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2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28화(1028/1105)
98. 공작님의 의문 (1)
* * *
◇
이상한 상실감에 시달린 지 오늘로 사흘째다.
정신을 어딘가에 두고 온 것처럼 멍하고 가슴이 답답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미칠듯한 슬픔이 밀려들고,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생긴 듯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선명해졌다.
반면에 원인은 아무리 떠올리려 애써 봐도 흐릿하기만 하다.
“세르펜스, 괜찮아요?”
말을 붙여 오는 유지스의 표정에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다.
그녀의 너머로 보이는 다른 이들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를 걱정해 주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속히 이 영문 모를 감정에서 벗어나야 하건만. 원인조차 모르는 것을 해결할 방도가 있을 턱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우울의 바다에 빠져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라앉고 또 가라앉아 깊고 깊은 밑바닥까지 닿으면, 의문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에.
“···괜찮···습니다.”
사실은 조금도 괜찮지 않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저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괜찮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솔직하게 답해 봤자 모두를 곤란하게 만들 뿐이었으므로.
괜찮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유지스가 내게 괜찮으냐는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듯, 나 또한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다는 상투적인 답변을 내놓았을 따름이다.
질문을 건넨 사람이 유지스가 아닌 윈스톤 경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어제도 오늘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내 대답을 끝으로 대화가 끊겼다.
하지만 유지스는 여기에서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는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모처럼 악숭이들도 나타나지 않고 조용한데, 오랜만에 간식 어때요? 곧 세 시잖아요.”
짐짓 밝은 목소리를 꾸며내어 기운차게 말하는 유지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입맛이 없으니 됐다는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내가 ‘으음···.’ 하고 침음을 흘리며 어물거리자 그녀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간식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제가 어제 지나온 마을에서 유자 크럼블 쿠키를 샀거든요? 하나 먹어봤는데 진짜 달고 맛있어서, 꼭 세르펜스랑 같이 먹고 싶었어요.”
“저···, 유지스. 죄송하지만 지금은 딱히 무언가를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닙니다.”
“안 돼요. 며칠째 식사도 부실하게 드셨잖아요. 유자가 싫으면 딸기는 어때요? 사과나 블루베리가 들어간 간식도 있어요. 아니면 초콜릿이라든가, 캐러멜이라든가···.”
늘 유자가 들어간 간식만 구매하고 권하던 유지스가 다른 것들을 권해왔다. 분명 나를 생각하여 구매한 것들이리라.
어느 것 하나 끌리는 게 없지만.
간절한 표정으로 반쯤 애원하다시피, 이것저것 권하는 유지스의 모습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냥···, 유자면 됩니다.”
“네! 그런데 세르펜스, 제게는 말을 놓기로 하지 않으셨나요?”
“음···.”
그 말대로 유지스에게 말을 놓은 기억이 있기는 하다.
하나 지금은 말을 놓으려고 하면 이래도 되는 걸까 싶어 혀가 뻣뻣하게 굳었다.
성검의 선택을 받은 건 내가 아닌 휴마누스이니, 더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모두를 차별 없이 대할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아직 대륙을 구원해야 한다는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까닭인가···?’
그런 이유라면 어째서 이전에는 유지스에게 말을 놓았던 것인지 해명되지 않는다.
돌연 머릿속에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어지럽고 지끈거리며 뇌가 쪼개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긴 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버텼다.
모두에게 지금보다 더 큰 걱정을 떠안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반. 이 고통을 떨쳐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나머지 반을 차지했다.
후자의 이유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고 있노라면 공허감이 조금 메워지는 것 같아서,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무언가를 잊은 듯하면서도 잊지 않은 듯한. 모순된 이 느낌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다.
“말을 놓는 게 정 불편하시면, 그냥··· 높이셔도 괜찮아요.”
내가 그러했듯이 유지스가 조금도 괜찮지 않은 얼굴로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녀가 그러했듯 나는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모르는 척 넘어갔다.
틈틈이 시계를 확인하던 유지스는 세 시가 되자마자 모두를 멈춰 세우고, 무언가 바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테이블이랑 의자를 꺼내주시겠어요?”
가만히 서서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 내게 유지스가 원하는 바를 말했다.
그제야 다 함께 둘러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를, 내가 챙겨 들고 다녔다는 정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그것들을 꺼내 놓으면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구하고자 전 대륙을 유랑하고 있었다.
그러는 도중에 고급 가구를 이용하며 편안함을 추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간식 따위를 먹으며 시간을 소비하고, 필요 이상의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도 해선 안 될 짓이다.
하물며 고급 디저트에 다량으로 들어가는 설탕은 사치품에 속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 즐길 거리가 못 된다.
‘애초에 나는 어쩌다가 이런 기호 식품에 손을 대게 된 거지···?’
유지스가 유자 크럼블 쿠키를 인원수만큼 준비된 접시에 담아 나눠주는 동안, 지끈거리는 두통을 견뎌내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고통을 겪는 건 익숙한지라 생각을 하는 데 아무런 장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억을 끄집어내는 게 쉽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 겪어본 터라 당혹스러웠다.
‘처음 내게 디저트를 권했던 건···, 유지스였나? 그녀가 공작저로 오기 전에도 단 것을 제법 즐겼던 것 같은데···.’
어느 날 갑자기 시녀가 차와 함께 간식을 가져다주었다.
주방에 새로 들어온 신입이 전대 공작 부부가 정해놓은 규칙을 알지 못하여, 차와 곁들여 먹을 간단한 군음식을 내온 것이 계기가 된 게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그즈음부터 식단에도 변화가 생겼으니 그게 맞을 거다.
‘아마도···.’
결론을 내리긴 했으나 명료한 느낌이 아니다.
어째서 내가 그것들을 물리지 않고 먹었으며, 왜 다음번부터는 그러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남았다.
간식을 준비한 이에게 무안을 줄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먹게 되었는데, 그 달콤함에 현혹되어버리고 만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세르펜스, 어서 드셔 보세요!”
유지스의 재촉에 잠시 상념을 접고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이들의 접시보다 내 앞의 접시에 유독 많은 양의 쿠키가 담겨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상큼한 유자향과 함께 단내가 훅 풍겨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달지 않았다.
쿠키 위에 덮인 크럼블이 입안에서 돌아다니며 꺼끌꺼끌한 느낌을 주는 게, 마치 모래를 씹는 듯하여 불쾌하기만 했다.
“어때요, 맛있죠?”
기대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유지스를 실망시킬 수 없어서,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또 한 입 쿠키를 베어 물었다.
내가 기억하고 좋아했던 단맛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당혹감을 숨기고 일행들 몰래 쿠키를 먹는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인상을 찡그린 건 단것을 싫어하는 윈스톤 경뿐이고, 나머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쿠키를 먹고 있었다.
혹시 방금 먹었던 쿠키 하나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먹던 것을 급히 먹어 치우고 새 쿠키를 먹어 보았다.
여전히 모래를 씹는 듯한 느낌이 났다.
유자 맛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한데, 정말로 그 맛을 느끼는 건지 짙은 유자향 때문에 그렇게 착각한 것인지 헷갈렸다.
잠깐 숨을 멈추자 유자의 맛 또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몸 상태가 나쁘고 입맛이 없어서, 음식이 맛없게 느껴지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난감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으나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다. 문제가 생긴 감각이 미각이라서.
다른 감각에는 이상이 없으니 전투를 치르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는다.
어차피 간이 되어 있지 않은 음식을 먹는 건 익숙했기에, 미각을 잃었다 한들 문제 될 건 없다.
최근 몇 년간 식도락을 즐긴 것으로 족하다.
전대 공작···. 그러니까, 아버지의 가르침을 잊고 단것을 탐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를 위해 간식을 사온 유지스를 생각해서라도 접시를 깔끔히 비우고 싶었지만, 모래를 씹는 듯한 감각이 괴로워 반절밖에 먹지 못하였다.
자신의 성의가 무시당한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유지스는 반이나 먹어 줘서 기쁘다며 좋아라 했다.
내 눈치를 살피느라 우중충했던 분위기가 아주 조금 밝아졌다.
유지스를 비롯하여 다른 이들의 표정에 안도감이 피어났다. 나를 진심으로 아끼며 걱정해 주었다는 방증이다.
절대 이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니 말로만 괜찮다고 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아진 척 연기를 해야 한다.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나 자신을 숨기는 건 20년도 넘게 해 왔던 일이다.
“그동안 걱정시켜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유의하겠습니다.”
“살다 보면 컨디션이 안 좋고 남을 걱정시킬 수도 있지, 그런 거로 유의할 것까지야···.”
휴마누스가 어처구니없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나름 진심을 담아 한 말이었으나, 굳이 그 얘기를 꺼내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적당히 머쓱한 미소를 꾸며내면 되겠지.
“그보다 몸 상태는 좀 어때?”
“지금은 나쁘지 않습니다.”
“머리나 가슴이 아프거나 하진 않고?”
“네.”
내 대답에 휴마누스는 잘 됐다며 하하 소리 내 웃었다.
다른 이들. 특히 유지스와 푸로르 씨는 긴가민가한 눈치였으나, 나처럼 모처럼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가는 듯했다.
의심을 사지 않도록 될 수 있는 한 평소처럼 행동하는 게 좋겠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상실감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야 한다.
테이블을 치우고 재차 걸음을 옮겼다.
어제는 말을 타는 도중 멍해져서 낙마할 뻔했고, 오늘 오전에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집중해서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한편으로는 평소의 내가 어떻게 행동해 왔는지 일상 루틴을 점검했다.
‘그러고 보니···, 매일 하나씩 챙겨 먹던 사탕을 먹지 않은 지도 꽤 되었군.’
왜 그랬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떠오르는 게 없는 거로 보아, 특별한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입맛이 없어서 손이 가지 않았던 걸 테다. 지금처럼 미각을 잃은 건 아니었으나 식욕이 사라진 건 제법 오래된 일이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서서히 미각을 잃었던 게 아닐까 한다.
멀쩡한 모습을 연기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내친김에 사탕을 하나 꺼내 먹기로 했다.
화려한 크리스털 유리병 속에 담긴 사탕은 전부 녹색이었다.
본래는 다양한 색의 사탕이 담겨 있었으나, 가장 좋아하는 맛을 아껴 먹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사과 맛 사탕을 한 알 꺼내어 입에 넣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단내와 혀에 닿는 동그랗고 맨들거리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그냥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조금 기분이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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