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40)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41화(1041/1105)
99. 공작님의 소망 (6)
나는 양손으로 잡고 있던 세르펜스의 손을 한 손으로 고쳐잡았다. 작은 두 개의 손이 한 손에 쏙 들어왔다.
이렇게나 작은 아이가 다 큰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짐을 홀로 짊어지고 있다니.
생기 없이 창백한 뺨을 어루만져 온기를 전해주고 싶다. 그러한 마음으로 손을 들어 올린 찰나.
“흣···!”
아이가 몸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고 숨까지 멈췄다. 단단히 이를 악문 게 누가 봐도 맞을 것을 대비한 모습이다.
그냥 손을 거둘까 하다가, 때리려다 그만둔 거라고 착각할까 봐 마저 손을 뻗었다.
대신 아주아주 느릿하게.
어린아이라 해도 세르펜스는 세르펜스다. 힘을 싣지 않고 천천히 다가오는 손의 기척을 느낄 수 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한쪽 눈만 슬쩍 떠서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안심하라는 뜻에서 최대한 상냥하게 웃어 보이며, 아이의 뺨에 손가락 하나를 톡 가져다 댔다.
잔뜩 움츠러들었던 작은 몸이 긴장을 푸는 게 보였다.
< 사람은 그냥 태어났으니까 태어난 것일 뿐, 뭔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야. 모든 사람이 그렇게 태어났고, 태어난 김에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해. 그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사람들은 각자 설정해둔 작은 목표들을 이뤄나가고, 보람과 기쁨을 느껴. >
안쓰러운 마음에 울고 싶어졌지만, 나는 애써 울음을 참고 아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아이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했다.
정말로 다 잊었나 보다. 내가 해 준 말은 물론이고 자신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그 모든 기억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갖다 버렸던 사고방식을 주워올 건 또 뭐람?
“행복···, 보람···, 기쁨···?”
세르펜스는 마치 낯선 언어라도 들은 것처럼 어색하게 세 단어를 읊조렸다.
분명 이미 알고 있는 단어고, 한때는 그 뜻을 이해하기까지 했었는데.
< 타인이 떠넘긴 책임감만으로 헤쳐 나가기엔, 네가 짊어지려는 짐은 너무 무거워. 애초에 한 사람 몫의 짐이 아니니까. 평화로운 세상? 좋다, 이거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동의 목표로 두고 다 함께 힘을 모아 만들어 나가야지,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겨서는 안 돼. >
“하지만 모든 사람이 악마와 마왕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기에 신께서도 성검을 대륙에 내려보내어 한 명의 구원자를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
< 신도 성검의 주인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라고는 말하지 않았어. 정말로 단 한 명의 강자가 필요했을 뿐이라면, 굳이 성검을 25년이나 일찍 내려보낼 이유가 없잖아. 그냥 위기가 닥쳐왔을 때, 가장 강한 이에게 넘겨주면 그만이니까. >
“그렇다면 신께서는 왜···.”
< 왜긴 왜야? 위기가 닥쳐올 예정이라는 걸 경고하고, 다 같이 힘을 키우고 있으라는 뜻이지. 그리고 성검이 나타난 해에 태어난 아이 중에서 성검의 주인을 고르는 건···. 스물다섯 살이면 체력이 팔팔하면서도 기술과 정신이 어느 정도 밑받침될 나이잖아? 이건 내 추측일 뿐이지만, 일종의 동기 부여가 아닐까 싶어. 열심히 훈련하다 보면 세상을 구하는 용사가 될 수 있다고 말이야. >
“그 말씀은, 애초에 내정자 같은 건···.”
< 없어. >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아이의 마음속에 작은 의구심조차 남지 않도록.
< 멋대로 ‘내정자’ 따위를 정하여 아이의 의사를 무시하고 험하게 굴린다거나, 성검의 주인 한 명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거나. 그런 건 신의 뜻이 아니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이 넓은 땅덩어리 어디에서 악마가 소환될지 알 수가 없는데. 심지어는 한 번에 한 마리의 악마만 소환될 거라는 보장조차 없는데, 그걸 어떻게 한 명이서 다 커버할 수 있겠어? >
“으음···.”
어린 세르펜스가 그도 그렇다는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이 녀석은 이때부터 으음거리는 버릇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현재의 버릇이 꿈에 반영된 거려나?
그게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녀석의 상처가 더 신경 쓰였다.
< 이제 더는 혼자서 고통을 감내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프면 치료하고, 지치면 앉아서 쉬고, 외로우면 기대고. 그래도 힘들면 주변 사람들에게 투정도 부리면서, 너 자신을 돌보고 네 행복을 찾아 봐. 네가 어떤 걸 좋아하고, 무엇이 너를 기쁘게 하는지 생각해 봐. 네 최우선 목표는 너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거야. 세상을 지키는 걸 목표로 삼지 마. 그건 그냥 네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둬. >
“그렇게 하면···, 저는 더 강해질 수 있는 겁니까?”
< 응, 너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서 네가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을 거야. >
확신에 찬 내 대답에도 아이는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우물쭈물하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 잘 모르겠지?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지. >
“네에···.”
< 그럼 일단 네가 지금 가장 바라는 게 뭔지, 그것부터 생각해 보자. >
“제가, 바라는 것···.”
< 고민 중에 신경 쓰이면 안 되니까, 아픈 상처도 치료하고. >
“앗, 네, 네.”
세르펜스가 서둘러 신성력을 발휘하여 제 상처를 치료했다.
허둥지둥하는 그 모양새가 어린애다워 귀엽기도 하고, 드디어 녀석이 상처를 치료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낯선 어른인 내게 마음을 열어준 게 고마워서.
비시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 나는 너의 선하고 어진 벗이야. >
“아까는 저와 당신이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라고 하시더니···.”
< 왜, 아닌 것 같아? >
“솔직히 말하자면···, 으으음. 저는 당신을 모릅니다. 하지만···.”
세르펜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라,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미소 띤 낯으로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아이의 입이 열렸다.
“···다른 아이와 저를 착각하신 게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 착각한 거 아니야, 세르펜스. 너는 내게 소중한 존재야. >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그냥,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버렸어. >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 그야 그렇겠지···. >
세르펜스는 그저 기록물을 통해 내 존재를 인지하고 있을 뿐. 진짜로 나를 아는 건 아니니까.
하물며 이곳은 꿈속이고 눈앞의 세르펜스는 정신도 사고방식도, 전부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간 상태다.
그걸 아는데도 기운이 쭉 빠졌다.
“그, 그래도···!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저기, 그러니까, 으음···.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해야 하나, 심장이 막 두근거리고···. 이상하게도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둥둥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 그럴 땐 그냥 기쁘다고 말하면 돼. >
나는 횡설수설하는 아이와 눈을 맞추고, 녀석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대신 정의를 내려주었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르며 생기가 돌자 이제야 좀 살아있는 사람 같다.
“당신이 저를 소중한 존재라고 말씀해 주셔서 기쁩니다.”
<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 나도 기뻐. >
“혹시···. 제가 당신을 소중하게 여겨도 됩니까?”
세르펜스가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불안과 기대가 한데 섞인 그 진지한 얼굴에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 무슨 질문이 그래? >
“제가 당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걸 누군가에게 들키면 악마 숭배자들이나···, 아버지께서···, 망가트려 버릴지도 모르니까. 저 혼자 멋대로 결정하면 안 될 것 같아서···.”
< ······. >
“죄송합니다, 제 부탁은 못 들은 거로 해 주십시오.”
황당함에 아무 말도 못하고 벙쪄있는데, 세르펜스가 감히 욕심을 부려서 죄송하다는 듯 사과하며 급히 말을 철회해 버렸다.
실소든 뭐든 웃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진중하게 표정을 굳히고 아이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 겁먹지 마. 바라는 게 있으면 소망하고, 원하는 게 있으면 가져도 돼. 소중한 것을 얼마든지 늘려나가도 괜찮아. 네가 마음먹고 지키고자 한다면, 그 누구도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망가트릴 수 없을 테니까. >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실 수 있는 겁니까?”
< 그야 너는 ‘아도르’잖아. 네가 지닌 기적의 힘을 믿어 봐. >
“그런···겁니까?”
신중한 어조와 달리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나도 모르게 아이를 끌어안고 머리통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머리카락 색만 빼면 소년펜스 모습을 한 룩스메아와 똑같이 생겼는데, 순수함과 귀여움 수치가 비교 불가다.
이게 바로 짝퉁과 진퉁의 차이겠지.
< 아, 진짜 대박이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지?! >
“저, 저기···?”
< 아, 미안. 네가 너무 귀여워서. >
“···네?”
< 아무튼 그런 거니까, 날 얼마든지 소중히 여겨도 돼. >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놓아주자 세르펜스가 꾸벅 고개까지 숙여가며 감사를 표했다.
그 엉뚱하고도 귀여운 행동에 하마터면 박장대소할 뻔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아이가 비웃음을 샀다고 오해하여 토라져 버릴 수도 있는 만큼,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꾹 참았다.
< 처음으로 소중한 것이 생긴 걸 축하해. >
“감사합니다.”
<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뭐 바라는 건 없어? >
“당신이···, 제 곁에서 쭉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이의 깜찍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내 기분은 한순간에 진창에 처박혔다.
정말 그리하고 싶은데, 선뜻 그러겠노라 대답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도 억울하고 서러워서.
< ···나도 그러고 싶어. >
“하지만, 안 되는 겁니까?”
세르펜스가 낙담하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여기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앞서 한 말과 모순되는 건 둘째 치고, 함께 할 수 없다고 내 입으로 못박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두 손으로 아이의 손을 포개어 잡고 부탁했다.
< 아니, 가능해. 네가 진심으로, 아주 간절하게 바란다면. 그러니 부디 나를 네 곁으로 데려가 줘. >
“데려가 달라니···, 당신은 여기에 있는 게 아닙니까?”
< 응. 나는 지금 네가 있는 곳과 아주 먼 다른 세상에 있거든. 당장 너한테 가고 싶은데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어. 룩스메아도 힘이 부족하다 그러고···. >
“네?”
< 아무튼 너라면 반드시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 거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널 떠난 게 아니야, 믿어 줘. 그리고 부디 날 기억해 줘. >
밑도 끝도 없는 내 부탁에 당황했는지 아이가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가만히 나와 눈을 마주치길 잠시. 곧 세르펜스의 입술이 달싹였다.
“제가 당신을 잊을 리가 없잖습니까?”
나를 잊어 놓고도 잊을 리 없다고 말하는 게 괘씸하긴 했지만, 완전히 잊은 건 아니니 너그럽게 용서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기억을 잃은 전적이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 샘샘이기도 했고.
< 그 말투를 들으니 옛날 생각이 난다. 그땐 나를 죽게 둘 리가 없지 않느냐고 말했었는데, 멘트가 조금 바뀌었네? >
내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아이 모습을 한 세르펜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온종일 대화를 나누고 놀아주며 잔뜩 귀여워해 주고 싶다.
하지만 이곳이 꿈속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되겠지.
특히나 현실의 세르펜스가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걸 떠올리면 더더욱.
< 슬슬 나가자.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계단을 올랐다.
무한히 이어질 것만 같던 층계는 금방 끝을 보였다. 마지막 계단을 밟은 순간 세상은 빛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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