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1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12화(1012/1105)
96. 공작님의 상실 (11)
낯선 공간에서 눈을 뜬 것 자체는 문제 될 게 없다. 어차피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날 재운 거니까.
그런데 잠들고 일어났더니 서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다.
내겐 몽유병이 없을뿐더러, 설령 있다 하더라도 악숭이들이 가만 내버려 둘 리 없으니까.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소숭이5가 가져다준 차를 마시고 까무룩 잠든 게 끝이다.
“···진짜 뭐지?”
피를 뿌려 사방을 검붉게 물들이는 퍼포먼스라도 하려는 게 아닌 이상, 이렇게 새하얗기만 한 공간은 악숭 세력의 취향이 아니다.
그 퍼포먼스마저도 살육이 빈번히 일어나던 2회차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피가 아까워서 못 할 테다.
게다가 이 공간에는 주변에 악숭이가 단 한 명도 없다. 바닥을 훑어 보아도 악마 소환 마법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제일 이상한 건 이 공간에 광원이라 할만한 게 하나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도 주변은 아주 밝았다.
“진짜 뭐야?”
심지어 이상한 건 이 공간만이 아니다.
손과 발을 구속하고 있던 쇠붙이와 재갈도 사라진 건,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다 치자.
그런데 사라진 게 또 있었다.
자유로워진 손목을 무심코 매만지다가 오른손목에 있던 점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설마하는 마음에 손을 자세히 살폈다. 매일 보던 손이 아니다. 피부색도 달랐다.
하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그도 그러할 게···.
“이거 내 몸이잖아.”
반사적으로 얼굴을 더듬으니 안경이 만져졌다.
주변을 살피느라 바빠서 미처 알아채지 못했는데, 입고 있는 옷도 후드티와 청바지다.
이쪽 세상으로 넘어오기 전에 내가 즐겨 입던 스타일이다.
본래 몸으로 돌아온 건가 싶었으나 그것도 아닌 듯한 게, 나는 분명 자다가 [성검의 주인] 속 세상으로 넘어왔다.
안경은 당연히 침대 머리맡에 고이 올려놓았다. 옷은 체육대회 때 맞췄던 과티에 반바지 차림이었고.
혹시 내가 지금 자각몽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싶어 볼이라도 꼬집어 보려는 찰나.
돌연 눈앞에서 빛이 일렁이더니 점차 검의 형상을 갖췄다.
오색찬란한 빛이 사그라지며 드러난 모습은 내게 매우 친숙한 것이었다.
“세니어···?”
나는 오랜만에 보는 세니어를 양손으로 받아 들고 자세히 살폈다.
가드 중앙에 박힌 신성석이 탁한 색을 띠고 있었다. 검집에서 살짝 뽑아보니 별가루를 뿌린 듯 반짝거려야 할 검날 또한 그 빛이 바랜 상태였다.
내가 이런 상태의 세니어를 본 건 처음이 아니다.
바다에서 두족류 악마와 싸울 당시, 충전된 신성력이 모두 소모되었을 때 세니어의 상태가 딱 지금과 같았다.
이게 자각몽이라면 세니어가 이런 모습으로 튀어나올 리가 없다.
굳이 볼을 꼬집어 볼 필요도 없다.
세니어가 왜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는 알 것 같다.
나는 세니어 손잡이를 꽉 그러쥐며 그 존재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룩스메아, 네가 날 이리로 데려온 거지?”
어설픈 신인 마왕에게는 존댓말을 써 놓고, 완전한 신인 룩스메아에게는 반말을 써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하지만 바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나를 납치했다는 점에서는 마왕이나 룩스메아나 거기서 거기였지만, 그 목적이 상이했으니까.
마왕은 어차피 나를 고문하려고 납치한 것이므로, 기분이 상하면 바로 내게 화풀이를 하고도 남았다.
반면에 룩스메아는 세르펜스를 회개시킬 생각으로 나를 납치했으며, 나는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러니 양심이 있다면 룩스메아는 내게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을 품어 마땅하다.
면전에서 반말이 아니라 욕설을 입에 담아도 잠자코 들어줘야 한다.
아니, 염치가 있으면 내게 멱살 정도는 잡혀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 대 정도 맞아주면 더 좋고.
신이니까 연약한 인간 나부랭이에게 한 대 맞는다고 드러눕지는 않겠지.
내가 화난다고 누구 때리고 그런 성격은 아니지만.
자다가 납치당하여 몇 년간 가족들과 생이별한 판국에,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듣고 끝내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얼른 나와 봐. 나를 곧장 본래 몸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이런 곳으로 불렀다는 건 내게 할 말이 있다는 뜻이잖아?”
내 생각을 읽은 건지 아니면 표정을 통해 짐작한 건지 조금 먼 곳에서 빛 무리가 일었다.
반딧불이처럼 조그마한 빛이 조금씩 부피를 키우며 서서히 인간 형태를 취했다.
세르펜스가 전해준 솔레르티아의 얘기에 따르자면 룩스메아는 내 모습으로 나타날 터.
나와 똑같이 생긴 존재를 때린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해도 못 때릴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힘이 빠질지도 모르니, 룩스메아가 형상을 갖추자마자 곧장 한 대 갈길 요량으로 빛을 향해 다가갔다.
세니어를 왼손으로 옮겨 들고 오른손을 말아쥐었다.
하지만 나는 쥐었던 주먹을 휘두르기도 전에 다시 펼 수밖에 없었다.
‘빛이 왜 벌써 사라지지?’
나는 당황했다.
아직 내 허리께밖에 오지 않았건만, 부풀어 오르던 빛 덩어리가 덩치를 키우는 걸 멈춰버린 까닭이다.
그리고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 한 번 더 당황했다.
드러난 모습이 나와 눈곱만큼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룩스메아는 내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의 모습을 빌렸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생판 모르는 남이라는 건 아니다.
보기만 해도 보드랍고 말랑거릴 것 같은 두 뺨과 오뚝한 콧날.
눈을 깜박일 때마다 살랑거리는 긴 속눈썹과 그 아래에서 빛나는 녹색 눈동자. 그리고 살짝 처진 눈꼬리까지.
아기자기한 와중에도 뚜렷한 저 이목구비는 세르펜스의 것이 틀림없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성인이 아닌 어린아이라는 것과 오색 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칼 뿐이다.
“어째서···, 세르펜스의 모습으로···?”
{ 당신은 저의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그럼 시온의 모습을 빌려도 되잖아. 것보다 어째서 어린애 모습인 건데?!”
설마하니 내게 맞기 싫어서 일부러 세르펜스의 유소년기 시절 모습을 빌려 온 건가 싶어, 룩스메아를 의심의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사실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고 싶었다.
그러나 앙증맞은 얼굴이 너무나도 귀여운 나머지 자꾸만 얼굴 근육이 풀어졌다.
헤벌레 웃지 않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이 대견할 지경이다.
{ 저는 그저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모습을 빌렸을 뿐입니다. 하필이면 어린아이의 모습인 건···. 제 힘이 많이 약해진 탓입니다. }
룩스메아가 어째서 자신이 세르펜스의 유소년기 시절 모습을 하고 있는지 설명했다.
그러고는 절대 고의가 아니었다고 덧붙였는데 좀 변명 같았다.
하지만 따질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되려 나도 몰래 ‘오구오구, 그랬쪄요?’ 하고 달래줄 뻔한 걸 참느라 혼났다.
거울을 본 시간보다 세르펜스의 얼굴을 마주한 시간이 더 기니까, 아주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힘이 약해져서 어린아이의 모습을 했다는 것도 꽤 그럴싸했다.
나는 이성을 다잡으며 룩스메아에게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묻고자 입을 뗐다.
“살면서 이렇게 예쁜 아이는 처음 봐. 이런 미친 귀여움이라니···. 아, 어떡해. 진짜 너무 사랑스럽다. 저 깜찍한 뺨을 조물조물해 봤으면 정말 소원이 없겠네.”
이성을 잘 잡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뜬금없는 내 발언에 룩스메아가 당황하며 눈들 땡그랗게 떴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룩스메아를 향한 원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정도면 룩스메아는 신의 사자 복지를 톡톡히 챙겨준 게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지, 아니지. 사전에 말도 없이 자는 사람을 다른 세상으로 납치했는데, 조물조물 쓰담 쓰담 정도는 당연히 허락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 }
눈앞의 존재는 소년펜스가 아니라 룩스메아다.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결국 손을 뻗고야 말았다.
필사적으로 참고 참아 머리만 쓰다듬고 끝내려 했건만. 한 번 손을 대니 멈출 수가 없었다.
이는 절대적인 귀여움에 강요당한 것이지 내 의사가 아니다.
세니어를 옆구리에 끼고 소년펜스(의 모습을 한 룩스메아)의 뺨을 양손으로 조몰락거렸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보드레하고 말랑말랑하다.
손바닥으로 양 볼을 감싸 쥐고 꾹 누르자 입술이 오므려지며 새의 부리처럼 튀어나왔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세르펜스에게 ‘아도르’라는 세례명을 내린 룩스메아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미쳤다, 진짜.”
귀여움이 도가 지나쳐 뇌가 마비되기라도 한 건지, 어휘가 달려서 미쳤다는 표현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른다.
나는 뽕을 뽑자는 생각으로 자리에 주저앉아 아이(의 모습을 한 룩스메아)를 끌어안고, 부비부비 뺨을 비볐다.
“품에 쏙 들어오네? 이것도 너무 귀엽다!”
내가 아무리 세르펜스를 아기 고양이 취급한다 한들.
누가 뭐라 해도 녀석의 육체는 건장한 성인 남성의 것이었다.
나란히 눕거나 앉아서 대화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인지 부조화가 극대화되어 내심 놀란 적도 많다.
반면에 소년펜스는 진짜 작고 여리여리했다.
‘이 정도면 몇 살쯤이려나?’
엘로윈 보육원 소속 아이들은 영양 상태가 썩 좋지 못해서 제대로 된 비교가 불가능하고.
프라시더스 령의 신전 부속 보육원 아이들의 체격을 기준으로 삼으면, 대략 10살 전후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10살이라면 빌어먹을 전대 공작 놈이 세르펜스를 지하실로 끌고 간 그 나이다.
두둥실 떠올랐던 기분이 가라앉고 분노가 샘솟았다.
“그러고 보니 이 세상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룩스메아의 품으로 간다던데···. 세르펜스를 학대한 그 쓰레기 새끼의 영혼은 어떻게 됐어?”
{ 그게···. 품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추악하고, 중간계로 내려보내어 새로운 삶을 통해 죗값을 치르게 하자니···. 과연 이러한 악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되는 건가 싶어서···. }
룩스메아가 조심조심 말을 이어나가다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중간계가 어쩌고 새로운 삶이 저쩌고 하는 걸 보면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뿐, 이 세상에는 환생 시스템이 존재하긴 하는 모양이다.
얘기를 듣자하니 전부 다는 아니고 일부만 그러한 것 같긴 하지만.
‘지나가는 말까지 분석하고 정보를 파악하려 드는 것도 이제 습관이 다 됐네.’
나는 안고 있던 룩스메아를 놓아주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룩스메아는 내 품에서 벗어났지만, 곧장 나를 마주 보지 못했다.
대체 그 쓰레기 놈의 영혼을 어쨌길래 저러나 싶어 의아해졌다.
“화 안 낼 테니까 얘기해 봐.”
{ ···마계로 보냈습니다. }
“우리 룩스메아 친구, 제정신이에요? 마왕 뺨치게 못돼 처먹은 새끼를 마계로 보내다니, 제2의 마왕을 만들고 싶어서 환장하셨나요? 마왕이 하나밖에 없어서 일상에 긴장감이 부족했나 보다. 그쵸?”
{ 그, 그런 건 아닙니다···. }
“그럼 왜 그랬는데?”
{ ···용서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
그건 나도 공감한다.
안 그래도 마왕에게서 0회차의 일을 듣고 난 뒤로 이미 혐오감이 max를 찍은 상태다.
거기다 룩스메아를 통해 유소년기의 세르펜스 모습을 보고 나자, 그 혐오감이 대기권을 뚫고 인지 불가능 영역에 도달했다.
전대 공작 놈이 인간이 맞기는 하는지 의심스럽고, 학대당하는 소년펜스를 보면서도 돕지 않은 사람들마저 이해되지 않았다.
“그 마음은 알겠는데, 소멸시키는 게 깔끔하지 않았을까?”
{ 제게는 영혼을 소멸시킬 권능이 없습니다. }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시간도 조작하는 신이 고작 영혼 하나 소멸시키지 못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1013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