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1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15화(1015/1105)
96. 공작님의 상실 (14)
내가 아끼는 이들은 모두 나를 잊어버리는데, 하필 기억하는 존재가 룩스메아와 마왕이라니.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 둘의 공통점이라고는 ‘신’이라는 것뿐이니까.
그걸 알아도 ‘왜 하필이면···.’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룩스메아를 흘겨보았다.
어린 세르펜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래서야 화도 못 내겠다고 생각한 순간, 룩스메아가 세르펜스의 모습을 취하게 된 이유가 떠올랐다.
‘분명 내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라서 그렇다고 했지? 하지만 조금 전에는 세상이 나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고 말했···. 아, 이미 분리한 상태라서 그렇구나.’
그 사실을 자각하자 울컥 울분이 치솟았다.
어째서 내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나를 시온의 몸에서 꺼내 온 거냐고 따지고 싶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계속 시온의 몸에 남아있었다면 모든 것이 마왕의 의도대로 흘러갔을 거다.
그걸 알고도 계속 남아있겠다고 할 수는 없다.
즉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영혼 소멸이냐,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지되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냐.
이 둘 중 하나다.
‘돌아갈 고향과 가족들이 없다면 모를까···.’
내가 세르펜스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나를 소중히 생각할 이들을 떠올리면, 차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대신 소멸을 택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선뜻 잊히는 쪽을 택할 수도 없다.
모두가 나를 잊었다는 사실에 내가 느껴야 할 허무함은 일단 차치해 두더라도.
다른 일행들은 내가 없어도 어떻게든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만.
‘문제는 세르펜스지.’
녀석은 이전에 내가 자신의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니 어쩌니 하며, 내게 자아를 의탁하고 있다는 뉘앙스의 말을 한 전적이 있다.
최근 들어 녀석이 부쩍 성장했다고는 하나 안심할 수는 없다.
공들여 쌓은 탑이라도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리면 무너지는 법이다.
차라리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나에 관한 기억만 도려내진 거라면, 세르펜스는 과거와 현재의 자신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할 테니까.
내가 ‘선우’로서의 기억을 잃고 나 자신을 ‘시온’이라 인식했을 때처럼.
아니, 녀석의 경우에는 그것보다 상태가 더 심각하겠지.
적어도 시온은 소심할지언정 심각한 트라우마를 앓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과거와 달리 이제 세르펜스의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 괜찮···으려나?’
확신은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모두의 기억 속에서 내가 잊히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적어도 일행들이 나를 구하고자 마왕의 의도대로 끌려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물론 그래서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느냐면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이것저것 따져봤을 때.
내게 선택권이 주어졌다면, 결국은 잊히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쪽을 택했을 거다. 그게 최선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세르펜스가 너무 걱정되는 나머지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아마도 룩스메아가 내게 동의를 구하지 않은 건 이런 나를 위한 배려일 테다.
룩스메아 또한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내린 셈이다.
그래도 원망을 아예 안 할 수는 없다.
“이런 얘기나 할 거면, 나를 여기로 부르지 말고 그냥 원래 세상으로 바로 돌려보내지 그랬어?”
{ 그래도 사정은 말씀드리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감사와 사과 말씀도 전해야 하고···. }
“사람을 멋대로 납치해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남의 몸에 집어넣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런 예의를 챙긴다고?”
실로 어처구니가 없다.
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인지 하늘인지 모를, 새하얀 무언가를 올려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 오해입니다. }
“뭐가 오해라는 건데?”
{ 그건···. 어차피 이제 다른 세상으로 돌아가셔야 하니, 그냥 제약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
“제약을 풀다니? 나한테 그런 게 걸려 있었다고?”
룩스메아를 바라보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져 물으려던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번지며 머릿속에 생소한 기억이 떠올랐다.
* * *
드디어 [성검의 주인]이 완결을 맞이했다.
외전도 오늘 올라온 편이 마지막이라고 했으니, 누나가 쓰던 중고 태블릿 pc를 얻기 위한 감상문 쓰기도 오늘부로 끝이다.
정말 기나긴 여정이었다.
‘근데 유료 연재로 들어가기 전의 습작이었다면 모를까. 정식 연재되는 작품에 이런 피드백과 감상평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편집자도 있고, 화마다 댓글을 다는 독자들도 있는데···.’
아무래도 이 소설의 작가는 엄청 소심하거나, 완벽에 대한 강박증이라도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런 것치고는 ‘2부에 들어가고 소설의 분위기가 너무 갑자기 암울해진 것 같아요. 주인공 멘탈도 걱정되고요.’라는 내 피드백을 야무지게 씹어 잡쉈지만.
그래도 유감은 없다.
내가 무슨 평을 적어 보내든 작품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건, 소설 조회수가 떨어지더라도 내 탓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덕분에 부담 갖지 않고 편하게 감상평을 적어 내려갈 수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태블릿 pc로 메신저 앱을 열었다. 그리고 방금 적은 감상평을 텍스트 파일로 누나에게 넘겼다.
작중 최종 보스인 세르펜스의 과거 회상을 읽었을 땐 다음 날까지 우울했었는데.
지금은 장기 과제가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에 그저 개운하기만 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이런 거 안 해도, 누나 기분 좋을 때 잘 부탁했으면 쓰던 태블릿 PC 정도는 그냥 줬을 것 같기도 한데···. 뭐, 나름 재밌었으니 상관없나? 거기다가 감상평 써야 한다는 핑계로 블루투스 키보드까지 받아 챙겼고.’
나는 태블릿 pc의 화면을 끄고 안경과 함께 침대 머리맡에 고이 올려둔 후, 뿌듯한 마음을 안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둠뿐이던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뭐야, 여긴? 꿈인가?”
아무것도 없이 새하얗기만 한 공간에 홀로 서 있는 꿈이라니, 뭐 이딴 개꿈이 다 있나 싶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뿐.
이런 생각이 가능하다는 건 이게 자각몽이라는 뜻이리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걸 떠올려 이 새하얀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도 가능할 터.
“즉 맛있는 걸 눈앞에 두고도, 여러 방해 탓에 아예 못 먹거나. 겨우겨우 방해 요소를 해치우고, 다시 음식 앞에 앉았을 때 잠에서 깨는 그 원통함을 드디어 풀 수 있다 이거지!”
과연 꿈에서 맛을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한 입 먹어보고 맛이 안 나면 바로 치워버리고 다른 걸 하며 놀면 되니까.
나는 머릿속으로 며칠 전에 먹었던 매운 등갈비 찜을 떠올렸다.
그에 반응하듯 어디선가 작은 빛 덩어리가 포르르 날아왔다.
매운 등갈비 찜을 먹을 생각에 입맛을 다시며, 점차 커지는 빛 덩어리를 지켜보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이제 그만 커져도 될 것 같은데 빛 덩어리가 계속해서 커졌다.
“내 키의 절반만 한 매운 등갈비 찜이라니?! 어···, 되게 좋은데?”
빛의 크기만큼 부풀어 올랐던 내 기대감이 바람 빠진 풍선 꼴이 된 건, 그 빛 덩어리가 사람의 실루엣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다.
내가 무슨 좀비도 아니고 사람 모양 거대 등갈비를 뜯어 먹는 건 사양이다.
애초에 그게 등갈비가 맞긴 한 걸까? 그냥 다른 부위 아니야?
떨떠름한 심정으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니, 빛이 점차 사그라지며 거대 등갈비 찜의 자태가···드러나지 않았다.
내 매운 등갈비 찜은 어디 가고, 말썽 잘 부리게 생긴 어린애 하나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선명한 보라색인 것도 특이했는데, 오색 빛으로 반짝거리는 머리색은 특이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신기했다.
{ 매운 등갈비 찜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
“아,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말을 하면서도 대체 뭐가 그럴 수도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린애가 자신이 매운 등갈비 찜이 되지 못한 것에 사과하는데,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다음에는 매운 등갈비 찜이 될 수 있을 테니 힘내라고 응원하는 것도 이상하다.
고민 끝에 나는 그냥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런데 네가 왜 내 꿈속에 나온 걸까?”
{ 제가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당신을 이곳으로 불렀습니다. }
“설마하니 매운 등갈비 찜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건 아니겠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 같지만, 이곳이 꿈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다.
꿈은 원래 엉뚱한 내용으로 흘러가는 법이니까.
{ 그런 건 아니고···. 아도르가 행복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
이 아이의 이름이 아도르인가 보다.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게 조금 특이했지만, 아직 어린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겼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아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꿈이라서 그런가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본격적으로 놀아주려는 찰나.
{ 아도르는 제가 아니라 세르펜스입니다. 그의 세례명이 아도르예요. }
소년이 다급하게 말했다.
세르펜스라면 [성검의 주인] 속 최종 보스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소설에는 ‘세례명’ 개념이 존재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소년이 말한 세르펜스가 그 세르펜스인 것 같다.
꿈에 생판 모르는 꼬맹이가 나타나, 방금 완독한 소설의 최종 보스를 행복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다니.
별 희한한 꿈도 다 있다.
내가 소설에 심히 몰입하며 읽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꿈을 꾸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하긴. 감상평을 쓰느라 다른 소설을 읽을 때보다 더 꼼꼼하게 읽긴 했지. 그리고 세르펜스의 어린 시절 얘기가···. 아, 다시 생각해도 화나네? 그걸 왜 다 끝날 때 알려주느냐고!’
나는 속으로 툴툴대며 들고 있던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최종 보스도 이런 어린애의 모습으로 나오는 거려나? 내 전공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렇겠지?
소설 속 세르펜스의 외양은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묘사되었다.
그럼 어린애 모습은 당연히 슈퍼 최강 깜찍이일 게 분명하다.
“좋아! 그럼 내가 뭘 하면 돼? 걔네 아빠를 때려눕히고, 같이 놀아주면 되는 거야?”
{ 그자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
“그 인간, 세르펜스가 죽이지 않았어? 그것도 열다섯 살쯤에.”
{ 네···. 알고 계신 대로입니다. }
소년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몹시 안타까워했다.
안타까운 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냥 더 어린 버전의 세르펜스랑 놀아주면 안 돼? 제 손으로 부모를 죽인 사춘기 소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라니, 일개 대학생에게 너무 어려운 과제잖아.”
{ 당신이 만나게 될 아도르는 선택의 날이 오기 직전. 그러니까 24살의 아도르입니다. }
“스물넷이면 아이조차 아니잖아?!”
{ 그마저도 최대한 앞당긴 겁니다. }
“그런 설정인가? 뭐, 알았어. 어차피 꿈인데 별일이야 있겠어?”
{ 이건 꿈이 아닙니다. }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소년이 정색하다시피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꿈속의 사람한테는 꿈이라는 말을 해선 안 된다고 했던가?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언뜻 들었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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