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2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22화(1022/1105)
1022회
97.공작님이 없는 세상 (4)
* * *
솔레르티아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우리 집 근처의 작은 개인 카페였다.
누나가 이 카페의 핸드 드립 커피를 좋아하는지라 심부름차 자주 와 봤던 곳이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15분가량 일찍 도착하여, 음료와 조각 케이크를 주문하고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이렇게 일찍 나온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는 내가 누나와 닮아서 알아보기 쉽다는 것이다.
누나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 나와 함께 찍은 셀카이기도 하고.
그러니 내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면 솔레르티아가 어련히 알아서 합석하겠지.
반면에 나는 ‘최지혜’의 얼굴을 모른다.
괜히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간, 아무나 붙잡고 ‘혹시 최지혜 씨···. 아, 아니시라고요? 죄송합니다.’를 반복해야 할 테다.
그런 귀찮은 짓을 하느니 집에서 조금 일찍 출발하는 편이 낫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필요하고···.’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한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이거다.
나는 솔레르티아에게 먼저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 놓고, 과거 세르펜스와 나눴던 대화를 회상했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어째서 그녀가 세르펜스에게 그리 모질게 굴었는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 지이잉···.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솔레르티아에게 물어볼 말을 정리하고 있자니, 진동벨이 울렸다.
카운터에 가서 음료와 케이크를 받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쟁반에 놓인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이걸 대체 왜 시켰을까 벌써부터 후회된다.
‘유자 에이드와 딸기 프레지에라···.’
원래 카페에 가더라도 커피보다는 다른 음료를 주로 마셨으니, 유자 에이드 쪽은 그냥 그러려니 넘길 수 있다.
하지만 딸기 프레지에는 내가 왜 시킨 건지 모르겠다.
딱히 먹일 사람도 없는데.
진열대에서 맛깔스런 딸기의 단면과 하얀 크림. 그리고 윗면을 덮은 새빨간 딸기 쥬레를 본 순간, 얼결에 같이 달라고 말해버렸다.
한숨을 푹 쉬고 포크를 들어 조각 케이크의 끄트머리를 잘라 입에 넣었다. 달고 부드러운 맛이 사르르 녹아내려 혀끝에 맴돌았다.
‘이 케이크, 세르펜스가 좋아할 맛인데···.’
유자 에이드를 한 모금 마시니 상큼함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아, 이렇게 갑자기 헤어질 줄 알았으면 유자 디저트도 자주 먹을 걸 그랬나?’
꾸역꾸역 조각 케이크를 먹어 치우고 있자니 코끝에 진한 커피향이 스쳐지나갔다.
누가 핸드 드립 커피를 주문했나 보다.
‘그러고 보면 에드나도 직접 커피를 내려 마셨는데···.’
에드나도 보고 싶어졌다.
몸에 당이 잔뜩 들어왔지만, 그리움으로 울적해진 기분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모두를 다시 보고 싶다는 갈망만 커졌다.
이러다 조경용 바위를 보고 윈스톤이 그리워지는 거 아닐까 싶어 걱정되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자.’
나는 케이크가 담겨있던 빈 접시를 옆으로 치워 놓고, 유자 에이드도 한 번에 원샷했다.
다음부터는 카페에 와도 디저트는 절대 시키지 말아야지.
음료도 유자 들어간 거나 커피는 안 시킬 거다.
그렇다고 프라푸치노나 에이드처럼 단 음료를 주문하면 세르펜스가 떠오를 게 뻔하고, 일반 차를 시키자니 다 함께 티타임을 즐긴 게 떠오를 것 같다.
‘그럼 대체 뭘 시켜야 하지?’
뜻밖의 문제를 맞닥뜨린 탓에 고뇌에 빠지려는 찰나, 맞은편 자리에 누군가가 앉으며 카페라떼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 자리에 앉은 누군가의 모습을 확인했다.
긴 생머리에 머리띠를 한 처음 보는 여성이다.
“와~! 진짜 선화 언니 판박이네요?”
이목구비도 헤어스타일도. 그 어디에도 솔레르티아와 닮은 구석이 없건만.
발랄하게 웃는 표정만은 내가 아는 솔레르티아의 모습과 똑 닮아있었다.
그러나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내가 미간을 찡그리자, 솔레르티아가 얼굴에 띄웠던 미소를 지우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시온···. 아니, 선우 씨. 많이 화났어요?”
“안 나게 생겼습니까, 그럼?”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멱살을 잡아채고 싶다.
내가 그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 건 이곳이 공공장소라 보는 눈이 많기 때문이자.
솔레르티아. 아니, 최지혜가 하필이면 오프 숄더 블라우스를 입은 탓에 잡을 멱살이 없는 까닭이며.
현재 내게 이성이 남아 있는 덕분이다.
‘그보다···. 설마하니 저 옷, 멱살잡이 방지책은 아니겠지?’
나는 최지혜를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보다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그만두었다.
룩스메아의 멱살도 안 잡았는데, 솔레르티아의 멱살만 잡는 것도 좀 차별 같고.
껄끄러운 상대와 오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으니, 할 얘기만 대충 끝내고 빨리 집에 돌아가야겠다.
그렇게 결정을 내렸으나 유감스럽게도 최지혜 또한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었다.
“근데 선우 씨는 그곳에서 얼마나 있다가 돌아오신 거예요?”
“그런 건 왜 묻습니까?”
“돌아오는 방법을 알자마자 바로 오셨는지 어쨌는지 궁금해서요.”
“······.”
무시할까 하다가 얘기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니 그냥 답해주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 카페가 너무 조용했다.
노랫소리는 잔잔했고, 손님들이 있기는 하나 다들 조곤조곤 작은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우리도 그에 맞춰 목소리를 낮추면 되는 일이긴 하지만.
대화를 하다 보면 욱해서 언성이 높아질 수도 있으니 미리미리 대비하는 게 좋다.
그 대비란 바로 필담이고, 이 세상에는 필담을 나눈 후 간단하게 증거를 인멸할 수 있는 문명의 이기가 존재했다.
나는 태블릿 pc를 꺼내어 필기 앱을 켰다.
최지혜는 그런 내 행동을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내가 스타일러스 펜으로 글자를 적기 시작하자 ‘아, 필담 하자고요?’ 하고 말했다.
그러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자기도 태블릿 pc를 챙겨올 걸 그랬다며 중얼거렸다.
[ 시온 나이로 스물다섯 4월 마지막 날에 빙의되고 스물아홉 2월 말까지 있다 왔으니까, 만으로 4년 조금 안 됐습니다. ]“애매하네요. 바로 저를 따라 오시거나 한참 늦게 오실 줄 알았는데···.”
내가 적은 글을 본 최지혜가 의외라는 듯이 반응했다.
그 속 편한 반응에 화가 울컥 치밀어 올라 나도 모르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이곳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알려준 건 그쪽이잖아요. 그럼 제가 이상한 타이밍에 돌아왔다면 당연히 무슨 문제가 있었겠거니 생각해야죠.”
물론 그 방법으로 돌아온 건 아니지만.
그 방법조차 쓸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렸고, 그게 어떤 상황이었는지 일일이 설명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최대한 감정을 빼고 상황만 전달한들, ‘내가 너 때문에 이런저런 험한 일을 당했으니까, 죄책감을 느껴라.’ 하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내가 악숭 세력에 납치당한 건 어디까지나 마왕 탓이다.
그걸 최지혜의 탓으로 돌린다면 그 이전에 룩스메아를 탓해야 하고, 그럼 세르펜스도 함께 탓해야 한다.
그러고 싶지 않다.
이미 비꼬면서 문제가 생겼다고 말해 놓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좀 우습지만.
무엇보다도 최지혜에게 그 일에 관해 사과를 받아 봤자 기분만 나빠질 뿐이다.
본론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상대가 시종일관 저자세로 나온다면, 원망하고 탓하기도 쉽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쪽은 어떤 방법으로 돌아온 겁니까?”
“그건···. 잠깐 펜 좀 빌릴게요.”
최지혜는 내 일에 관심이 없는 건지 내가 말을 돌리니까 그냥 넘어가 준 건지,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필기구들을 넘겨주고 뭐라고 적는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실 그리 궁금한 건 아니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말을 돌린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앞서 나눈 대화와 연관 있는 질문을 꺼냈을 뿐이다.
그런데 의외의 답변을 보고야 말았다.
[ 다량의 수면제에 고통 없이 죽는 독을 섞어서 먹었어요. ]“예?!”
“왜 그렇게 놀라세요?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잖아요.”
깜짝 놀라는 내 모습에 최지혜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고는 방금 자신이 적은 글을 확인하더니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지워버렸다.
아무래도 거짓으로 지어낸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세르펜스가···. 아···, 그냥 적을게요.”
나는 다시 필기구를 받아 들고 하려던 말을 적었다.
[ 솔레르티아 씨의 몸은 다른 세상의 존재를 불러오기 위해 준비된 몸이니까, 죽는 거 말고도 이곳으로 돌아올 별도의 수단이 존재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세르펜스가 그렇게 말하던데요? ] [ 전 분명 가게 정리 후 죽을 거라고 말씀드렸는데요? 공작님이 저더러 죽음을 가볍게 생각한다는 소리까지 하셨으니, 제 말을 잘못 이해하신 건 절대 아닐 테고. 그냥 거짓말 하셨나 보네요. ]막힘없이 술술 써 내려가는 최지혜의 글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세르펜스가 내게 거짓말 했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녀석이 미워졌다거나 속았다는 사실에 화가 난 건 아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시 할 말을 잃긴 했지만.
내가 죽음이라는 단어와 도통 친해지질 못하니까.
죽는다 해도 그게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며, 다른 육체로 옮겨가는 것뿐이라는 걸 알더라도.
친했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내가 충격을 받을까 봐 숨겼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선우 씨를 많이 아끼긴 했나 보네요. 돌아오는 방법은 솔직하게 전달했으면서, 그런 걸 숨길 정도면···.”
솔레르티아도 세르펜스의 의도를 대강 짐작했는지, 녀석의 거짓말에 아무런 유감도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기보다는 신기해 하는 반응에 가까웠다.
[ 네, 그 녀석이 저를 많이 아끼긴 했죠.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세르펜스는 원래 배려심이 깊고 마음이 여립니다. ]“그냥 선우 씨 앞이라서 그런 모습을 연기한 거 아닐까요? 선우 씨, 그 사람에게 숨기는 거 없이 다 말했잖아요.”
“지금 그 녀석이 제 역할을 알고 있어서, 제 앞에서 일부러 연기했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솔···. 아니, 지혜 씨가 그 녀석과 제대로 친해지지 않았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죠. 알고 보면 그냥 그냥 정에 굶주린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지혜 씨도 적극적으로 그 녀석과 친해졌으면 금방 알아챘을걸요?”
잠깐에 불과하지만 최지혜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기껏 그쪽 세상에 불려가 놓고 스크롤을 찍어내고 가게 운영만 하다가, 세르펜스의 야옹쇼도 못 보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다니.
그쪽 세상의 2회차 삶과 3회차 삶. 그리고 이곳에서의 삶까지. 총 3번의 인생에 걸쳐 크나큰 손해를 본 수준 아닌가?
[ 진짜 왜 그러셨어요? ]“네? 뭘요?”
“아직 다 안 적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글씨를 쓰는 손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 탓에 글자가 괴발개발 엉망이 되었지만 알아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 저처럼 제약에 걸려 사명을 잊은 것도 아니니까, 더 적극적으로 세르펜스와 친해지려고 노력할 수도 있었잖아요. 아니면 저한테라도 귀띔해 주시거나. 그런데 솔레르티아 씨는 어째서 그렇게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신 겁니까?그쪽 세상을 떠나 이곳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마당에, 세르펜스에게 모진 말을 해서 상처 줄 정도로 그 녀석이 싫어서? 그래서 관계되고 싶지도 않았던 겁니까? ]
“네? 제가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고요?”
최지혜가 누명이라도 뒤집어쓴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상처받은 사람은 10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데, 상처를 준 사람은 말을 뱉자마자 잊어버린다더니 딱 그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