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25)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26화(1026/1105)
1026회
97.공작님이 없는 세상 (8)
* * *
– 딩~동~.
초인종을 누르고 약 1분쯤 기다렸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현관문이 열리기는커녕, 다가오는 발소리라든가 누구냐고 물어보는 말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온다는 걸 알 테니 집을 비우지는 않았을 텐데?’
내 얼굴이 잘 보이도록 초인종에 달린 카메라 앞에 서서 다시 한 번 벨을 울렸다.
그러고 나서야 현관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곧이어 띠리리 하는 멜로디와 함께 도어락 잠금이 풀리고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아주 오랜만에 보는 친구, 배주원의 얼굴에는 귀찮음이 서려 있었다.
나는 반가움에 얼싸안고 싶은 기분인데 상대는 저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물론 이해는 한다. 나야 주원이를 몇 년 만에 본 거지만, 얘는 나를 며칠 만에 보는 걸 테니까.
당연히 반가운 건 나뿐이겠지.
“친구 집에 놀러 오는데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해?”
“아니, 항상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오던 놈이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길래 무슨 일 있나 했지.”
“최근 들어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여도, 허락 없이 막 집에 쳐들어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거든.”
“이제 와서 뭔 예의를 차리겠다고···. 문 열어주기 귀찮으니까 그냥 하던 대로 해.”
내가 귀찮아서가 아니라 문을 열어주기 귀찮아서 표정이 구렸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시들해졌던 반가움이 되살아나고 기분도 좋아졌다.
나는 신이 나서 활짝 웃으며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짐을 주원이에게 떠안겨 주었다.
“옛다, 선물!”
“이게 다 뭐야?”
부스럭거리며 비닐 봉투 안에 든 라면과 과자를 본 주원이의 입꼬리가 헤벌쭉 올라갔다.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마트에 들러서 장을 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뿌듯한 마음을 만끽하며 친구의 곁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주원이의 자취방은 원룸형인지라 바로 침대가 보였고, 나는 그것에 이끌리듯 다가가 풀썩 몸을 던졌다.
“어휴! 또 오자마자 남의 침대를 차지하고 누워서 뒹굴거리네.”
“우리가 남이야?”
“아직은 남이지.”
“응?”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나는 엎드린 채로 고개를 돌려 주원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이 친구가 누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까먹고 있었다.
“뭐야, 그 반응은? 설마 내가 선화 누님을 좋아한다는 걸 까먹은 거야?”
“아, 아닌데? 잘 기억하고 있는데?”
“의심스러운데···.”
“것보다 아직도 포기 못 한 거야?”
“너는 친구가 되어 가지고, 사랑을 응원해주지는 못할망정 포기하란 소리나 하고 있냐?”
“네가 한두 번 차인 게 아니니까 하는 소리지. 싫다는데 계속 고백하는 것도 범죄래.”
“그렇게 집요하게 굴지는 않았거든?”
주원이가 볼멘소리로 툴툴거렸다.
확실히 집요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아직도 내가 얘랑 친구로 지내지, 도가 지나쳤으면 오랜 우정이고 뭐고 진작에 절연했을 거다.
적절히 선을 지킨 덕분에 누나도 주원이를 귀엽게 보는 눈치였다. 그냥 동생의 친구로 여겨서 그렇지.
“조별 과제를 지배하는 조련 마스터가 그렇게나 좋아?”
“조별···, 뭐?”
“우리 누나 대학교 때 별명이 조별 과제의 지배자, 조련 마스터래.”
“엄청나게 화려하고 멋있는 별명이네!”
뜬금없이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표정을 구기던 친구가 태세를 바꿨다.
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별명을 멋있다고 하다니 진짜 중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고, 라면이나 끓여 줘.”
“그걸 왜 나한테 시켜? 먹고 싶으면 네가 끓여.”
“손님한테 라면을 끓이라고 하다니, 무슨 대접이 이따위야?”
“네가 무슨 손님이냐?”
“집주인이 문을 열고 들여보내 줬으니 손님이지.”
“너 이러려고 초인종 누르고 기다렸냐?”
딱히 그런 건 아니었으나, 휴마누스가 공작저에 멋대로 쳐들어오는 걸 보고 반성하게 됐노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응!’ 하고 대답했더니 주원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는 내가 문을 열어주나 봐라···.”
나는 냄비에 물을 받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베개를 가슴 앞에 받치고 엎드려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본래대로라면 이럴 때 웹 소설을 한두 편 읽어주면 딱인데.
지금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뭘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메신저 앱을 켜서, 가족들이나 친한 사람들과 나눴던 지난 대화를 훑어 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세르펜스와 필담을 나눴던 종이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나에 관한 기억이 사라진 거면, 내가 그곳에 남겼던 흔적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것들마저 전부 사라진다면 엄청 아쉬울 것 같다. 반대로 남아있다면 내가 가져오고 싶다.
다른 건 몰라도 필담 종이는 기억을 잃은 세르펜스보다 나한테 더 필요한 물건 아닌가?
문득 그 세상을 추억할 물건이 세니어 뿐이라는 게 서러워졌다.
세니어는 불법 무기라서 쉽게 꺼내 볼 수도 없는데.
‘도검 소지 허가증이라도 따야 하나?’
나는 곧바로 도검 소지 허가증에 관해 검색했다.
그리고 도검류의 출처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가 필요하다는 문구를 확인하고, 조용히 휴대폰 화면을 껐다.
이건 글렀다.
평생 불법 무기 소지자로서, 언제 범죄 사실을 들킬지 몰라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할 운명인가 보다.
좌절하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있자니, 친구가 일어나서 라면을 먹으라며 내 엉덩이를 내려쳤다.
이불 속이 안전하다는 진리를 망각하고 이불을 덮지 않은 내 실책이다.
장난으로 때린 거라 그리 아프지는 않았으나 괜히 분했다.
“이거 먹고 뭐 할래?”
“글쎄?”
“PC방이나 갈까?”
“그다지 안 땡기는데.”
“아니면 뭐 영화나 드라마라도 볼까?”
“흐음, 그것도 별로···.”
내가 라면을 먹으며 설렁설렁 대답하자 주원이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놀자고 찾아왔으면서 뭘 하고 놀지 생각도 안 하고, 자신이 의견을 내는 족족 기각시키니 짜증 난 모양이다.
쫓겨나기 전에 뭐라도 의견을 내야겠다.
“우리 술 마실래?”
“너 알쓰잖아.”
세르펜스와 술을 마셨던 기억이 떠올라 충동적으로 던져본 말이었는데, 주원이가 잊고 있던 현실을 내게 들이밀었다.
그러고 보니 이 몸은 알쓰, 그러니까 알코올 쓰레기였다.
술을 마실 수 있던 시온의 몸이 그리워졌다.
“맥주는 도수 낮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 맥주를 마시고 기절한 게 누구더라? 죽고 싶으면 어디 마셔 보든가.”
“에이, 뭐 이래···.”
나는 투덜거리며 술 대신 라면 국물을 들이켰다.
얼큰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느낌에 속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든 것도 잠시.
역시나 뭔가 부족하다. 내가 지금 바라는 건 이런 게 아니다.
“술도 못 마시는 애가 갑자기 무슨 술타령이야?”
“그냥 취하고 싶은 기분이라서 그래.”
“그니까 왜?”
“······.”
술 얘기는 괜히 꺼냈나 보다. 벌써 후회스럽다.
당연하게도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기에, 냄비에 얼굴을 처박다시피 하며 라면을 먹는 데 열중했다.
내가 라면을 거의 다 먹어갈 때 즈음 주원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냉동실 칸을 여는 걸 보니 얼려놓은 밥을 전자렌지로 데워서 가져다주려나 보다.
‘라면을 먹고 나면 밥을 말아 먹는 게 국룰이긴 하지.’
다시 고개를 숙여 얼마 남지 않은 면발을 젓가락으로 건져 먹는데, 댕그랑 하고 맑은소리가 울렸다.
유리컵에 얼음을 넣는 소리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 그 생각대로였다.
갑자기 웬 얼음인가 싶어 주원이를 가만히 지켜보니, 그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어 얼음이 든 잔에 그것을 따랐다.
“술을 마시고 싶어도 못 마시는 사람 앞에서 지금 혼자 마시려는 거야?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너무하네.”
“아, 가만있어 봐.”
라면을 끓여 줬으니 설거지 정도는 내가 할 생각이었는데, 집주인이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 손님답게 가만히 있어야겠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주원이가 하는 양을 조용히 구경했다.
그는 숟가락으로 맥주를 마구 휘저어 얼음을 녹이더니 갑자기 소주잔을 꺼내 들었다.
숟가락으로 녹아서 작아진 얼음 두 개를 소주잔에 옮기고, 맥주도 조심조심 떠서 소주잔에 다섯 스푼가량 부었다.
그리고 남은 공간은 그냥 찬물로 채웠다.
“너 이거 마시고도 뻗으면 다시는 술을 입에 댈 생각도 하지 마라.”
“뭐야, 나 주는 거였어?!”
“취하고 싶다며? 그럼 취해야지.”
“내가 진짜 친구 복은 넘친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선화 누님이랑 잘 되게 좀 도와줘.”
주원이가 내게 소주잔을 건네려다 말고 손을 뒤로 빼더니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말했다.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건지, 갑자기 생각나서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직접 도와주기는 뭐해도 술에 대한 보답으로 정보를 던져주는 것쯤은 괜찮을 것 같다.
유리잔에 든 얼음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주원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빨리 술을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아마도.
“네 연애는 네가 알아서 해야지. 그래도 정보를 하나 주자면···. 우는 얼굴이 예쁜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
“진짜? 그래서 내 마음을 안 받아주고 자꾸 날 울리나?”
“···미안, 그냥 농담이었어.”
“뭐야?!”
좋다 말았다며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친구의 취향이 매우 의심스러워졌다.
‘조별 과제를 지배하는 조련 마스터’라는 별명을 멋있다며 치켜세웠던 게 그래서였나 싶고.
“왜 그렇게 쳐다봐?”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누나 얼마 전에 남친이랑 헤어졌다더라.”
“이번엔 진짜 정보겠지?”
“응, 그러니까 이제 술 줘.”
주원이가 한 번 믿어보겠다고 말하며 맥주가 든 소주잔을 내게 내밀었다.
가까이에서 냄새를 맡아 봐도 알코올 냄새는커녕 맥주 특유의 향조차 거의 나지 않았다.
이럴 거면 그냥 무알코올 맥주를 마시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은 건 내 착각일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오늘의 목적은 술맛 나는 음료를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을 마시고 취하는 거다.
나는 경건하게 소주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살짝 혀를 내밀어 맛을 봤다. 이 정도면 진짜 그냥 맹물 수준이다.
좀 더 용기를 내어 소주잔을 기울였다.
“뭐야, 간에 기별도 안 가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알코올이 간을 똑똑똑 두드리며 기별을 넣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정신이 알딸딸하다.
“너 그거 다 마시면 뻗겠다. 이제 그만 마셔.”
주원이가 내 손에서 소주잔을 뺏어가서 남은 술(?)을 원샷했다.
그러더니 지금 이딴 걸 먹고 취한 거냐며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어처구니가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억울해애~! 술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술주정 부릴 거면 집에 가.”
“흐어엉!!”
“알았어, 안 쫓아낼 테니 울지 마!”
“너무해! 세상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차라리 더 먹이고 재울 걸 그랬나···?”
엉엉 우는 나를 보며 주원이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