쁠 거야 없지.”
“뭐 그딴 놈들이 다 있답니까?”
괜한 화풀이가 따로 없다. 자기네야 편지 한 통 보낸 것이 전부지만, 받는 쪽에서는 답장해야 할 게 산더미다.
이 시대에 복사 붙여넣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내용쯤이야 똑같아도 이해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아···. 선우, 그대가 읽은 내용에서도 이랬나?”
“청혼서 세례요? 일단 본문 상에는 없었는데···.”
확답을 주기 어려웠다.
그의 편을 들어주는 자들도 없었으니, 단순히 생각하면 청혼서를 보내는 자도 없을 것 같지만···.
‘그를 이용하려던 자도 없었을까?’
성검의 주인도 아니고 여러 의심과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더라도, 세르펜스는 여전히 신성 루멘 제국의 공작이었다.
오히려 평가절하된 그를 만만하게 보고, 그를 휘두르기 위해 접근하려던 자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제2 황자가 이용당했듯이···.’
지금 온 청혼서들도 그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아니겠지만, 그의 권세를 빌리고 이용하고 싶어서 보낸 것들일 테다.
순수하게 세르펜스에게 반한 영애들이 보낸 청혼서도 있겠으나, 외국 저 멀리에 사는 귀족 영애가 언제 세르펜스를 봤다고 사랑에 빠지겠는가.
“···답변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다. 그저 한탄일 뿐.”
그냥 투정일 뿐이었나보다.
반복적으로 편지를 뜯어 읽고 답장을 써내려가던 그가 한 장의 편지에 이르러서, 답장을 써내려가는 대신에 한 쪽에 따로 빼두는 것이 보였다.
“···그건 뭔데 따로 빼두시는 겁니까?”
금박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봉투들 사이에서, 유독 아무 장식 없이 새까만 봉투였다. 내 의문에 세르펜스는 궁금하면 가져가서 읽어보라는 듯, 그것을 턱짓으로 가리키고 다시 답장을 쓰는 것에 신경을 집중했다.
“···아, 이거 레드포드 경이 보낸 거네요?”
내용을 읽어보니, 이것이 처음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보고 형식으로 일의 진행 사항을 전달하고 있었나 보다.
제국의 국경에 다다랐으니, 곧 수도에 도착할 것이란 내용으로 봐서 복수는 이미 끝낸 거겠지.
편지가 전달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따져봤을 때, 대략 휴마누스의 출정 전후로 도착할 듯싶다.
“선우. 그건 이리 주고, 당장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네? 갑자기 왜요?”
읽은 편지를 다시 접어 봉투에 넣고 있으려니, 세르펜스가 느닷없이 말했다.
“황태자가 오고 있습니다.”
나는 들고 있던 편지를 세르펜스의 책상에 내던지듯 올려두고, 잽싸게 내 자리로 돌아와 펜을 쥐었다.
거의 그것과 동시에···.
– 벌컥─.
“세피!!”
휴마누스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 재끼며, 집무실에 들어왔다.
“전하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서운하게스리···.”
“그런 것이 아니오라, 신전에서 수련 중이시라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찾아오셨기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건가 싶어 드린 말이었습니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휴마누스를 보며, 세르펜스가 진심으로 오해받아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척 말했다.
“아, 그거···. 진짜 너무들 하더라. 어떻게 사람을 휴식시간도 안 주고 굴려 대는지···.”
성기사를 상대로 검을 주고받고, 신관들에게 신성력을 다루는 요령을 배우거나, 성검의 주인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 등을 경청하거나···.
무슨 기숙 학원도 아니고, 온종일 배움의 연속이다.
그가 신전에서 머무른 보름 기간의 나날은 [성검의 주인]에서 가볍게 생략되었지만, 휴마누스는 종종 그때를 떠올리며 학을 떼곤 했다.
“오늘 이렇게 나온 것도, 세피를 만나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상의해본다고 하니까 내보내 준 거야.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을걸?”
답답했던 신전을 빠져나온 것이 기쁘다는 듯, 휴마누스가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의 일정을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예상했던 대로 그는 세르펜스의 거절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다.
해맑게 웃는 그의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덮고, 고개를 돌렸다.
“전하, 죄송한 말이지만···.”
“앞으로 함께 대륙을 돌아다닐 처진데, 역시 그 호칭은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오해라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휴마누스가 되물었다.
“저는 전하를 따라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
세르펜스가 눈꼬리를 내리며 입가에 쓴 웃음을 꾸며냈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휴마누스가 사태를 파악한 듯 얼굴에 웃음기를 지웠다.
“왜···?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망연한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딱하기 그지없다.
그 모습에 세르펜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내며, 작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자리를 옮겨서 설명해도 되겠습니까?”
“어? 으, 응.”
혹시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면 안 되는 소린가 싶어, 세르펜스의 눈치를 살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이다.
그렇다면 따라가는 것이 인지상정. 어떤 얘기길래 장소까지 옮겨야 하나 호기심이 일었다.
세르펜스를 따라 도착한 장소는 연무장이었다.
본래는 공작 전용이나, 몇 달 전부터 내가 열심히 바닥을 굴러다닌 곳이기도 하다.
한쪽에 내가 연습용으로 쓰던 보급용 철검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것을 세르펜스가 집어 들었다.
“···세피?”
“전하도 검을 뽑으십시오.”
분명 설명을 해주겠다고 해서 따라왔는데, 검의 대화라니?
나와 휴마누스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벙찐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든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시온 경, 잠시 바깥으로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칼질을 하겠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재빨리 휴마누스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어? 전에는 리벨론 경이라고 불렀던 것 같···!”
내가 연무장 바깥으로 물러나자마자, 그가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세르펜스가 그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휴마누스가 늦지 않게 성검을 뽑아 가까스로 그것을 막아냈다.
‘말로 해서는 안 들어 처먹으니, 무력으로 제압해서 쫓아내겠다···는 건 아닐 테고.’
일부러 자신의 검이 아닌 연습용 검을 든 것으로 보아, 실력 차이를 휴마누스에게 인지시키기 위함인 듯하다.
“자, 잠깐만! 나는 성검인데···.”
“상관없습니다.”
내가 들었을 때는 그저 싸구려 철검에 지나지 않았으나, 세르펜스의 손에 들려 신성력을 머금으니 천하에 둘도 없는 명검처럼 보인다.
은빛의 궤적을 남기며 성검과 맞부딪혔다.
아무리 휴마누스가 성검을 들었다 해도 검을 든 사용자들의 실력 차가 너무나 명확했다, 라는 표현조차 부족하다.
휴마누스는 자신이 밀어 넣은 신성력과 성검을 통해 증폭되어 나온 실제의 출력 차이에 버벅거리는 등, 성검에 휘둘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차라리 일반 검을 쓰는 게 나을 정돈데?’
일주일 동안 수련했는데, 왜 아직도 저따위인지 모르겠다.
물론, 일주일이란 시간은 성검을 완벽히 다루기에 불충분한 시간이다. 그러나 [성검의 주인]에서 휴마누스가 치른 첫 전투장면과 비교하더라도 너무 허접했다.
글을 읽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의 차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성검의 주인]이 1인칭 시점이라면 이해하겠으나,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이었으니.
저렇게까지 엉망진창이었다면, 그에 관한 묘사가 한 줄이라도 있어야 했다.
‘남은 기간 동안 급성장이라도 하는 걸까?’
숙련도의 문제다.
느닷없이 깨달음이 온다고 실력이 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휴마누스, 얘 설마···.’
[성검의 주인]에서의 휴마누스는 선택의 날, 많은 이들에게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그의 실력과 자질에 관한 수군거림을 들었다.그 때문이라도, 그는 성검의 주인이 되기 걸맞은 실력을 갖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정해진 커리큘럼 외에도 밤마다 혼자 수련을 거듭했겠지.
그에 반해···.
‘이 자식, 놀았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 나름대로는 열심히 했을 거다. 다만 그것이 최선을 다한 게 아니었을 뿐.
그것을 눈치챈 것은 세르펜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까지 엉망일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신성력을 마구 남발하고 제풀에 지쳐 쓰러진 휴마누스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제가 함께할 것을 염두에 두고, 수련을 대충하신 건 아니시리라 믿습니다.”
“허업, 그, 그건 절대 아니야!”
휴마누스가 거칠어진 호흡을 집어삼키며, 다급히 부정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전하께서는 제게 의존하게 될 뿐, 성장하지 못하실 겁니다.”
이 얘기는 부정할 수 없는 듯, 휴마누스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말없이 호흡을 억눌렀다.
“저와 함께하고 싶으시다면, 적어도 엇비슷한 실력을 쌓으신 후 다시 권유해 주십시오.”
세르펜스가 바닥에 쓰러진 휴마누스를 강제로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마주 보고 말했다.
항상 쭈굴거리는 모습만 보다가 저렇게 고자세로 남을 내리누르는 모습을 보니, 무척이나 새롭다.
‘나중에 유지스가 알면 엄청나게 아쉬워하겠는데···?’
단호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서 카리스마가 엿보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세르펜스가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이야.
그에 기가 눌린 휴마누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네.”
“괜찮습니다.”
“나중에 네 동료로서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갖추고 나면, 그때는 나를 받아주겠어?”
누가 성검의 주인인지 헷갈리는 소리다. 그에 세르펜스는 말없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까부터 전혀 확답을 주지 않았으나, 휴마누스는 또다시 그것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듯하다.
그는 각오를 다지며, 공작저를 떠났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무실로 돌아왔고, 세르펜스는 편지를 이어서 써내려갔다.
“와, 세르펜스가 그렇게 행동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말로 좋게좋게 타이르실 줄 알았는데···.”
“말로만 해서는 알아들을 것 같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무척이나 공감되는 사유다.
그렇다 해도, 단순히 휴마누스가 귀찮아서 떨어뜨리려는 의도만 있는 것이 아닌 듯 하다.
그뿐이라면 굳이 번거롭게 검을 나눌 필요도 없었겠지. 제국에서 해야 할 일들을 얘기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세르펜스는 진심으로 성검의 주인이 성장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가 성장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를 이해시켰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냥 기특해서요.”
“···모두를 위한다거나, 대륙을 구원하고 싶다는 그런 숭고하고 거창한 뜻에서 한 행동이 아닙니다.”
아까 본 당당한 모습은 어디 가고, 평소대로의 소심펜스가 대답했다.
“그럼요?”
“그저···. 지난 몇 달간 겪었던 그 소소한 일상들이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해서···. 그것을 위해 더 나은 방법을 찾았을 뿐입니다.”
“그냥 기특한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기특한데요?!”
자신이 소망하는 바를 확실히 인지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특한 일인데,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
뿌듯한 마음이 아니 생길 수 없었다.
“상으로 머리라도 쓰다듬어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건 대체 누구를 위한 상이지?”
“세르펜스를 잘 키운 저를 위해!”
“······.”
세르펜스가 뭐 이딴 놈이 다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