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02)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03화(1003/1105)
96. 공작님의 상실 (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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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뜨자 흐릿했던 시야에 또렷한 상이 맺혔다.
그런데도 정신은 여전히 몽롱하기만 하고 몸은 축 늘어졌다.
보이는 것은 낯선 천장이고 머릿속은 멍하며 전신에 힘이 들어가질 않으니, 이곳은 꿈속인가 싶다가도.
건조한 목에서 나는 비릿한 피맛이 현실임을 자각케 했다.
“깼어? 목말라? 물 줄까?”
때마침 들려오는 휴마누스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곧이어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그제서야 나는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몸에 힘이 없는 건 여전했으나 어찌어찌 상체를 일으켜 앉을 수 있었다.
휴마누스가 건네준 물을 받아 마시자 비로소 잠이 물러나는 듯했다.
‘내가 왜 자고 있던 거지···?’
몽롱함이 조금씩 가시며 의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의문의 답을 찾고자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나가다가, 선우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럽고 아찔했다. 순간적으로 기절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서, 선우···. 선우를 찾으러 가야···.”
서둘러 침대에서 벗어나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비틀거렸다.
나도 모르게 놓쳐버린 물잔이 바닥에 떨어져, ‘쨍그랑!’ 하고 비명과도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휴마누스가 조심하라고 외치며 침대에서 떨어지려는 내 몸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큰일 날 뻔했잖아!”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닙니다. 선우는 찾은 겁니까? 아니면, 그가 어디로 끌려갔는지 단서라도···.”
나는 휴마누스를 붙들고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부디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그가 선우를 구출했기를, 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무언가 알아내기라도 했기를 바라며.
하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휴마누스는 먹먹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미안해.”
휴마누스가 중얼거리는 듯 입속말로 대답했다.
그 말의 의미는 명백했다.
방금 물을 마셨는데도 지독한 갈증이 밀려들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어째서 선우를 찾으러 가지 않고 이곳에 계신 겁니까?!”
“······.”
변명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텐데 휴마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흐느끼는 나를 진정시키고자 내 등을 가만히 도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손길을 뿌리치고 당장 선우를 찾으러 가고 싶었으나 찾을 길이 막막했다.
결국 나는 무력감에 휩싸인 채 휴마누스에게 기대어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나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는데도.
나는 기분이 다시 저조해지는 걸 느끼며 휴마누스의 품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휴마누스의 성격이라면 가장 먼저 일행들의 안위를 확인하러 왔을 텐데.
고급스럽다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겉보기로나마 화려해 보이는 장식들로 보아 이곳은 신전이 아니었다.
아마도 여관인 듯하다.
습관적으로 기감을 퍼트려 주변의 기척을 살피려다가, 신성력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게 꼭 무력감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여긴 여관이야.”
휴마누스가 이미 파악한 사실을 뒤늦게 알려주었다.
선우와 함께 신전에서 기다리던 일행들은 어찌 되었는지 물어보고자 입을 떼었다가, 도로 닫았다.
그들이 무사하든 무사하지 않든, 어느 쪽이든 화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휴마누스는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그들의 안위를 내게 알렸다.
“다른 일행들은 모두 멀쩡하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그렇다면 선우는 어쩌다가 악마에게 잡혀간 겁니까?”
선우가 납치당했는데 모두 멀쩡하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일행들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자 선우를 내어줬다던 악마의 말이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하고 싶지만, 결과가 그러하니 원망의 마음이 솟구쳤다.
악마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소 과장은 있을지언정 금방 들통날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리긴 했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차 질문을 꺼냈다.
“정말로···, 선우가 모두를 위해 희생한 겁니까?”
“예상하고 있었어?”
“악마에게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혹시나 하는 기대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선우가 걱정스러운 한편 너무나도 미웠다.
그러게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돌아갈 것이지, 쓸데없이 고집부리다가 이게 뭐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없다. 그래서 따질 수도 없다.
위험한 순간이 오면 선우를 본래 세상으로 돌려보내라고, 윈스톤 경에게 명령을 내려 놓았다면 좋았을 것을.
나는 그리하지 못했다. 내심 선우가 이곳에 남아 나와 함께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욕심에 눈이 멀어 미련하게 굴었다.
그 탓에 선우가 악마 숭배자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나는 네가 모두를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휴마누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 얘기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그것을 쏟아낼 수는 없었다.
악마가 선우를 끌고 가는 모습을 뜬 눈으로 지켜본 그들의 심정은 어떠할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구태여 내가 그들을 탓할 필요도 없다.
그러지 않아도 죄책감 속에서 괴로워하며 자신을 책망하고 있을 터이니.
그들이라고 선우를 악마에게 넘기고 싶어서 넘긴 건 아니리라.
분명 선우가 희생을 자처하며 그들을 설득한 것일 터. 그가 무슨 말로 사람들을 설득했는지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본인을 지키다 모두가 죽으면 자신은 평생 그 죽음을 가슴에 품고, 후회와 죄책감 속에서 살아갈 거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겠지.
‘선우는 누구보다도 정이 많고 상냥한 사람이니까···.’
그것이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며 이번에는 약점으로 작용했다.
무감각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내게 기쁨과 행복을 알려주었던, 선우의 선한 마음이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현 상황을 그들의 잘못으로 돌릴 생각은 없습니다.”
원망의 대상을 헷갈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모든 책임을 성검의 주인 탓으로 돌리는 우매한 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원흉은 마왕과 그자를 따르는 존재들이지, 자신을 희생한 선우와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아니다.
그 사실을 머릿속에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정말 강해졌구나. 무력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휴마누스가 뜻 모를 소리를 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축 처진 어깨가 나 못지않게 무기력해 보였다.
그래서 나도 몰래 위로의 말이 튀어나왔다.
“당신도 강해졌습니다.”
“나는···! 아니, 아니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순간적으로 휴마누스의 얼굴에 반발심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예의 씁쓸한 미소를 다시 머금으며 공허한 감사 인사를 입에 올렸다.
강해졌다는 말을 부정하며 자신의 나약함을 입에 담은들, 무의미한 논쟁만 오갈 뿐이란 사실을 알기에 그런 것일 터.
나도 쓸데없는 논쟁은 사양하고 싶었기에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선우가 납치되었을 당시의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응? 이미 알고 있던 것 아니었어?”
“악마의 말을 완벽히 믿을 수는 없을뿐더러,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닌지라···.”
“아, 그렇겠구나.”
내 말에 휴마누스가 이해했다는 반응을 내비치며, 에녹 추기경에게 전해 들었다는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악마의 말은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었다.
일행들과 성직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끝까지 항쟁하려 했다.
그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선우가 희생을 자처한 거였다.
내가 반드시 자신을 구해줄 거라는 믿음을 품고서.
“제가 의식을 잃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안 돼.”
휴마누스가 질문과 무관한 대답을 내놓으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이러한 대답이 돌아왔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멍하니 쳐다보자, 그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 당장 선우를 찾으러 가겠다고 말하려던 거 아니었어?”
“맞습니다.”
“절대 안 돼.”
다시 단호한 표정으로 돌아온 휴마누스가 딱 잘라 말했다.
말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내 어깨를 누르며 강제로 침대에 눕히려 들었다.
신성력이 폭주했을 때의 감각을 되살려, 고갈된 신성력을 억지로 끌어 올려 저항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지금 몸 상태로는 선우를 찾기도 전에 내가 먼저 지쳐 쓰러질 거다.
그때를 노리고 적이 공격해 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선우는 나를 믿고 제 발로 악마를 따라갔다. 조바심 때문에 선우를 구해낼 가능성을 내 손으로 없애고 싶지 않다.
정말 분하지만, 지금은 쉬어야 할 때다.
내가 힘없이 침대 위로 쓰러지자 휴마누스가 안도하는 낯을 했다.
“선우가 납치되었다는 건 교단 측도 알고 있으니까 금방 수색대를 꾸려 추적에 나설 거야. 내가 아바마마께 연락을 드려서 제국의 인력도 동원해 볼 테니까, 너는 회복에만 전념해.”
휴마누스가 흐트러진 이불을 정돈하여 내게 덮어주며 말했다.
여전히 단호하기만 한 표정과 달리 그 손길이 퍽 다정하여,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다정한. 어쩌면 모든 세상을 통틀어 가장 다정할지도 모를 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악마가···, 선우를 악마의 그릇으로 삼을 예정이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물이 준비될 때까지 선우를 고문할 거라고도···.”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 선우를 더 빨리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휴마누스에게 말해 봤자 내 불안과 초조함을 전염시킬 뿐이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려 했다. 한데도 내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아니, 사실은 공감을 바라고 내 의지로 말한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괜찮을 거야. 선우는 선우잖아?”
“네···?”
“내 말은 그러니까, 선우는 굉장히 말을 잘하고 연기 실력도 뛰어나잖아? 그러니 어떻게든 악숭이들을 속여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려 했던 건데···. 마음이 급해서 말이 조금 이상하게 나와 버렸네.”
듣고 보니 그랬다. 선우가 얌전히 고문을 당할 것 같지는 않다.
회유된 척을 하든 굴복한 척을 하든 연기하며.
악마 숭배 세력을 강성하게 할 방법이 있다거나, 자신이라면 나를 설득하여 마왕을 따르게 할 수 있다고 위기를 모면하고도 남았다.
확실한 건 아니었기에 휴마누스의 말만을 믿고 늦장 부릴 생각은 없지만, 아주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것이 표정에도 드러났는지 나를 바라보는 휴마누스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불러올까? 아니면 좀 더 잘래?”
“으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들을 불러 달라고 답했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겁긴 했으나 잠이 오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일행들을 마주하더라도, 그들을 원망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렇게 날 안심시켜 놓고 창문으로 빠져나가려는 건 아니지?”
휴마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가려다가 멈칫하더니 뒤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그런 거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그는 문을 열고 고개만 빼꼼 내밀어 내가 깨어났다고 외친 후 곧장 몸을 돌렸다.
“그렇게 제가 못 미더우셨습니까?”
“아, 아닌데? 바닥에 깨진 잔의 파편이 널려 있어서 위험하니까, 누가 오기 전에 빨리 치워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휴마누스는 내 시선을 피해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조금 전 내가 떨어뜨린 물잔을 발견하고 바닥에 쭈그려 앉으며 둘러댔다.
하지만 그가 바닥을 치우는 것보다, 일행들이 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것이 더 빨랐기에 무의미한 변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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