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1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20화(1020/1105)
1020회
97.공작님이 없는 세상 (2)
‘이제 뭘 해야 하지?’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누나 방으로 뛰어가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지금 내 꼴이 말이 아니다.
긴장한 상태로 매트리스를 옮겨대며 육체노동까지 한 탓에 땀이 잔뜩 흘렀다.
게다가 거울을 확인해 보지는 않았으나 얼굴에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을 게 뻔하다.
우선은 씻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갈아입을 옷을 찾고자 옷장 서랍을 뒤적였다.
아무렇게나 대충 쑤셔 넣긴 했어도 나만 아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는데.
너무 오랜만이라 그 규칙이 기억나질 않는다.
앞으로는 옷장 정리를 잘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겨우겨우 속옷과 잠옷으로 입을 만한 반팔티와 반바지를 발굴하는 데 성공했다.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나를 반겼다.
원래 동안인 편에 속했는데, 시온의 몸으로 스물아홉까지 살다 온 터라 더 앳되어 보인다.
물로 얼굴을 대충 씻어낸 뒤 거울을 보며 다양한 표정을 지어 보았다.
‘와, 진짜 내 얼굴이다···!’
신기한 마음에 한참 그러고 놀다가 뒤늦게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샤워를 마치고 거울을 보며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있자니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붉게 부어오른 눈가 때문이다. 누가 봐도 아침 댓바람부터 운 사람의 얼굴이다.
이럴 때 세르펜스에게 치료를 받으면 딱인데.
‘정신 차리자. 이런 사소한 일로 지금 곁에 없는 사람의 빈자리를 느끼면 나중에는 어쩌려고 그래?’
나는 드라이기를 끄고 코드를 뽑아 제자리에 놓으며, 한숨과 함께 허전한 기분을 털어냈다.
어차피 부모님. 특히 아빠가 퇴근하고 오면 ‘태블릿 pc에 얼굴 맞아서 운 애’라고 놀릴 게 뻔하다.
운 사실을 누나에게 숨기는 건 포기하는 게 좋겠다.
욕실을 나와 입었던 옷을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고, 내 방에 들러 현대인의 필수품인 핸드폰을 챙겨 누나의 방문 앞에 섰다.
부모님과의 만남은 다소 갑작스러운 측면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건만.
괜히 긴장되어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렸다.
“······.”
방문에 귀를 대 보아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혹시나 해서 다시 한 번 노크했으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자나 보다.
엄마가 누나에게 매일 같이 ‘밤에는 자고 낮에 일해!’라고 잔소리를 하지만, 누나는 날이 어두워져야 집중이 잘 된다며 항상 늦은 새벽까지 글을 쓰곤 했다.
아마 어젯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침대에 대자로 뻗어서 자고 있는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다가가서 누나를 흔들어 깨우려다가 생각을 바꿔 먹었다.
안 그래도 부모님의 얼굴을 마주한 시간이 너무 짧아 아쉬웠던 터다. 나는 가만히 서서 누나의 얼굴을 요목조목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누나가 지금 서른 살이던가?’
저쪽 세상에서 1년만 더 살다 왔으면 동갑이 될 뻔했다.
누나가 여전히 누나라는 게 묘하게 기뻤다.
만약 부모님이 아시면 서운해하실 일이었으나, 그동안 내가 가장 많이 그리워한 사람은 바로 누나였다.
상당히 의젓한 편인 세르펜스를 키우는 것도 참 힘들었는데.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까불거리는 다섯 살 아래 동생을 챙기기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이 종종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쁘신 부모님보다는 집에서 일하는 누나와 함께한 시간이 훨씬 많기도 하고.
“으으으···.”
누나가 기지개를 켜는 건지 자세를 고쳐 눕는 건지 모를 동작을 취하며 꿈틀거렸다.
다리를 올려두는 용도로 쓰는 베개가 누나의 발에 차여서 침대 밖으로 떨어졌다.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잠버릇 한번 진짜 나쁘다.
뒹굴뒹굴 침대 위를 굴러다니는 그 모습을 얼마나 구경하고 있었을까?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어쩐 건지 누나의 눈꺼풀이 부스스 올라갔다. 갈색이 도는 검은 눈동자가 흐리멍덩하게 내가 서 있는 방향을 향했다.
깜박, 깜박. 눈꺼풀이 두어 번 상하 운동을 반복했고, 그제야 누나의 눈에 초점이 잡혔다.
“악, 깜짝아!!”
“컥!”
세르펜스와 윈스톤에게 훈련을 받으며 키워온 반사 신경은 시온의 몸에 두고 왔는지, 나는 일반인인 누나가 던진 베개 하나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고 말았다.
그것도 얼굴에.
오랜만에 함께하게 된 내 진짜 얼굴인데 복귀 첫날부터 고생이 많다.
“안경 쓴 사람 얼굴에 물건을 던지면 어떡해?!”
“푹신한 베개니까 괜찮아. 아니, 것보다 자는 사람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본 네 잘못 아냐? 놀랐잖아!”
“노크하고 들어왔는데 누나가 안 깬 거거든?”
“하! 네가 노크를? 퍽이나 그랬겠네!”
누나가 터무니없는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자는 사람을 지켜본 내 잘못이란 부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노크한 건 진짠데. 억울하다.
나는 누나가 던졌던 베개를 끌어안으며 ‘진짜 했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혹시 우는 건 아니지?”
“고작 베개에 맞았다고 울 리가 없잖아.”
“눈가가 빨갛길래.”
“···아까 누워서 태블릿 pc로 소설 읽다가 떨어뜨리는 바람에, 살짝 눈물을 뽑긴 했지.”
“푸하하하! 태블릿 pc에 맞아서 울었대!!”
“별로 웃긴 얘기도 아니잖아?”
“응, 근데 너 무안하라고 웃어봤어.”
“······.”
진짜 너무 무안해서 찔끔 눈물이 날 뻔했다.
누나가 원래 이렇게 장난기가 많았었나? 기억을 되짚어보니 원래부터 이랬던 것 같다.
놀림받긴 했지만, 가볍게 넘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한 지 불과 1초 만에.
“무슨 일 있었어?”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엄마도 뭔가 알아챈 것 같던데, 이 집안 사람들은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르지?
이젠 하다 하다 휴마누스의 눈새기질마저 그리워졌다.
“아무것도 아니야.”
“얼굴에 대놓고 ‘힘든 일 있음’ 하고 써 놓은 주제에, 아무것도 아니긴?”
“······.”
“당장 말하기 힘들면 나중에라도 얘기해 줘.”
“···응.”
또다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며, 나는 울적함을 애써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그런 날 가만히 지켜보다가 크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더니 도로 누웠다. 다시 누울 거면서 기지개는 뭐하러 켰는지 모르겠다.
팔을 이리저리 휘적거리다가, 침대 모서리에 처박혀 있던 베개를 끌어당겨 베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대체 베개가 왜 이렇게 많은 거냐고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누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근데 지금 네가 입은 그 티, 어디서 많이 보던 거다? 내 거 아냐?”
“내 옷장 서랍에 있던데?”
“엄청 찾았는데 그게 거기 있었어? 빨리 벗어.”
“아 참. 엄마가 누나랑 맛있는 거 시켜 먹으라고 돈 보내줬어.”
나는 말을 돌리며 누나의 옆에 드러누워 휴대폰으로 배달 앱을 실행시켰다.
내 얼굴을 가격했던 베개를 뒤통수로 짓눌러 복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냥 네 용돈 해. 누나가 살 테니까. 뭐 먹을래?”
“매운 등갈비 찜.”
“그거 며칠 전에 먹었잖아.”
“꿈속에서 거대 매운 등갈비 찜을 먹을 수 있었는데 못 먹었어.”
“아, 그럼 시켜야지. 어쩔 수 없네. 치즈 추가한다?”
“받고 주먹밥도.”
이 시간에 매운 등갈비 찜을 파는 가게가 열렸는지 걱정됐지만, 뭐.
누나가 알아서 찾겠지 하고 생각하며 배달 앱을 껐다.
그리고 인터넷을 실행시켜 아무거나 눌러서 보고 있자니 ‘시켰어.’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오픈한 가게가 있었나 보다.
“너 되게 현대 문물을 너무 오랜만에 경험해서, 낯설어하는 사람처럼 아무거나 막 누른다?”
음식을 주문하는 와중에도 내가 핸드폰을 조작하는 모습을 봤나보다.
핵심을 단번에 찔러와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혹시 누나는 모든 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마음에 빤히 쳐다보자, 누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뭘 봐?”
“누나, 뭔가 알고 그런 말 한 건 아니지?”
“뭔가가 뭔데?”
“그···. 아니야. 것보다 나 [성검의 주인] 작가 연락처 좀.”
“밝은 모험 이야기로 시작했으면서 갈수록 분위기가 어두워진다더니, 최종 보스 사연을 왜 끝나갈 때 알려주냐느니. 불만을 늘어놓더니 결국 현피 뜨려고?”
[성검의 주인] 작가가 솔레르티아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어대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멱살을 잡고 싶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분만.
‘내게 계획적으로 접근해 놓고 친구가 된 척 속였을 뿐 아니라. 정체를 들키자 세르펜스에게 매정한 말을 쏟아내고, 혼자 이쪽 세상으로 도망쳐 버린 걸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그걸 티 내면 누나가 절대로 내게 솔레르티아의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겠지.
나는 설정 놀이를 통해 갈고닦은 연기 실력을 십분 발휘하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현피라니? 에이, 내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아? 그냥 팬으로서 소설 잘 봤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래.”
“댓글 놔두고 개인 연락처를 알아내서 직접 얘기하겠다고? 아무리 소설을 재밌게 읽었어도 그렇지···. 그건 좀 아니다. 정 뭐하면 ‘사실 이제껏 감상문을 쓴 건 내 동생이었고, 동생이 네가 쓴 소설을 정말 좋아하더라.’ 하고 전해줄까?”
솔직히 내가 이제 와서 [성검의 주인]이란 소설을 애정 하기란 쉽지 않다.
그 속에 담긴 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이야기니까.
각색된 결말도 별로다.
진짜 결말은 너무 암담해서, 솔레르티아가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수정하려 노력한 결과물이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휴마누스와 전부 결혼시키는 건 너무 성의가 없잖아!’
기왕 세상이 엉망이 되었어도 희망이 남아있다는 내용으로 각색하고 싶었다면, 일행들이 각자 능력을 펼쳐 세상을 재건하는 쪽으로 마무리 지었어야 했다.
온갖 이간질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세상을 구하고자 노력한 이들이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옮겨 적으면서, 그들의 삶에 이입하긴 한 걸까?
“···그냥 동생이 작가님의 양심은 안녕하신지 궁금해한다고만 전해줘. 안녕하다면 그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겠지.”
“나 지금 쓰는 소설 완결이 코앞인데, 다 쓰고 나면 그 소설 좀 읽어 봐야겠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얘가 이러지?”
“안 돼! 읽지 마, 절대로.”
“그러니까 더 읽고 싶어지는데?”
“어차피 내가 쓴 감상평 읽었으니까 내용 대충 알잖아.”
“괜찮아, 난 스포일러 따위에 굴하지 않으니까!”
한참 누나와 티격태격하며 입씨름을 벌이고 있자니, 어디선가 명랑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얄밉게 ‘싫은데? 읽을 건데? 어쩔?’ 하고 떠들어대던 누나가 조용히 핸드폰을 확인했다.
“어?”
“왜 그래?”
“너 소개팅 들어왔다.”
“뭐어?!”
“이거 봐봐. 얘 여자앤데, 나한테 동생을 소개시켜 달라고 하잖아.”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누나의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화면에는 메신저 앱이 띄워져 있었는데, 대화 상대는 ‘최지혜’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이모티콘도 없이 그냥 이름 석 자로만 저장된 걸 보면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닌가 보다.
그리고 방금 도착한 글의 내용은···.
[ 언니. 갑자기 이런 부탁해서 죄송한데… 제가 언니의 동생분과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요. 혹시 자리를 주선해 주실 수 있을까요?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았다.
다시 대화 상대의 이름을 확인했다. 누나 친구 중에서 내가 아는 사람이 몇 있긴 한데, ‘최지혜’라는 이름은 오늘 처음 본다.
그런데 이 사람이 대체 나를 어떻게 알고 누나에게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잘 됐네!”
“아니···. 난 지금 연애 같은 건 별로 관심이 없어서.”
“진짜 안 만날 거야?”
“응.”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누나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그러자 누나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얘가 [성검의 주인] 작가인데?”
“···뭐?!”
그렇다면 말이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