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3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40화(1040/1105)
99. 공작님의 소망 (5)
< 여긴···, 어린 세르펜스가 고문당하던 그 지하실이잖아···. >
이 장소가 어디인지 파악하고 나자 섬뜩함과 불길함이 엄습했다.
어째서 내가 이런 곳에 와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아니, 사실 짚이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생각은 나중에 하고 우선은 세르펜스부터 찾아야 한다.
녀석을 이런 장소에 혼자 둘 수는 없으니까.
나는 세르펜스에게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질 수 없으니 녀석은 분명 이 근처에 있을 터.
마침 눈앞에 꺼림칙하고 수상쩍은 그림자 덩어리 같은 게 보였다.
내 본능이 세르펜스는 저 너머에 있을 거라고 소리쳤다.
단숨에 날아서 그림자 덩어리를 뛰어넘으려 했으나, 이 공간에서는 몸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조심스럽되 빠른 걸음으로 그림자 덩어리에 다가갔다.
바로 코앞에 당도하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아닌, 인간 형상을 띤 여러 그림자의 군집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그림자 인간들의 얼굴에는 눈도 달려 있었다. 그들이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던 탓에 알아채는 게 늦었다.
그림자 인간들을 헤치고,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
세르펜스는 그곳에 있으리라.
< 잠깐, 잠깐만요···. 사람 지나갑니다, 좀 비켜주세요!! >
이 공간에서는 내게도 물리력이 생긴 것인지 그림자 인간들을 통과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그림자 인간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것들을 밀치며 나아갔다.
비켜 달라 말해도 꼼짝도 안 하는 건 둘째 치고, 왜 이렇게 차가운지 모르겠다. 마치 얼음 사이에 낀 느낌이다.
이러다 동상을 입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손끝이 얼얼해질 즈음이 돼서야, 나는 겨우겨우 그림자 군중 속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내 예상대로 그림자 인간들은 세르펜스를 둘러싸고 있었다.
녀석은 열 살 남짓으로 보이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잔뜩 다쳐서 피투성이 몰골을 한 채 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니, 묶여 있었다.
< 세르펜스!! >
나는 서둘러 녀석에게로 뛰어갔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녀석은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만 깜박거릴 뿐. 그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말을 거는 행위를 멈출 수가 없었다.
< 일단 여기에서 벗어나자. >
그렇게 말하며 녀석의 몸에 감긴 밧줄을 풀어냈다.
밧줄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그건 세르펜스의 옷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연하게도 내 손에도 피가 묻어났다.
< 다친 걸 왜 내버려두는 거야? 얼른 치료해! 그리고 겸사겸사 내 손도 좀 치료해 줄래? >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림자 인간들을 밀치느라 손끝이 감각이 둔해진 까닭에, 매듭을 푸는 게 쉽지 않았다.
세르펜스가 이런 모습으로 이 장소에 있는 거로 보아, 이곳은 분명 녀석의 악몽 속일 테다.
나한테는 꿈속의 꿈인 셈이고.
< 그런데 차가운 거 좀 만졌기로서니, 손가락이 잘 안 움직여서 매듭을 풀기 힘들어진다는 게 말이나 돼?! 세르펜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
매듭을 푸는 데 집중하면서도 계속 입을 나불거리며 세르펜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한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일까?
단단하게 묶여 있던 매듭이 풀린 순간 작고 여린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 안 되다니? >
“아직 교육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나는 흠칫 놀라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수많은 그림자 군중 사이에서, 전대 공작 놈으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내가 세르펜스를 풀어주려 하든 말든 그림자 군중은 미동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심지어는 눈조차 깜박거리지 않았다.
세르펜스는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보다,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차가운 시선들이 더 무서웠나 보다.
그러니까 이런 악몽을 꾸는 거겠지.
어린아이가 고문당하는 장면을 직접 보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스러운 한편, 이 녀석이 이렇게 피투성이가 되는 걸 막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나는 손을 더욱 바삐 놀려, 의자와 세르펜스의 몸에 휘감긴 밧줄을 빠르게 제거했다.
혹시 뒤늦게라도 전대 공작 놈이 튀어나오면 곤란하기도 하고, 세르펜스를 이 이상 구경거리가 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지켜보는 이들이 현실의 인간이 아닌 꿈속의 허상일지라도.
< 그딴 건 교육이 아니야. 너는 이딴 곳에서 고통받지 않아도 돼. >
“아닙니다, 저는 모두를 위해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만약 이 교육이 잘못된 거라면, 저렇게나 많은 사람이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 저 사람들은 그저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게 싫어서 방관하고 있을 뿐이야! >
나는 그렇게 말하며 어린 세르펜스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녀석은 순순히 일어나 주지 않았다.
잔뜩 겁먹어 희게 질린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붙잡은 채, 덜덜 떨면서 내게 사정했다.
“다시···, 다시 원상태로 되돌려주십시오. 제가 교육 도중에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면, 아버지께서 화내실 겁니다.”
의자에 묶인 채로 가만히 앉아 있어 봤자, 그다음에 돌아올 것은 끔찍한 고문뿐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애초에 내가 밧줄을 풀어준 거지 자기가 도망치려 한 것도 아니지 않나?
< 내가 알려준 건 다 잊은 거야? 이딴 건 교육이 아니라 그냥 학대일 뿐이야. 네가 말을 잘 듣는다고, 그 인간이 네게 칭찬을 해 주며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기는 해? 널 사랑하지도 않는 그 인간을 네가 꼬박꼬박 아버지라 부르며 따를 필요는 없어. >
나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꿇어앉아 녀석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전대 공작 놈을 떠올리면 분노가 차올라 자꾸만 언성이 올라갈 뻔했지만.
어린 세르펜스가 겁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분통을 억누르고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가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애정에 매달리는 건 구차하고 나약한 인간이나 할 짓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약해빠진 정신 상태로는 이 세상을 구할 수 없으니, 저는 그런 걸 바라서는 안 됩니다.”
< 그걸 알려준 인간이 잘못된 가치관을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
“그럴 리는···.”
< 있어. 정말로 네가 이 세상을 구하고 싶다면, 이런 지하실에 처박혀 있을 게 아니라 밖에 나가서 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해. 나랑 같이 여기서 나가자. 나가서 많은 것을 보고, 스스로 판단하는 거야. >
나는 어린 세르펜스를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품속의 아이가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내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지 않는 걸 보면, 이 녀석 역시 도망치고 싶었던 게 틀림없다.
단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시도하지 못했던 걸 테다.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은 이가 있다면.
응원을 들어도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무너져버린 이가 있다면.
지금 보는 것보다 훨씬 근사한 세상이 바로 앞에 있다는 걸,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데려가 주는 게 우선이다.
스스로 걸어보라고 얘기하는 건 그다음에 할 일이다.
< 이 아이를 도와주지 않을 거라면 비켜! >
아이를 안은 채 저 차가운 군중 속을 헤쳐나갈 생각에 막막하여, 되는대로 외친 말이었는데.
우습게도 그림자 인파가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 줬다.
세르펜스가 생각하는 군중의 이미지가 어떤 느낌인지 대충 알 것 같다.
직접 나서서 도와줄 용기가 없으면서도, 누군가가 돕는 걸 막아서서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원치 않는 철저한 방관자.
이 세상엔 이런 이들만 있는 게 아닌데. 애석하게도 어린 세르펜스의 곁에는 이런 사람들밖에 없었다.
아니, 전대 공작이 이런 사람들로만 공작저를 채운 걸 테다.
나는 따라붙는 그림자 군중의 시선을 무시하고 그것들을 지나쳐 층계에 진입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지하실을 벗어나고자 한 번에 두 칸씩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올랐는데도 층계가 계속 이어졌다.
현실에서 세르펜스와 함께 이 계단을 오르내렸을 땐, 이렇게까지 길지 않았는데.
어린 세르펜스가 느끼기에는 이 계단이 이렇게나 길었던 걸까?
그래도 언젠가는 끝이 보이리라, 그렇게 믿으며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꿈속의 꿈인데도 숨이 차오르고, 두 칸씩 뛰어오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다리가 무거워졌다.
넘어질 뻔한 뒤로는 뛰는 것도 그만두고 한 칸 한 칸 신중히 계단을 밟으며 나아갔다.
나는 그렇다 쳐도, 이미 많이 다친 상태인 세르펜스가 계단에서 구르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너무 힘들어서 다리가 후들거리다 못해 허벅지와 종아리가 터질 듯이 아파져 왔다.
그래봤자 이건 꿈일 뿐이다. 그러니까 차오르는 숨과 다리에서 느껴지는 아픔은 그냥 착각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한 게 효과가 있는 건지, 아니면 그게 사실이기 때문인지.
내 다리는 내 의지대로 멈추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어째서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 허억, 허억···. 너는 내게···. 아니,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니까···! >
안 그래도 숨차 죽겠는데 말까지 하려니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하다.
이제까지 세르펜스가 악몽에 시달릴 때마다, 녀석이 만들어낸 ‘꿈속의 선우’는 매번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 녀석을 구해준 거려나?
정말 그런 거라면 아무리 꿈속의 존재라 해도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저는 소중한 것을 만들면 안 됩니다.”
<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개탄했다.
이런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서 ‘너는 내게 소중한 존재니까.’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니까.’라고 말한 거였다.
그렇기는 한데 막상 녀석의 입에서 예상했던 대답이 나오자 탄식을 금할 길이 없다.
“아신다면 대체 왜···.”
< 하아, 하아···. 잠깐, 잠깐 쉬면서 얘기 좀 하자. 내가, 힘들어서 포기하려는 게 아니라···. 헤엑, 휴식의 중요성이···, 허억···. 너무 힘들면 쉬어가도 괜찮은 걸 알려주려고···. 에고, 죽겠다···. >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며, 행여나 어린 세르펜스를 놓칠세라 품속의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내게 기대어 오지도. 그렇다고 나를 밀어내려고 뻗대지도 않는 게, 꼭 사람이 아닌 인형을 안고 있는 느낌이다.
현실이 아니기 때문일까, 편한 자세로 몇 번 숨을 고르자 호흡은 금방 진정되었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뺐다.
그 대신 녀석의 손을 꼭 붙잡고 두 눈을 맞춘 채 입을 열었다.
< 네가 왜 소중한 걸 만들면 안 된다고 말하는지는 알고 있어. 그게 네 약점이 될 거라는 얘기를 들어서겠지. 뭐 그런 주장을 펼치는 건 전대 공작뿐만이 아니고, 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기는 해. 그런데 그거 알아? >
어린 세르펜스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그 주장은 ‘소중한 것을 지킬 때야말로 사람은 강해질 수 있다.’는 주장에 늘 패배하기 마련이야. 왜냐면 그게 진실이거든. 지키고 싶은 게 없다면 강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니까. >
“저는 이 세상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니 강해질 수 있습니다.”
< 그럼 이 세상이 네게 소중한 거야? >
“저는, 소중한 것을 만들면···.”
< 소중한 게 아니면 왜 지키려고 하는 건데? >
“저는 그러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하는 아이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마치 자신이 부족한 탓에,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죄송하다고 사죄라도 하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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