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46)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47화(1047/1105)
100. 공작님과 기적 (5)
* * *
{ 준비를···, 정말 단단히 하고 오셨네요···? }
빛이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인 것과 동시에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소년펜스 모습을 한 룩스메아의 모습이 보였다.
“먼 외국에 갔다 오면 기념품을 사오는 게 사람 사이의 정이잖아.”
문제가 될 만한 물건은 아예 챙기지도 않았지만, 혹시 모른다.
나는 짐을 빼앗길세라 캐리어를 더욱 꼬옥 끌어안고 룩스메아의 눈치를 살폈다.
룩스메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런 나를 내려다보다가, 돌연 흠칫 놀라며 다급한 얼굴을 했다.
{ 아!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
말만 저렇게 해 놓고 캐리어를 뺏어가 소지품 검사를 하는 게 아닐까 했으나, 룩스메아의 얼굴에 떠오른 초조함은 진짜였다.
현재 세르펜스가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지금은 누워서 룩스메아를 경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뭐야, 뭔데?! 무슨 일이야?”
나는 룩스메아에게 질문을 던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서둘러 캐리어의 몸체에서 손잡이를 뽑아 꽉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세니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급할수록 중요한 물건을 손에서 놓으면 안 되는 법이다.
아차 하는 사이에 잊어버려 잃어버리고 마니까.
{ 급하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도르가 포함된 성검 일행은 현재 대악마 둘과 대치 중입니다. 그런데도···. }
“지금 한가롭게 얘기를 나눌 때가 아니잖아?! 빨리 나를 그리로 보내 줘!”
{ ···괜찮으시겠습니까? }
“안 괜찮아도 가야지.”
{ 알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그러하다면야···. }
대악마가 한 번에 둘 이상 소환될 거라는 건 이미 예견했던 바다.
그런데도 막상 그 순간이 현실로 닥쳐오자 불안감에 심장이 요동치고, 식은땀으로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돌아가도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이라니···?!’
억울하긴 하지만, 어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가장 간절하게 기적을 바랄 때는 바로 위기의 순간이니까.
{ 유선우. 어느 세상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당신은 당신입니다. }
“응? 갑자기 그 무슨 당연한 소리를···.”
{ 부디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일분일초가 급박한 까닭인지, 룩스메아가 내 의문을 뚝 잘라버리고는 자기 할 말만 했다.
급한 와중에 좋은 말을 해 줬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말을 잘라먹은 것에 화를 내야 할까?
그 의문이 내 머릿속에 자리를 잡은 시간은 매우 짧았다.
룩스메아의 모습이 서서히 변해가며, 새로운 의문이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 모습은···?’
세상의 풍경이 변화하며 룩스메아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그 탓에 룩스메아의 변화를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지만, 언뜻 본 것만으로도 그 변화의 끝이 어떤 모습일지 능히 상상할 수 있었다.
아니, 굳이 상상할 것도 없다.
내 가방 속 사진첩만 펼쳐 봐도 똑같이 생긴 소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룩스메아는 내 어릴 적 모습을 하고 있었다.
* * *
◇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하늘이 완벽히 밝아지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어둠이 찾아왔다.
곧 어둠이 옅어지며 하늘은 다시 제 빛을 찾았으나 불온한 공기만큼은 여전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나는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탄했다.
머지 않아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상은 했다.
어차피 현재의 전력으로는 최상급 악마가 둘 이상 나타나면, 패배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다만 선우를 만나기 전에 이날이 오고야 말았다는 사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좀 더 일찍 신성석 제작을 시작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든 신성력을 동원해도 신성석을 완성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내가 더 강했다면 마왕의 손아귀에서 선우를 구해낼 수 있었을까?’
무력감이 찾아왔지만, 나는 소망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미완성 상태의 신성석을 깨뜨리고 다시 신성력을 되찾은들, 내가 원하는 행복은 얻을 수 없기에.
완성되지 못한 신성석을 몸속에 품은 채로 간절히 소망하고 또 기도했다.
부디 선우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내가 그와의 추억을 기억할 수 있기를.
언제나 함께하며 같이 행복해질 수 있기를.
“세르펜스!! 악마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얼른 떠나야 해!”
돌연 휴마누스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방에 들이닥쳤다.
현재 모든 힘이 신성석에 묶여있는 까닭에 나는 악마의 위치를 감지할 수 없다.
하지만 휴마누스가 악마의 위치를 감지하고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서 악마가 소환된 것이 틀림없다.
‘만약 내가 악마 숭배자들에게 사로잡힌다면 선우를 만날 수 있을까···?’
승산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니, 죽기 전에 선우와 만날 수 있다면 만남의 형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적들에게 붙잡힌 상태로 선우를 만나 봤자 서로 괴로워질 뿐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도 내가 신성석에 담은 건, 선우를 만나고 싶다는 바람과 그가 안전했으면 하는 마음이니.
어떻게든 그에게 신성석을 전해줄 수만 있다면.
적어도 선우만큼은 안전하게 도주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자진하여 악마들에게 붙잡힌다면, 선우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구할 수 있다.
“뭘 느긋하게 서서 생각에 잠겨 있는 거야?”
“마왕의 최우선 목표는 저입니다. 그러니 저를 두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도망가려는 게 아니야! 도시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수많은 사상자가 생길 테니까, 장소를 옮기려는 거지!”
“알고 있습니다. 휴마누스가 어떤 의도로 떠나야 한다고 말한 것인지 정도는.”
악마는 일정 거리 안에 들어온 성검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이미 성검의 기운을 감지하고 다가오는 중이라면, 도망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만에 하나 도망칠 수 있다 하더라도 휴마누스는 그리하지 않을 거다.
성검의 주인인 그가 숨어버린다면, 악마들이 사람들을 도륙하고 다닐 것은 불 보듯 뻔하기에.
“그럼 왜 너를 두고 가라는 소리를 한 거야?”
“저를 확보한다면 악마들은 일단 물러날 겁니다. 당장은 제가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지만, 저쪽으로서는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을 터이니. 저를 제압하여 본거지에 가둬두고 난 다음에 행동에 나설 것이며, 그마저도 악마 하나는 제 감시역으로 묶이게 될 겁니다. 그러니 교단에 지원을 요청하여 이단 심문관들과 힘을 합친다면···.”
“지금 나더러 널 희생시키란 거네?”
얼음장 같은 휴마누스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휴마누스는 뜨겁고 강렬한 불꽃 같은 사내다.
그가 저런 서늘한 표정과 목소리로 화내는 건 2회차의 기억에서도 보지 못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온도를 머금은 자색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자, 너무 혼란스러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휴마누스는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왔다.
반사적으로 주춤거리며 창가에 바짝 붙어 보았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휴마누스는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말 구해 왔어, 빨리 나와!!”
창밖에서 푸로르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휴마누스는 그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굳어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선우는 일행들을 구하고자 스스로 희생했고, 그 결과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자처하여 악마에게 사로잡히겠다 말하였으니.
휴마누스가 저리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네가 희생하려 해도, 내가 결코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해 두라는 듯, 휴마누스는 나와 눈을 똑바로 맞춘 채 한 자 한 자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사과를 해야 한다. 하지만 마주친 눈동자가 상처 입은 자의 그것이라, 오히려 사과의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그때 다시 휴마누스의 입술이 열렸다.
“챙겨야 할 건 딱히 없지?”
“네? 아, 네···.”
“그럼 됐어.”
다음 순간, 휴마누스가 나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어깨에 들쳐 멨다.
그러고는 내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예기치 못한 그의 행동에 당혹감이 밀려오는 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무, 무, 무슨 짓입니까?!”
“방금 말했잖아? 네가 희생하려고 해도, 내가 결코 그렇게 두지 않겠다고.”
“아, 알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으니 내려 주십시오.”
“싫어, 도망칠 생각이잖아.”
“어차피 지금 제 상태로는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몰라.”
설득을 시도해 봤으나 휴마누스는 아예 내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결국 나는 그에게 들린 채로 여관을 나서야만 했고, 먼저 나와 있던 일행들과 행인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게 되었다.
휴마누스는 그 시선들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무시하는 건지, 그대로 나를 말안장 위에 올렸다.
“세르펜스 나리를 왜 네가 들고 와?”
“자기를 악마들에게 미끼로 던져주고 우리끼리 도망치라길래.”
푸로르 씨의 의문에 휴마누스가 딱딱한 말투로 대답하며, 내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고삐를 틀어쥐었다.
그런 그를 말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밧줄 빌려 드릴까요?”
“아니야, 묶을 시간 없어. 출발하자.”
휴마누스가 유지스의 권유를 거절하며 말을 출발시켰다.
도시를 벗어나는 동안 다시는 희생을 자처하지 않겠노라 얘기를 해 봤지만, 휴마누스는 요지부동이었다.
다른 말로 옮겨 타기는커녕 나를 더욱 단단히 붙들었다.
“이 정도 멀어졌으면 될 것 같아. 말에서 내리자.”
성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도시에서 멀어지자 휴마누스가 말을 멈춰 세웠다.
먼저 말에서 내리자고 제안한 것은 휴마누스였으나, 그는 나를 먼저 말에서 내리게 한 뒤에야 땅에 내려섰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희생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방심시키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윈스톤 경, 네 상관 좀 잡고 있어.”
휴마누스는 내 말을 무시하고 나를 윈스톤 경에게 떠넘겼다.
윈스톤 경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결심을 굳힌 얼굴을 하고 내 팔목을 붙잡았다.
지위를 이용하여 놓으라고 명령을 내려 봤자 듣지 않을 것 같다.
“도망치는 줄 알았더니, 이런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다른 인간들 앞에서 패배하는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나 보지! 아니면 남들의 눈을 피해 살려달라고 빌 생각이라든가? 깔깔깔!”
하늘에서 두 마리의 악마가 나타난 건, 일행들이 풀어준 말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날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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