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3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39화(1039/1105)
99. 공작님의 소망 (4)
“자, 자. 그날이 올 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려면 우선 잘 먹어야겠지?”
누나가 그렇게 말하며 방치된 에이드가 담긴 컵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이런 음료는 반드시 섭취할 필요가 없는 기호 식품인 데다가, 따지고 보면 건강에 해로운 편이니 안 먹는 게 낫지 않나 싶다.
하지만 더는 누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한 손으로 컵을 잡아 들며 입을 뗐다.
“알았어, 마실게. 근데 이거 이름이 뭐야? 내가 지혜 씨 만나러 이 카페에 갔을 때만 해도, 패션 후르츠가 들어간 메뉴는 없었던 것 같은데···.”
“패션 망고 오렌지 파인애플 키위 에이드야. 오늘 새로 나온 신상 음료래.”
“아무리 여름이라도 그렇지. 열대 과일을 되는대로 마구 때려 넣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카페 사장님은 대체 제품 단가와 재고 관리를 어떻게 하려고 이런 음료를 만드신 걸까?
나는 그런 걱정을 하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자기 주장이 강하지만, 공통적으로 상큼함과 달콤함을 지닌 열대 과일들이 입안에서 한데 어우러지려는 찰나.
맹물이 끼어드는 바람에 열대 과일들이 흩어져버렸다.
“어때? 맛있어?”
“···밍밍해. 탄산도 다 빠졌고.”
“그러게 얼음이 녹기 전에 빨리 마시라고 했잖아.”
“이거 안 마시면 안 돼?”
“쓰읍···!”
누나가 잇새로 바람을 빨아들이며 날 노려봤다.
다 마실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밍밍한 에이드를 억지로 마셨고, 누나는 내가 컵을 다 비운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누나는 이제부터 일 시작할 테니까, 저녁에 뭐 먹을지 생각해 놔.”
내게 저녁 메뉴 결정권을 떠넘기고 방에 쏙 들어가버리는 누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적을 운운했던 건 내게 뭔가를 먹이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떨떠름하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떼쓰며 우는 아이를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안 울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신대!’라는 말로 달래듯이.
어른의 편의에 의한 거짓말에 당한 느낌이다.
‘···아무렴 어때.’
나는 테이크아웃 컵 두 개를 잘 씻어서 재활용 통에 넣어 놓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 저녁 시간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 세르펜스의 상태를 보러 잠을 청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잠이 올 것 같지도 않거니와, 고작 한 시간 가량 지났다고 녀석의 상태가 나아졌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일단 치우자.’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는 매트리스를 다시 침대 프레임 위로 올렸다.
세니어는 수납장에 다시 넣지 않았다.
계속 지니고 다니다가, 부모님이 오시면 벽과 매트리스 사이에 쑤셔 넣고 이불도 벽 쪽으로 밀어 놓을 생각이다.
수납장에 넣는 것만큼 완벽한 은폐는 불가능하겠지만.
‘아직은 세르펜스도 나를 볼 수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나는 세니어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핸드폰 화면을 켰다.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누나의 말도 나름 일리가 있으니까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건 준비해 둘 생각이다.
어차피 지금 당장 할 일이 없기도 하고.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시간이 남아돌 땐 친구를 만나거나, 게임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 게임을 하거나. 아니면 웹 소설을 읽었는데···.’
가나안 대륙에서 지낼 때 가장 아쉬웠던 건 뭐니뭐니해도 고추장의 부재였다.
그곳에도 매운 음식이 있긴 했지만, 내가 원하던 한국적인 매운맛은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각종 디저트를 비롯하여 서양식 음식은 버젓이 존재하면서.
심지어 식재료들도 이쪽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왜 한국 음식만 없는지 모르겠다.
만약 [성검의 주인]이 진짜 소설이었다면.
새로운 음식과 식재료를 창작해 내긴 힘들고, 매번 음식 설명을 늘어놓는 건 귀찮은 데다가 분량 낭비도 심하고. 그렇다고 등장인물들을 굶길 수는 없으니.
대충 서양 음식만 존재한다고 작가가 설정해 둔 거려니, 그렇게 생각하며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아무래도 서양 배경의 판타지 소설에서 귀족들이 둘러 앉아, 김치찌개를 뒤적거리며 돼지 고기를 찾고 있으면 확 깨니까.
‘하지만 [성검의 주인]은 실존하는 세상의 얘기를 글로 옮긴 거지, 지혜 씨가 창작한 세상이 아니잖아?’
나는 속으로 그렇게 불만을 투덜거리며 ‘고추장 담그는 법’을 검색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게시글을 터치해서 내용을 훑어본 뒤, 별생각 없이 다짜고짜 고추장 만드는 법부터 검색한 나 자신의 멍청함에 탄식했다.
그리고 창을 끈 뒤 모든 ‘장(醬)’의 시작인 ‘메주 만드는 법’을 검색했다.
‘어차피 만드는 건 공작저 사용인들에게 맡기면 그만이니까, 만드는 방법과 주의사항만 숙지해 두면 되겠지.’
* * *
시간이 날 때마다 각종 음식 레시피를 검색하여 메모하고, 달달 외우는 게 일상이 되었다.
아예 요리책을 들고 갈 수 있으면 편하고 좋을 텐데. 번역은 내가 해야겠지만.
애초에 내가 가나안으로 갈 수 있는지도 모르고, 어찌어찌 간다 하더라도 영혼만 넘어갈지 어떨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안전하게 그냥 암기하기로 한 것이다.
‘시온의 육체는 아직도 악숭이들 수중에 있겠지? 마왕이 나를 기억하고 있으니 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당장 시온의 몸에 빙의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몸을 빼앗는 건 싫고, 육신을 가지고 넘어가기에는 룩스메아가 너무 무능하다.
악숭이들이 보관 중인 시온의 몸을 세르펜스와 일행들이 되찾는 타이밍에 맞춰,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일행들이 악숭 세력의 심부를 발견하여 쳐들어가는 것보다, 악숭이들이 대악마를 소환하는 게 더 빠를 테다.
이쯤 되니 정말 내가 그쪽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는 한지 회의감이 들었다.
“아, 몰라 몰라. 나 잘 거야.”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세니어를 들고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자꾸 낮잠을 자면 밤에 못 자는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저쪽 세상은 언제 무슨 사건이 터질지 알 수가 없으니, 밤에 통잠을 자는 것보다 틈틈이 나눠서 자는 게 상황을 파악하기에 용이한 걸 어쩌랴.
그렇게 나 자신을 합리화하며 이불을 덮고 눈을 붙이기 전에 세니어를 살펴보았다.
신성석은 반쯤 투명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이게 완전히 투명해지면, 나는 그쪽 세상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더 빨리 갈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세니어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이 몽롱해지는가 싶더니 세르펜스와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원형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있었는데, 실내 장식을 보아하니 신전의 회의실인 듯하다.
어디 지부인지는 모르겠지만.
“누적된 인명 피해가 너무 커요.”
“하! 살다 보니 악마가 소환되지 않아서 불안해지는 날도 다 오네.”
리에나가 웬 서류를 들여다보며 탄식하자, 푸로르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빈정대는 투로 불안감을 표출했다.
이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현재 전력으로는 최상급 악마가 동시에 여럿 소환되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걸 알지만, 나는 안도했다.
< 하루라도 더 오래 살 수 있으면 좋지. >
꽥꽥이의 말대로라면 대악마 하나만 소환되어도 이들은 전멸을 면치 못할 테니까.
그런데도 악숭 세력이 아직까지 대악마를 소환하지 않고 계속 제물을 모으는 건, 세르펜스를 확실하게 제압하여 생포하기 위해서일 테다.
인질로 써먹을 수 있는 ‘나’의 존재가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으니까.
다행히도 악숭 세력은 세르펜스의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건 알아챘지만, 녀석이 나를 어중간하게 기억한다는 건 아직 파악하지 못한 눈치였다.
알았다면 가짜를 내세워 일행들을 함정에 빠뜨렸을 테니.
< 아! 아닌가?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으려고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들 곁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가능할는지 모르겠다.
세르펜스가 꿈을 통해 내 일상을 볼 수 있다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세르펜스는 꿈을 꿔도 악몽에 시달리기만 할 뿐. 나를 지켜보지는 못하는 것 같다.
종종 잠드는 게 두렵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꼴을 몇 번 보기도 했으니 확실하다.
< 그런데도 혹시 모를 가능성을 지우지 못해, 온종일 세니어를 끼고 있는 나도 참 어지간하단 말이지. >
나는 혀를 쯧쯧 차며 세르펜스의 주위를 날아다녔다.
그러다 세르펜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어차피 부딪힐 일도 없는데 혼자 놀라서 후다닥 물러난 게 민망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누가 본 것도 아니니 민망해할 것도 없나?
“먼저 쉬러 가겠습니다.”
“어, 그럴래···?”
휴마누스가 어색한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보내 주었다.
다른 일행들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기만 할 뿐 녀석을 붙잡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일행들이 세르펜스를 대하기 어려워하는 게 보여서 가슴이 답답하다.
< 아도르, 그럼 못 써. 친구들이랑 사이 좋게 잘 지내야지. >
세르펜스에게 들리지 않는 잔소리를 쏟아내며 녀석을 따라 회의실을 벗어났다.
어차피 녀석을 중심으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질 수 없으니, 굳이 내가 움직일 필요는 없었지만.
내 의지와 무관하게 질질 끌려다니는 듯한 느낌이라 열심히 녀석의 뒤를 쫓았다.
“흐윽···.”
{ ‘아직까지 찾지 못하다니···.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과연 선우는 무사할까? 아니, 당연히 무사하지 않겠지.’ }
{ ‘선우, 제발 내 곁에 돌아와다오.’ }
{ ‘내가 다 잘못했으니, 이제 그만 날 용서해 주면···.’ }
{ ‘전부 나 때문이다. 나 때문에 그대가···.’ }
방에 들어가 문을 닫기가 무섭게 세르펜스가 방문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동시에 남들 앞에서는 꾹꾹 억눌러 두었던, 눈물과 부정적인 생각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 탓에 머리가 무거워졌지만, 이것도 이제는 익숙하다.
< 방문 앞에서 궁상떨지 말고, 얼른 씻고 자! 씻을 기운이 없으면 일단 자고 내일 씻는 것도 괜찮고···. 너 최근 사흘간 아예 못 잤잖아? 아닌가? 나 없을 때 좀 잤어? >
어차피 듣지 못할 걸 알지만, 나는 녀석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계속 말을 걸었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는 내 목소리가 녀석에게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던 그때 녀석의 몸이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 뭐, 뭐야?! >
반사적으로 녀석을 지탱해 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세르펜스는 내 손과 몸을 그대로 통과하여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피로가 누적된 탓에 혼절해 버린 걸 테다.
<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러게 피곤하면 곧장 침대로 갈 것이지! 나는 널 옮기기는커녕 누굴 불러올 수도 없는데···. >
나는 패닉에 빠져 정신을 잃고 쓰러진 세르펜스의 주변을 정신없이 날아다녔다.
일행들 앞에서 기절하거나 누가 발견하기 쉽게 복도에서 기절했으면 좀 나았을 텐데.
왜 하필 방에 들어와서, 그것도 찬 바닥에서 기절한단 말인가?
< 이 녀석 분명 자신이 기절할 거라는 거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거겠지! >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분통을 터트리던 찰나.
돌연 암전되듯 세상이 어두워지더니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낯설지만 처음 보는 장소는 아니었다.
1040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