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35)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36화(1036/1105)
99. 공작님의 소망 (1)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일단 따라나와.”
누나는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그렇게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누나를 따라가는 대신, 세니어를 끌어안고 가만히 늘어졌다.
몸을 일으킬 기운이 없었고 그럴 기분도 아니었기에.
‘세르펜스, 이 헛똑똑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나를 지키지 못했다니, 결코 그렇지 않다. 녀석은 나를 잘 지켜줬다.
룩스메아도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악마의 그릇이 되기 전에 구할 수 있었던 건, 나를 지키고자 했던 세르펜스의 간절한 마음 덕분이라고.
세니어에 담긴 녀석의 신성력을 동원하여 나를 구해낼 수 있었다고.
간혹 세르펜스가 속을 썩이긴 했지만, 자라면서 보호자의 속을 뒤집어 놓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아이가 어딨겠는가?
세르펜스는 내게 늘 감사하며 자신이 받은 것보다 더 큰 애정을 돌려주고, 물질적인 풍요까지 떠안겨 주면서도 더 해주지 못해서 안달 난 녀석이다.
세상천지에 이런 효자가 또 어디 있을까.
내가 다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르펜스가 그런 녀석이니까.
때때로 서운함을 느낄지언정, 내가 진심으로 녀석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건 불가능하다.
세르펜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른다.
“빨리 안 나와?”
한참이 지나도 내가 따라나오지 않자, 기다리다 못한 누나가 다시 돌아와 재촉했다.
나는 그제야 마지못해 이불 속에서 기어나왔다.
누나를 따라 부엌으로 향하자 식탁 위에 놓인 음료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였고, 다른 하나는 패션 후르츠 알갱이와 오렌지 슬라이스가 들어있는 과일 에이드였다.
음료를 사 온 걸 보니 최지혜와 카페에서 만난 모양이다.
‘그런데 저 컵홀더에 인쇄된 상호명은···.’
내가 최지혜와 만났던 그 카페다.
저기에서 만나는 건 줄 알았으면···. 아니, 이런 가정은 그만두자.
만약 내가 누나를 쫓아갔다면 세니어를 확인해 볼 생각을 못 했을 테다. 그랬다면 꿈속펜스가 진짜 세르펜스라는 걸 깨닫는 데에도 한참 걸렸겠지.
어쩌면 내가 미쳐서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건 아닐까, 나 자신을 의심하게 됐을 수도 있고.
“아까부터 뭘 껴안고 있는 거야?”
“어, 이거···?”
질문을 받고 나서야 내가 세니어를 껴안은 채 누나를 따라왔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세니어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와야 하나 고민하다가, 어차피 들킨 거 계속 안고 있기로 했다.
세르펜스도 세니어를 통해 꿈속에서 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세니어.”
“세니어?”
“풀네임은 ‘세르펜스 주니어’야.”
“주니어? 남의 애를 네가 왜 데리고 있는데?”
“내 애의 애니까?”
“뭔 헛소리야?”
아무래도 누나는 내 얘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치다.
하기야 세니어가 어째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니까 그럴 만도 하다.
세니어의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며, 이걸 만들어 준 세르펜스가 얼마나 기특한 녀석인지 얘기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그러려면 내가 다른 세상에 다녀온 얘기부터 해야 한다.
내가 소리 없이 입을 열었다가 닫고 조용히 자리에 앉으니, 누나가 빨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빨아 마셨다.
속이 많이 탔는지 순식간에 커피 반절이 사라졌다.
그제야 빨대에서 입을 뗀 누나가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어. 네가 그걸 뭐라고 부르든, 어디에서 났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게 진짜 검만 아니라면.”
“진짜 맞는데?”
이제 어쩔 수가 없다. 세니어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누나도 공범으로 만들 수밖에.
나는 세니어를 슬쩍 뽑아서 누나에게 예리하게 벼려진 날을 보여주었다.
세니어가 매끄럽게 검집에서 뽑혀 나오며, ‘스릉-‘ 하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자 누나의 안색이 변했다.
다시 세니어를 검집에 꽂았지만, 한번 변한 누나의 안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너, 그거 어디서 났어?!”
“선물 받았어.”
“누구한테?”
“······.”
“‘세르펜스’라는 사람한테 받은 거야?”
“어?!”
누나의 입에서 무척이나 익숙한 이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생각해 봐도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다.
앞서 세니어가 ‘세르펜스 주니어’의 줄임말임을 밝혔으니, 누나가 세르펜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도 당연하다.
“내게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생각이야?”
“···할 얘기 없어.”
“군대도 다녀온 녀석이 때늦은 사춘기가 왔나, 대체 왜 이럴까? 응?”
“······.”
내가 또다시 입을 꾹 닫아버리자, 누나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모습이 무섭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세니어를 만지작거렸다.
“유선우, 너 누나가 그렇게 못 미더워? 진짜 실망이다.”
“못 미더운 건 아닌데···.”
“아니면 왜 말을 안 하고 혼자 끙끙 앓는 건데?”
“얘기했잖아, [성검의 주인] 때문이라고.”
“그럼 그 칼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 소설 때문이고?”
“그냥 칼이 아니라 세니어야.”
“말 돌리지 마.”
누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엄하게 말했다.
말을 돌린 게 아니었는데 억울하다.
나는 세니어를 남을 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세니어’라는 별도의 존재로 인지하고 있으니 누나도 그렇게 해 달라는 뜻이었다.
“···지혜가 그러더라.”
잠시 정적이 내려앉는가 싶더니 금방 깨어졌다.
뜬금없고 두서도 없는 누나의 말에, 나는 여기서 그 사람 이름이 왜 나오는 거냐는 뜻을 담아 누나를 쳐다봤다.
“동생이 무슨 얘기를 하든 그건 공상이나 망상 따위가 아니니까, 믿어 주라고.”
“···그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다고?”
“응.”
누나가 거짓 한 점 담기지 않은 눈으로 나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누나가 최지혜와 무슨 얘기를 하다 왔는지 궁금해졌다.
“어쩌다 그런 얘기가 나온 건데? 아니, 애초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지혜 씨를 불러냈던 거야?”
“너 그렇게 말하니까 약간 그거 같다. 드라마에서 남주 엄마가 여주를 만나고 왔다고 하니까, 남주가 자기 엄마한테 막 따지는 느낌?”
“사람 혼내다 말고 갑자기 드립 치지 마.”
“그냥 느낀 점을 말했을 뿐이야.”
그러고 보니 예전에 세르펜스가 자신을 혼내면서 딴짓하지 말라고, 내게 불만을 제기했었는데.
녀석의 기분이 지금 내 기분과 비슷했으려나?
앞으로는 세르펜스를 혼낼 때 녀석의 감정 흐름을 고려하여, 진지한 분위기에서 반성할 수 있도록 집중해서 혼내야···.
‘아, 이젠 녀석을 혼낼 일도 없겠구나.’
누나의 헛소리에 황당함만 가득했던 기분이 급속도로 침체되며, 울적함 속에 가라앉았다.
세르펜스에게 자기혐오 따위 하지 말라고, 넌 정말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따끔하게 혼내줘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녀석이 땅을 파고 들어가면 꺼내서 흙을 잘 털어주고 깨끗하게 씻겨 줘야 하는데.
그래서 소심한 꼬질펜스를 당당한 말끔펜스로 만들어 줘야 하는데.
이제 그 녀석의 자존감은 누가 살려주지?
“네가 최근 우울했던 게, 소설 [성검의 주인]의 비극적인 결말 때문이라며? 그래서 혹시 가능하다면, 짧게라도 ‘모두가 행복해지는 if 스토리’를 써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려고 불러냈던 거야.”
딴 생각은 그만하고 대화에 집중하라는 듯, 누나가 내 눈앞에서 딱 소리나게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덕분에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누나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같은 작가로서 그게 얼마나 억지스러운 부탁인지는 알지만, 뭐 어쩌겠어? 이러다가 내 동생이 말라 죽을 것 같은데. 게다가 네가 이제까지 쓴 감상평의 분량이 꽤 되잖아? 그러니까 너를 위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으냐고 우기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고. 애초에 그 감상평도 지혜 걔가 억지를 부려서 쓰게 된 거니까.”
그런 부탁을 하려고 최지혜를 불러냈던 거라면, 누나가 나를 떼어놓고 가려고 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누나는 누나대로 나를 옆에 두고 그런 부탁을 하기도 머쓱했을 테고. 나는 나대로 민망했을 테니까.
“그런 건 필요 없어.”
“응, 지혜도 네가 그렇게 말할 거라고 하더라.”
최지혜가 누나에게 동생이 무슨 얘기를 하든 믿어주라고 말했다는 걸 보면, 내가 [성검의 주인] 속 세상에 다녀왔다는 건 밝히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고 내 문제를 완전히 덮어준 건 아니었다.
어차피 한번 각색도 해 봤겠다, 외전 하나 더 쓴다는 느낌으로 ‘if 스토리’를 내 주고 발을 뺄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내 말을 믿어주라는 얘기를 해가며, 문제는 소설의 엔딩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고 짚어준 걸 보면 말이다.
‘알아서 한다길래, 대충 둘러대겠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내가 모든 걸 털어놓을 수밖에 없도록, 누나가 나를 닦달하게 유도하겠다는 뜻인 줄은 몰랐다.
역시 그냥 따라갔어야 했나?
나는 속으로 최지혜를 욕하다가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 그만두었다.
어쩌면 그녀는 내 등을 밀어준 걸지도 모른다. 계속 그렇게 혼자 앓지 말고, 누나에게 털어놓고 상담하라고.
‘아니, 그럴 거면 그냥 제 입으로 말하든가! 자기가 룩스메아와 짜고 이세계 납치 브로커 짓을 했다고!’
반드시 얘기해야 한다면, 내 입으로 누나에게 말하는 게 나와 누나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건 안다.
그래서 진정하려고 했으나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솔레르티아는 ‘설명할 책임’을 세르펜스에게 떠넘기고 도망친 전적이 있으니까.
이제는 그녀에게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때의 일을 참작해 줄 의무는 없다.
동정은 하나 그것과는 별개다.
“그래서 네가 요즘 우울해한 진짜 이유가 뭐야? 대체 얼마나 믿기 힘든 얘기길래, 나한테도 얘기하지 않고 꼭꼭 숨겨뒀는지 들어나 보자.”
“···얘기하면 믿어줄 거야?”
“너는? 이번에야말로 둘러대지 않고 진짜 이유를 말해 줄 거야?”
“누나가 믿어주겠다고 약속하면.”
“네가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하게 말한다면.”
누나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 대답을 고스란히 돌려줬다.
내가 먼저 누나를 믿지 않고 말을 하지 않았으니, 내가 먼저 약속을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알았어, 세니어를 걸고 약속할게. 그러니까 누나도 꼭 믿어줘야 한다?”
“그래, 그래. 잘 생각했어. 그보다 목소리가 좀 갈라지는 것 같은데, 음료라도 마시면서 얘기해. 이러다 얼음 다 녹아서 밍밍해지겠다.”
시종일관 굳어있던 누나의 표정이 풀리며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음료는 굳이 마셔보지 않아도 달콤할 게 뻔한 데다가, 유자와 비슷한 오렌지가 대놓고 들어있어서.
“나 이제 물 말고 다른 음료는 마시지 않기로 했어. 특히 유자와 같은 감귤류가 들어간 거면 더더욱.”
“갑자기 왜?”
“···세르펜스가 생각나니까. 그 애가 달콤한 걸 엄청나게 좋아하거든. 유자는 유지스가 좋아하고.”
그렇게 말하고 나는 누나의 눈치를 살폈다.
누나가 내 감상평을 주의 깊게 읽었다면, 내가 언급한 이름들이 [성검의 주인]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름이란 걸 알아챘을 테다.
나도 모르게 긴장했는지 세니어를 붙든 손바닥에 땀이 나 미끌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누나는 그 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까 전에도 얘기할까 하다 말았던 건데, ‘세르펜스’라면 [성검의 주인]의 최종 보스 이름 아니야? 그리고 ‘유지스’는 거기 나오는 엘프 궁수 이름이고···.”
“그 둘 얘기가 맞아.”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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