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4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50화(1050/1105)
100. 공작님과 기적 (8)
나는 시선을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재투성이다.
신성 결계 안쪽 바닥에 풀들이 자라나 있는 걸 보면, 저 잿더미의 본래 모습은 봄을 맞이하여 파릇파릇한 잎을 틔운 초목들이겠지.
꽥꽥이가 직접 태운 것인지, 불의 검을 들고 있는 여자 악마가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저것들을 불태운 힘의 주인은 꽥꽥이일 테다.
반가움과 별개로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대륙에 오고야 말았구나.”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보아하니 무사히 살던 곳으로 돌아갔던 모양인데, 뭐하러 돌아왔어?”
꽥꽥이의 물음에 품안의 세르펜스가 움찔하더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재회의 기쁨이 앞선 나머지 어째서 내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 이유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동자에 동요가 어렸다.
“정말···, 돌아갔던 건가? 마왕에 의해 영적인 고문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난 네 꿈속에 들어가서 말했다? 근데 네가 안 믿은 거지.”
“······.”
얼마나 놀랐는지, 세르펜스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녀석의 눈동자가 죄책감에 물든 건 순식간이었다.
울상을 넘어 죽을상을 한 녀석이 무슨 말을 할지는 뻔하다.
“서, 선우···. 미안하다, 내가···. 내가, 당신을 완전히 잊지 못해서···, 그리워해서···, 보고 싶어 해서···. 그 때문에 당신이···.”
“착각할까 봐 말하는 건데, 나에 관한 기억이 지워졌던 건 어디까지나 사고일 뿐이야. 난 절대 그런 걸 바라지 않았어.”
“그렇다 하더라도···. 안전한 곳에 있는 그대를 이런 위험한 세상으로 부른 건 나이지 않은가?”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반응이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주머니에 미리 손수건도 넣어 두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녀석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여유롭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도 간절히 오고 싶었고, 내가 선택해서 온 거야. 이렇게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온 걸 보면 알잖아? 강제로 불려 왔다면 이런 걸 준비할 시간 같은 게 있었겠어?”
“선택권이···, 있었다고?”
“응, 있었어. 처음 이곳에 올 때에도, 이번에도.”
“음···?”
“자세한 건 이따 말해줄게.”
룩스메아와 있었던 얘기를 풀어놓자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지금은 한가로이 대화나 나누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뭔가 신성함이 느껴지는 하늘의 빛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증거는 없으나 꽥꽥이 외 악마 1명이 당장 공격에 나서지 못하는 게, 저 빛 때문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세르펜스와 재회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룩스메아가 배려해 준 것일까?
아니면 내가 이곳에 온 것과 마찬가지로 세르펜스의 바람이 반영된 결과일까?
뭐가 되었든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대충 넘어가고 우선 세르펜스부터 달래주자.
“아무튼 고마워. 내가 이곳으로 올 수 있게 도와줘서.”
“저, 정말···, 흐윽!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아니라 나를 선택해 준 건가···?”
“그런 의미로 선택이란 단어를 쓴 건 아니었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해 둘까?”
내가 얼버무리는 타이밍에 딱 맞춰 하늘의 빛이 사라졌다.
돌연 세르펜스가 눈을 휘둥그레 뜬 것은 빛이 사라진 것과 거의 동시였다.
무언가를 보고 놀란 듯한 그 반응에 의아함이 떠올랐을 무렵, 녀석이 입에서 더 의아한 말이 튀어나왔다.
“머리색이···?”
“응? 내 머리색이 왜?”
“···검은색이 되었군.”
“응, 원래 검은색이라고 말했었잖아. 올리브색이 아니라 어색해?”
“그런 게 아니라···. 음, 이 얘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다.”
세르펜스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라는 의견에는 동감한다.
당장은 꽥꽥이 외 악마 1명과 대치 중인 이 상황부터 어떻게 하는 게 급선무다.
다른 일행들과도 마찬가지지만, 세르펜스와는 특히 나눌 얘기가 많으니.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데···.
“아, 이제야 알겠네. 이상한 호칭으로 불려서 좀 헷갈렸는데, 네가 그 ‘썬’이라는 천사구나?”
꽥꽥이의 검을 들고 있는 여자 악마가 말을 걸어왔다.
나에 관한 것을 기억해낸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기억해냈다고 해 봤자, 악마끼리 공유하는 정보뿐이겠지만.
나는 다짜고짜 공격해 오지 않는 게 어디랴 감지덕지하며, 세르펜스를 살짝 떼어 놓았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녀석은 아쉬운 표정을 짓긴 했으나 순순히 내 품에서 벗어났다.
“그래, 그렇게도 불리지.”
“악마의 그릇이 되어 영혼을 잡아먹힐 뻔했으면서도 다시 돌아오다니. 본체로 넘어오면 뭔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봐? 그것도 혼자서?”
햇무리가 사라졌는데도 어째 바로 공격해 오지 않는다 싶더라니.
내게 이 상황을 해결할 히든카드라도 있는 줄 알고 경계 중이었나 보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쨘!’ 하고 해결법을 제시하고 싶었지만.
“어···, 딱히? 솔직히 별생각 없이 그냥 와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좀 막막해.”
“선우···!”
“너 대체 뭐하러 온 거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르펜스와 꽥꽥이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소리를 지른 타이밍만 같았을 뿐, 그다음 둘의 처지는 정반대였다.
세르펜스는 어째서 그런 무모한 선택을 했느냐는 듯 내게 책망하는 눈총을 보냈고, 꽥꽥이는 동료 악마에게 눈총을 받았다.
“어, 어이가 없어서 그래! 너무 어이가 없어서···. 대책 없이 중간계로 넘어와 봤자 험한 꼴을 당하게 될 뿐인데, 고문당하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이상하잖아?”
“그냥 멍청한 거겠지. 아니면 그런 걸 즐기거나?”
꽥꽥이의 변명이 통한 것인지, 이름 모를 악마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졸지에 나는 또다시 이상한 취향 의혹을 받게 되었다.
정말 너무나도 억울하지만 휴마누스를 보며 참기로 했다. 그가 선택의 날에 받은 의혹에 비하면 ‘그런 취향’ 의혹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어쨌든 잘 됐어. 프라시더스뿐 아니라 저 천사까지 잡아간다면, 마신 테네브리오 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테니까.”
“응, 그렇겠지.”
동료 악마의 말에 꽥꽥이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은 오지 않길 바랐건만, 정말 싸울 수밖에 없는 거려나?
마음 같아서는 느긋하게 일행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 주면 안 되느냐고 꽥꽥이에게 부탁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꽥꽥이에게 죽어달라고 사정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
‘현재 마왕은 마계에서도 중간계에 소환된 악마들의 마기를 멋대로 폭주시킬 수 있다지?’
본래는 같은 세계에 있을 때에나 가능했던 일이나, 최근에는 다른 차원에 있어도 그것이 가능해졌다는 게 꽥꽥이의 설명이다.
그 얘기를 했을 당시 꽥꽥이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묻어났다.
즉 마왕은 언제든지 악마들을 죽일 수 있다는 뜻이었고, 그렇기에 악마들은 맹목적으로 마왕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마왕을 향한 악마들의 존경과 충성은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자칫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될 위험이 크니.
여러모로 꽥꽥이가 내 부탁을 들어줄 가능성은 없다. 결국 그의 마음만 불편하게 할 뿐이다.
아니, 그냥 불편한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테다.
아무리 악마라도 ‘이들은 너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수준을 넘어서 적이지만, 내게는 소중한 동료야. 그러니까 우리의 생명 연장을 위해 네가 죽어 줄래?’ 따위의 부탁을 들으면 상처받겠지.
“세르펜스, 싸울 수 있겠어?”
“으음···, 죄송합니다. 신성석을 완성하긴 했지만, 아직 신성력이 회복되지 않은지라···.”
휴마누스의 물음에 세르펜스가 죄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휴마누스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 위 악마들을 주시했다.
이름 모를 대악마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그런 휴마누스를 내려다보았다.
“인간들을 처리하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저 천사가 무슨 수를 숨기고 있을지 모르니 이제부터는 전력을 다하는 게 좋겠네.”
“그런가?”
“지금 ‘그런가’라고 한 거야? 아까부터 계속 뭐 하자는 거야? 그 의욕 없는 태도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설마하니 천사가 나타난 판국에 계속 뒤로 빠져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당연히 그럴 수는 없지.”
동료 악마의 다그침에 꽥꽥이가 팔짱을 풀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하고 말하듯 꽥꽥이의 동료 악마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검푸른 불꽃의 검이 크게 일렁였다.
“끼야아아아아악-!!!”
검푸른 불길이 검을 쥔 팔을 타고 올라 악마를 집어삼켰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머리가 굳어버린 건지, 아니면 불에 타들어 가는 고통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된 것인지.
이제는 꽥꽥이의 동료라고 해도 되는 건가 애매해진 악마가 팔다리를 휘저으며, 불을 털어내려 애썼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다급해졌는지 마기를 끌어 올려 능력을 사용했는데···.
‘바람이네?’
불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바람을 쓰는 대악마라면 ‘아와티니아’ 였던가?
뭐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얼떨떨한 와중에도, 전에 꽥꽥이가 알려준 대악마의 정보가 떠올랐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불 꺼!!!”
불은 꽥꽥이의 능력이니 그를 죽이면 불을 끌 수 있다는 결론이라도 내린 걸까?
악마 아와티니아···. 이하 ‘아와’가 꽥꽥이를 향해 달려들며 검은 칼날 형태의 바람을 날렸다.
꽥꽥이는 그것을 피하며 불의 검을 만들어 손에 쥐고 다가오는 아와를 향해 휘둘렀다.
“무슨 짓이긴? 공을 독차지하려는 짓이지.”
“내가 아까 말했잖아!! 다른 대악마들이···!”
“그것 말인데, 우리의 실력이 비슷하고 내 능력인 불이 물에 약하다는 게 문제인 거잖아? 그럼 내가 네 영혼을 혼자 먹어치운다면 해결되지 않을까?”
꽥꽥이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아와는 칼날 형태의 바람을 만들어 꽥꽥이의 공격을 막거나 쳐내고, 때때로 반격까지 가하며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불에 타들어 가면서도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다니, 대악마의 몸뚱이는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모르겠다.
‘아니, 것보다···. 꽥꽥이 쟤 갑자기 왜 저래? 설마 나를 구하려고···?’
공을 세우니 어쩌니 하는 얘기가 오가긴 했으나, 내가 아는 꽥꽥이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이 아니다.
만약 그런 성격이었다면 내 본명과 정체를 마왕에게 숨기지도 않았겠지.
그렇기에 지금 꽥꽥이는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너, 너···! 천사를 앞에 두고 우리끼리 싸우자는 거야?!”
“글쎄? 난 별로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차원 궤도에서도 소환된 걸 보면 알 수 있잖아? 저 천사는 자신의 모든 힘을 포기하고 몸만 겨우 넘어왔거나, 원래부터 아무 능력도 없었겠지. 그러니까 안심하고 죽어.”
그런 말을 듣는다고 안심하고 죽어줄 리 없는 건 인간이든 악마든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아와는 ‘캬악!!’ 하고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괴성을 내지르며, 꽥꽥이에게 화살 형태로 응축된 바람을 쏘아 보냈다.
“네가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마신 테네브리오 님께서 모르실 거라고 생각해?!”
“천사가 중간계에 소환되는 대사건이 있었으니, 이미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겠지. 그런데도 지금 내가 멀쩡한 걸 보면 답이 나오지 않아? 임무만 완수할 수 있다면 아무 문제 없어. 잘하면 ‘대악마’보다 더 강한 수하가 생길 수도 있으니, 마신 테네브리오 님께도 이편이 이득 아닐까?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런 날이 오길 기대하고 계셨을 수도 있고.”
검푸른 불길 안에서 아와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꽥꽥이의 말을 들은 악마가 전의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꽥꽥이는 대등한 급의 대악마를 상대로 부상 하나 없이 여유롭게 승리를 쟁취했다.
1051회