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4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49화(1049/1105)
100. 공작님과 기적 (7)
◇
악마의 시선 또한 나를 향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악마는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나는 나서지 않을 생각이니까 알아서 해.”
“마신 테네브리오 님께 전부 말할 거야. 네가 얼마나 비협조적이었는지.”
“뭐?!”
“소멸되고 싶지 않다면, 똑바로 하란 소리야.”
소멸이란 단어에 남성형 악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적들이 서로 반목하며 불화를 일으키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나, 지금 상황에서는 좋지 않다.
우리의 전력으로는 바람을 다루는 악마 하나만 상대하기에도 벅차다.
여기에 불을 다루는 악마까지 참전하게 된다면, 그때는 반격 한 번 못 하고 패배해 버릴 공산이 크다.
“플람, 나도 네가 소멸되는 건 원치 않아. 내 힘은 바람이고, 너는 불이잖아? 나는 너를. 그리고 너는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어. 우리의 조합은 최강이라고. 마신 테네브리오 님께서도 그리 생각하시기에 우리를 함께 보내신 거 아니겠어?”
여성형 악마가 남성형 악마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상대의 시선이 자신을 좇고 있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어깨동무를 하고, 그자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네가 욕심을 부리는 건 상관없어. 그게 우리 악마의 본능이니까. 하지만 눈앞의 이득만 보지 말고 먼 곳을 보라고, 이 멍청한 새끼야. 마신 테네브리오 님께서 네게만 큰 상을 내리신다면, 다른 대악마들이 가만히 지켜볼 것 같아? 네 영혼을 갈래갈래 찢어발기고 그것을 취하려 들겠지.”
“······.”
“‘물’이라는 명확한 약점이 있는 너보다는 낫겠지만,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함께 공생하자고. 알아듣겠어?”
“알았으니까, 좀 떨어져.”
남성형 악마가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팔을 치우며 신경질을 냈다.
그래도 여성형 악마는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알겠지?”
“···알긴 아는데, 한낱 인간들 상대로 굳이 나까지 나설 필요가 있을까?”
“넌 대체 뭐가 문제야?”
“나도 모르겠다. 그냥···, 재미가 없어.”
“하, 미친 새끼. 그렇게 나서기 싫으면 불이라도 빌려 주든가.”
여성형 악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건 순식간이었다.
그자는 짜증을 내며 남성형 악마의 손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의 검을 빼앗았다.
졸지에 무기를 빼앗긴 악마는 그것을 되찾으려 하는 대신, 팔짱을 끼며 방관자의 태도를 취했다.
그 모습에 여성형 악마는 그자를 잠시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려 우리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많이 기다렸지? ···라고 말할까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다려 준 건 내 쪽인 것 같네.”
어느샌가 하늘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을 중심으로, 먹구름이 모여들고 비가 쏟아져 내렸다.
하나 여성형 악마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검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렸다.
악마의 손바닥에서 일어난 강렬한 회오리바람은 주변의 빗방울을 모두 집어삼키고, 먹구름마저 먼 곳으로 밀어내 버렸다.
“귀한 시간을 낭비해서 어째? 그러게 다른 마법을 준비하지. 아니면 서로 마지막 인사라도 나누든가. 어지간하면 당해주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젖는 게 싫어서 말이야. 그래도 너무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는 마. 어차피 고작 인간의 마법으로 만든 비 따위에 악마의 불꽃이 꺼질 리는 없으니까. 쉽게 말해 헛고생이라는 거지.”
비아냥대는 악마의 말에 두 마법사가 이를 악물고 마법진을 그렸다.
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이 없는지, 마법진을 구성하는 문자 중 ‘물’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그 단어를 중심으로 ‘불을 진압한다.’라는 문장을 덧붙여 해당 속성을 더욱 강화하고, ‘압축’이란 단어를 더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물의 구체 두 개가 여성형 악마를 향해 날아갔다.
“어째서 인간들은 제 눈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확인하고 절망하려 할까?”
악마의 손에 들린 검푸른 불꽃 검이 휘둘러지고, 물의 구체들은 그것에 닿는 즉시 수증기로 화했다.
그 결과를 쉽사리 믿을 수 없었는지 유지스가 화살에 물의 힘을 담아 쏘아 보냈다.
결과는 같았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2차전을 시작해 볼까?”
검은 바람이 검신을 감싸자 불꽃이 회오리치며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악마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커다란 불꽃을 휘둘렀다.
그것에 담긴 힘이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했는지, 휴마누스가 악마의 앞을 막아서며 방패에 신성력을 쏟아 부었다.
방패에 깃든 용사의 무구 힘이 발현되며, 방패 위로 거대한 방패의 형상이 덧씌워졌다.
“리에나, 결계!!”
그 다급한 외침에, 리에나 씨가 후방 인원뿐 아니라 윈스톤 경과 푸로르 씨까지 감싸는 결계를 펼쳤다.
휴마누스는 그 결계를 발판 삼아 딛고 방패를 앞세워 거세게 몰아치는 불길을 막았다.
용사의 무구와 신성 결계, 이중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쾌한 열기가 느껴졌다.
“깔깔깔!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적당히 해. 그러다 프라시더스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그딴 실수를 할 리 없잖아? 적당한 타이밍이 되면 멈출 거야.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는 주제에 참견하지 마.”
다른 악마의 지적에 기분이 상했는지, 여성형 악마는 바람을 더욱 키웠다.
한층 강해진 불길에 휴마누스의 잇새로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악마가 말한 ‘적당한 타이밍’이란, 휴마누스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때를 의미한 것일 터.
‘만약 내가 따라갈 테니 이들을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제안한다면···, 들어줄까?’
억눌러 놓았던 생각이 다시금 부상했다.
현재는 악마들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거래에 응할 필요가 없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눈앞에서 두 번이나 동료를 내어줘야 하는 무력감을 느끼며 좌절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휴마누스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결코 원치 않겠지만.
이대로 끝을 맞이하는 것보다, 다음 기회를 노려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 그대도 이런 마음으로 희생을 자처한 것인가?’
돌연 나를 두고 도망치라고 말하였을 때. 휴마누스가 그답지 않게 차가운 분노를 드러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악마에게 붙잡힌다면, 그 또한 지금의 나처럼 괴로움에 허덕이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나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다면, 내가 그러하듯 그도 영문 모를 상실감에 고통스러워 하게 되는 걸까 의문이 생겼다.
그 탓에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선우, 그대는 몰랐던 건가? 내가 이토록 당신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
얄궂은 사람.
예고 없이 찾아와 내게 행복과 기쁨을 알려주고, 떠나가며 어린 날 억지로 잠재웠던 고통과 슬픔을 일깨워 버리다니.
소중함을 가르쳐주고 상실감을 떠안겨준 그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곁에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모든 원망을 버리고 오롯이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해 줄 용의가 있다.
“크윽···.”
휴마누스가 휘청이는 게 보였다.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황금빛 방패의 형상에 균열이 이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쩍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진짜 방패에도 금이 갔다.
용사의 무구와 신성 결계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주변 일대는 이미 불바다로 변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검푸른 불길이 휴마누스를 집어삼킬 것만 같다.
‘그를 살리기 위해, 그가 싫어하는 선택을 하는 게 옳은 건가···?’
모르겠다.
그가 죽는 것과 나로 인해 그가 괴로워지는 것. 둘 중 어느 쪽도 선택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선우, 당신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희생을 결정한 것이지? 대답해다오.’
문득 이 자리에 선우가 있었다면 자신이 그리했듯이 내가 희생해야 한다고 말했을지, 나 자신을 소중히 해야 한다고 말했을지 궁금해졌다.
아니, 사실 이런 건 그냥 핑계에 불과하다.
‘나는 그저···.’
선우를 만나고 싶을 뿐이다.
내가 붙잡힌다면 마왕은 분명 2회차의 복수를 할 테지.
어린 시절 당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을 가하는 것은 물론, 이 육신을 그릇 삼아 대륙으로 넘어와 내 손으로 학살을 자행할 터.
그러니 사로잡히기 전에 목숨을 끊어야 하지만, 선우가 마왕의 손에 붙잡혀 있는 이상 그럴 수도 없다.
마지막으로 선우가 안전한 것을 확인하고 싶다.
그리고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만 보고, 그를 기억하며···.
‘···죽고 싶지 않다. 선우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 다 함께 둘러앉아 선우가 준비해 준 차와 디저트를 즐기며, 평화를 만끽하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다.
그렇게 간절하게 생각했을 때, 몸 안에서 빛이 빠져나와 결정(結晶)을 이루었다.
신성석이 완성된 것이다.
“신성석이 완성됐나? 칫, 그래도 상관없어! 그딴 보석 따위로 뭘 할 수 있다고···.”
여성형 악마가 그리 말하며 마기를 한껏 끌어 올린 찰나, 하늘에 찬란한 햇무리가 나타났다.
헤일로 현상은 대기 중 수증기에 의해 태양 빛이 굴절 혹은 반사되었을 때에 일어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햇무리는 그런 자연 현상이 아니다.
“으윽!”
바람을 일으켜 불꽃을 키우던 악마가 비틀거리며 힘을 거뒀다.
반대로 휴마누스의 방패는 균열이 사라지고 다시 새것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천사를 소환하다니···!”
바람의 악마가 이를 갈며 소리쳤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딴 게 아니다.
신성석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인간의 형체를 빚어낸 순간, 잃어버렸던 기억들이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다.
텅 비었던 가슴 속에 희열이 차올랐다.
마침내 빛이 사그라지고 낯선 복색을 갖춘 청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색빛 머리칼 아래 자리한 고동색 눈동자는 검정에 가까웠지만, 무척이나 다정한 빛을 머금었고.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치아는 가지런했다.
청년이 씨익 웃으며 내 쪽을 바라본 순간,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품에 안겼다.
◆
* * *
■
“선우···!!”
빛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세르펜스가 내 이름을 외치며 내 품에 파고들었다.
악마와 대치 중이라고 들었는데 이름을 막 불러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시온의 몸 안에 들어와 있는 것도 아닌데, 언제까지 그의 이름을 빌려 쓸 수는 없으니까.
“이 모습으로 만나는 건 처음인데 바로 알아보네?”
“그야···,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흐윽! 선우는 선우니까···.”
조금 전 룩스메아에게 들었던 말과 비슷한 얘기가 세르펜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룩스메아가 말했을 땐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기분이었는데, 세르펜스가 말하니 느낌이 사뭇 다르다.
굉장히 기뻤다.
‘그보다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나에 관한 기억이 다 돌아왔나 보네?’
하기야 마지막에 룩스메아가 내 어릴 적 모습으로 변했으니 예상했던 바다.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놓고 세르펜스의 등을 도닥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놀람과 반가움 가득한 일행들의 얼굴과 이상하게 빛나고 있는 하늘. 그리고 검푸른 색으로 이글거리는 검을 손에 쥔 악마의 모습이 보였다.
색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른어른 피어오르는 저것은 분명 불꽃이었고, 불을 다루는 대악마라면···.
“꽥꽥이 너, 여자였어?!”
“저 검은 내 능력이야!!”
불꽃 검과 똑같은 색의 머리칼을 지닌 악마가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저쪽이 진짜 꽥꽥이인가 보다.
1050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